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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일설교-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행 9:32-43) 10일전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행 9:32-43)   여러분, 여성잡지의 제왕이라 부르는 에드워드 보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닥터를 만나기 전에 기다리면서 보는 것이 있고 약국에서 약을 타기 위해 기다리면서 보는 것이 있습니다. 심지어 미용실에서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기 전, 보는 것이 있는데, 대개 많은 여성들은 여성잡지를 보지 않습니까? 이 여성잡지의 최초 보급자가 바로 이 보크입니다. 6살 때 가난에 못 이겨 이 미국에 와, 신문팔이 등등 어렵게 고학으로 공부하여, 세계적인 언론인이 되었고,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인 여성을 위한 잡지를 만들어 보급시킨 장본인입니다. 가난한 이민자에서 성공한 잡지 경영자로, 그리고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자신의 할머니의 한마디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어디로 가든지 네가 그 곳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무슨 모양으로라도 너로 하여금 네가 있는 곳을 달라지게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그의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었던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이고, 사도행전은 다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본문부터 12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본문의 내용은 베드로가 애니아를 치유하고, 그리고 다비다를 살린 이야기이고 사울과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누면서 오늘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이 애니아가 있는 곳으로 간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이곳에 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다시 사도행전 8:25절로 가야 합니다. 행 8:25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들어보세요? “두 사도가,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 두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어디서요?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바로 안 가고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이 말씀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간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함을 듣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에 먼저 누가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바로 빌립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사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안수하였는데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이 그들에게 임하였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눴던 말씀입니다. 기억나시죠? 그리고 이 두 사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격려한 후, 사마리아 여러 촌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8장 25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시작인 9장 32절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 8장 25절 이후의 말씀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 시작인 9장 32절의 내용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8장 26절부터 9장 31절까지의 다른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내용이고, 핍박을 받아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기록들이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려고 다메섹까지 갔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과 함께 사울이 예수님을 위한 사도로 전환된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빌립과 사울,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중간이 삽입하였는데, 누가는 왜? 이렇게 다른 내용들을 중간에 삽입한 것일까요? 누가의 글을 쓰는 법칙이라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의 이야기나 사울의 이야기나, 그리고 베드로의 이야기 모두 다 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의도이고, 성령께서 복음의 문을 이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안에 의도적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솔직한 상황은 문화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이 이방인을 향할 수가 없었지만 성령의 놀랍고 절묘한 역사를 통해 이방을 향한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빌립에게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만나라고 하였고, 심지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과, 사울이나 베드로를 통해서도 성령께서 열고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사마리아도 복음을 들었다 하여 급히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 후의 이동경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32절을 봅니다. “그 때에, 어느 때입니까?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입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행 9:32) 베드로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 룻다에 사는 성도들을 만나러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 말은 다른 표현으로 룻다에 믿는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들을 격려하려고 심방을 간 것인데, 그곳에서 한 사건을 만난 것 아닙니까? 먼저 이 룻다는 어디에 있는 곳일까요? 룻다는 사마리아와 유다 땅의 중간 지점이 되는 해변에 가까운 지역입니다. 이 룻다로 성도들을 심방하려고 베드로가 간 것이라고 32절이 밝히고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곳에 성도들이 있었을까요? 충분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것도 빌립의 복음전파의 결과입니다. 사도행전 8장 40절에 보면,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후,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아소도와 가이사랴를 잇는 길 가운데에 이 룻다가 있고, 빌립이 룻다에도 들려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 그래서 빌립의 전도결과로 이 룻다에도 예수를 믿는 성도가 생긴 것입니다.   이 룻다에 베드로가 믿는 성도들을 만나려고 갔던 것이고 아마도 믿는 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 룻다에 갔는데, 그곳에서 한 중풍 병자를 만난 것 아닙니까? 33절을 볼까요?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행 9:33)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만남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룻다에 믿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심방을 한 베드로가, 8년 동안 자기 스스로 옷도 입을 수가 없고 화장실조차도 갈수가 없는 이 애니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만남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만남이란 대화적 관계를 세우게 하고, 서로의 상호성과 서로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게 합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만남이 우정으로 발전되고 사랑으로도 발전되는 것이 만남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닙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만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신 당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먼저 이 만남을 계획하셨으며,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도록 하셨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주 앞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만남을 생각하다가 모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만남은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전에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태어날 당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모세입니다. 갈대로 바구니 안에 담겨져 나일강에 띄워 보내졌던 그가 바로의 딸을 만났고, 애굽의 궁에서 공주의 자식처럼 왕자로 자라 부러울 것이 없는 그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머니 요게벳과의 만남이 되게 하심으로, 아들 모세를 비록 애굽의 왕자로 지냈지만 히브리인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택한 히브리 백성으로 자라게 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자란 그가 자신의 힘으로 조국 백성들을 구원하려 했지만 결국 살인자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에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그는 실패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모세가 꿈도 사라진 가운데, 이름 없는 목동으로서의 40년의 광야생활을 지냈고, 주름이 잡힌 노년으로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걸어야 하는 황혼의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호렙산에서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나무는 하나도 타지 않는 현상을 보는 가운데, 어릴 때 말로만 듣던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와 그를 만났고, 그를 부른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인 히브리 백성을 건져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라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모세가 되었는데, 그만큼 만남은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알고 모시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에는 진정한 마음의 휴식 또한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이 베드로와 애니아의 만남은 목자와 한 성도와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34-35절,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행 9:34-35) 마치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하고 있는 베드로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38년 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베드로가“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애니아에게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이 베드로의 능력을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누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이 말을 했지만 누가의 강조는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닌 주님께서 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주의 명령에 애니아가 즉시 일어났다는 것이고 주님의 주권적인 승리의 역사를 보였다는 것이며, 낫게 하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결과가 되게 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8년 된 중풍 병자가 일어난 가능을 만들었을까요? 세 번째로 그대로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명령은 ‘너를 낫게 하시니 지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순종은 믿음의 결과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없는데 행동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 내 인간적인 신념이나 철학이나 지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진짜 참 믿음은 기록된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참 믿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따르는 것이 정상이고 그 믿음 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실존이 현존이 되게 하는 것이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경험하려면 이성적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애니아는 자기의 생각이 많고 자기의 말이 많은 모습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말씀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룻다로부터 10마일 떨어진 바로 가까운 욥바라는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36-37절을 볼까요?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행 9:36-37) 오늘 이 구절에서 이 다비다라는 여 제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를 도르가라고도 부르는 여인이고, 이 여성이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죽었다면 무덤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오늘 구절에 보니까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게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다 죽습니다. 안 그래요? 아무리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해도 나이 들고 병들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워놓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죽은 이 사실을 1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알리려고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있는데 38-39절을 봅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행 9:38-39)   그러면 죽은 이 여인의 소식을 왜? 1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알린 것일까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책임자이니까, 와서 천국환송예배를 거행해달라고 알린 것일까요? 아니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누가는 이 도르가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하나님의 마음, 어느 특정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시선이 이제 이방을 향하게 되는 그 결정적인 한 인물을 이 여인을 통해 꺼내고 있는 누가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즉 이 여인의 선행과 고넬료의 선행, 그리고 이 여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고넬료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같다는 것을 누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 도르가라는 여인에 대한 아주 짧은 설명 안에는 엄청난 내용이 담긴 선행과 구제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다음 장의 고넬료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 대해 “내가 네 기도와 구제를 보았느니라”라고 하였던 이것과 지금 이 도르가에 임한 것이 같은 문맥을 이어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 그를 무덤으로 보내지 않고 시체를 곱게 씻어, 다락으로 가져갔고 룻다에 있는 곳으로 뛰어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8년 된 중풍 병자를 고친 베드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도착한 것이고, 다락으로 올라갔는데, 주변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한 옷가지를 보여주면서 도르가가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손수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이라고, 예수님의 사랑이 깃들음을 말하면서 울고 있는 그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38-39절입니다.   그것을 들은 베드로가 40절을 행합니다.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 이 말씀에도 마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죽은 딸 앞에서의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베드로 또한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여인을 살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이었을 것이고,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도와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하였을 것인데, 하나님이 그를 살립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누가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것이 상식적인 입장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상식은 베드로를 가리켜 미련한 자라고 비웃는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식의 결론은 죽은 자는 살아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앞에는 시체가 있고, 그도 또한 시체를 보면서 기도하고 있는 그를 향하여 상식은 미련한 자라고 비웃는 그의 비웃음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은 상식을 뛰어 넘는다는 것 아닙니까? 누가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비록 죽은 다비다의 시신을 보고 있었지만 다비다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다비다를 보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도 의심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비다야 다시 일어나라’라는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조국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조국 대한민국은 죽은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대통령 하야가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어느 교회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앞으로 나가 머리에 재 뿌리면서 회개하자고 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미스바로 모이자고 하지도 않고, 한 여인의 책임만 거론하면서 물려나야 한다고만 하지, 내 죄 때문이라고 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고 죽은 다비다와 같은 현실 아닙니까? 이 절망감을, 이 무척이나 슬픈 이 현실을 어디로 끌고 가야합니까? 기도의 자리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미국에 있다고 이 현실을 그리 직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나, 경제나, 심지어 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교회나, 영적지도자들의 타락 등등은 너무나도 심각한데 어느 누구도 시체가 되어 버린 조국을 향하여 한국 영적지도자들을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국의 회복은 하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회복이 시작됩니다.   회복의 결과가 41-42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1-42) 기적의 결과는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더니 그가 일어났고, 성도들을 불러 그의 산 것을 보여준 결과입니다. 그런데 온 욥바사람이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살아난 다비다를 보게 된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믿더라’가 아니라 ‘주를 믿더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돌아온 것이고, 하나님이 기억할 구제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치고 다비다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애니아를 고치시고 다비다를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어버린 조국의 아픔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때 다비다를 살린 것처럼 우리를 비롯하여 대한민국을 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봅니다. 혹시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고 있지는 않는지, 영적으로 죽어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면서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고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여 영적인 해방을 누리시는 여러분,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는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참된 교회는”(행 9:31) 24일전

    여러분, 계속해서 우리가 사도행전을 나누고 있는데, 사도행전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사 복음서 다음에 등장하는 성경 아닙니까? 아시다시피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그리고 태어나서부터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의 과정을 가능한 한 충실하게 기록하고 있는 성경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리고 이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 사도들이 성령의 힘을 받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면서, 교회가 세워나가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는 성경인데, 그래서 ‘사도들의 행적이 담겨 있다’고 해서 사도행전이라 하는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마태 16:18절의 응답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이 주님의 말씀의 응답이 사도행전아닙니까?, 이 사도행전 안에는 교회의 주인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든든하게 세워져야 하는 이 교회를 말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행 1:8절인,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이 임하게 되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는 이 말씀의 실제 성취가 사도행전입니다.   오늘은 이 사도행전 9장 31절, 이 한 말씀만을 나누게 되는데,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이 짧은 구절 안에는 그동안 초대교회에 있었던 사건들을 총 집약해서 정리해 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이상적이고 건강한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 또한 오늘 본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순절 성령감림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성령이 강림한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오순절 사건이에요?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이 땅에 교회가 탄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여 변화를 받아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증가하였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서로 격려하고 나누는 건강한 공동체가 이루어 졌는데, 그러다보니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받았고, 베드로 또한 성령을 받아 담대하게 전도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전하는 곳마다 앉은뱅이가 일어났고 3천명, 5천 명씩 회심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 아닙니까? 교회로 몰려오는 이들을 돌보고 양육할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하여, 일곱 집사를 선출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부흥하였지만 교회는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아 결국 스데반이 순교하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핍박의 시작이 결국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각각 여러 곳으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흩어졌어도 그곳에서 복음을 넓게 확장되게 하는 역사들을 만들었다는 사실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핍박의 주역이었던 사울이 회심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과 합류하게 됨으로, 복음전파의 흐름이 마치 고여 있던 댐의 물이 터짐과 같이 거침없고 거세게 흘러, 격렬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모습의 표현이 바로 오늘 본문인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 지니라”입니다. 이 짧은 구절이지만 이 구절 안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같이 나누면서 우리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 다시 한 번 한목소리로 31절 본문을 읽어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그런데 보세요? 오늘 본문은 먼저 ‘그리하여’라는 접속사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하여’라는 접속사는 무엇에 대한 접속사일까요? 바로 31절에 나오는 여러 교회, 그러니까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를 덧붙이는 접속사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다와 사마리아에까지 확산되었는가에 대한 그 모든 내용들을 요약하고 있는 접속사인데, 무엇보다도 오순절 성령이 역사하여 초대교회가 이루어져서 이 초대교회에 역사한 이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방까지 확산되는 데 있어 그냥이 아니라, 여러 가지 고통스러운 위기와 고난과 환란이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접속사입니다. 그리고 이 초대교회가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고, 사도들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며,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사도들에 의해 말씀을 배울 수 있었다는 접속사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건물도 없었고, 교파도 없었던 이 초대교회가 이러한 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비록 유대인에게서 시작이 되었지만, 유대인에게 제한될 수 없었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 되었어도 예루살렘에 제한되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루살렘의 교회도 아니고, 유대의 교회도 아니며, 갈릴리의 교회도 아니고, 사마리아의 교회도 아닌, 진정한 그리스도를 위한 교회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뜻이 담긴 교회에 대해 오늘 본문은 교회의 특징과 본질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의 첫째가 바로 ‘평안하여’입니다. 여러분, 평안이란 평화와 같은 의미입니다. 마음의 갈등과 불안과 비극과 절망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고, 삶의 자족이 넘치며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영어로는 [Peace]이고, 히브리어로는 [샬롬]이며, 그리고 헬라어로는 [에이레네]입니다. 이 모두 다 영혼의 평화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 삼서 2절의 말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2절) 무슨 말입니까? 곧 영혼의 평안이 넘치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평화가 없지만 마음속에는 진정한 평안으로 채워진다는 의미라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평안은 자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 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바로 예수님만이 진정한 평강의 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미 핸드릭스라고 록 음악의 기타 연주자가 있습니다. 음악을 한느 사람이라면 이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압니다. 사실 그는 마약 중독자이었고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자입니다. 그가 요, 무대 위에서나 밖에서 난폭하게 행동하며 문란한 삶을 살았는데, 1970년, 어느 공연의 마지막에서 그는 자기 기타를 부숴버립니다. 로버트 맥기와 도날드 사포가 쓴 [평안을 찾아서]라는 글을 보면, 어느 날, 지미 핸드릭스가 공연을 끝내면서 관중들의 열광하던 박수갈채를 멈추게 하면서 무릎을 꿇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행동에 관중들은 고요해졌습니다. 그가 이 고요한 정적을 깨며 관중들을 향해 이 말을 했답니다. “여기에 누구 참된 평안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무대 뒤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갑작스런 초청에 응한 사람이 없었고, 며칠 후, 약물과용으로 죽고 말았습니다.   무엇이에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참된 평안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진정한 평안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만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뉴스를 보고 사람들에게 듣게 되며, 우리가 때론 경험하는 것들은 이 시대가 점점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조국 소식들을 들을 때 더욱더 평안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물질은 얻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였지만, 마음에는 평안하지가 않다고들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교회와 뗄 수 없는 단어가 바로 평안이잖아요? 그런데 평안을 잃어버린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아는 교회의 소식들을 들었을 때 그 교회가 아직도 시끄럽다는 소식을 접하면 먼저 찾아오는 것이 무엇이에요? 안타까움이 아닙니까? 왜? 싸웁니까? 그 내용은 거짓 때문이고, 그 내용은 돈 때문이며, 질투 때문에, 그리고 용서하지 않아서 싸우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핵심은 평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싸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법이라는 빌미로 싸우는 것이잖아요? 솔직히 이들 모두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령 받은 사람들인데 싸우는 것입니다.   하나 더 해봅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이 미국이 평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에 더욱더 평안하지 않는 곳이 바로 이 미국입니다. 솔직히 이 미국은요, 이미 가라앉고 있는 타이타닉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 위에 떠 있지만 가라앉고 있는 타이타닉입니다. 가라앉는 속도가 늦어지느냐, 빨라지느냐는 결정이 있을 뿐, 이미 이 배는 가라앉고 있다는 것이 어쩌면 솔직한 이 미국의 현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 가라앉는 것을 늦춘 일이 바로 이번 대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트럼프가 좋아서 뽑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힐러리가 어떻다? 해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각 당의 아젠다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도 얼마나 더 가까운가? 라는 결정을 이번 미국 대선에서 선택하였다고 저는 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이 미국에 있는 교회들의 역할은 가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되어야 하고, 세상의 방법과 사조와 생각이 교회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면서 비록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을 이기는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때론 폭풍이 와도 교회는 빨리 가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든든히 서가고’입니다. 이 의미는 교회가 결코 ‘완성되었다,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동안 가장 핍박에 앞장 서 있던 사울이 회심하고, 주의 제자가 됨으로 이제는 핍박자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시 로마황제인 칼리굴라가 자신의 동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려고 혈안이 되니까, 유대인들이 목숨을 걸고 반대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이 황제가 암살당함으로 핍박이 현저하게 감소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본문의 표현대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든든히 서간다’는 단어 안에는 오늘 본문의 ‘진행 한다’라는 단어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진행 한다’는 의미는 어떤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걸어간다, 함께 간다’라는 의미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한 목표를 향하여 전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목표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의 지상명령’인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네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목표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목표이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향하여 ‘진행하라’는 것이고, 교회는 마땅히 해야 하는 사명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당연하게 ‘수가 더 많아지니라’라는 결론으로 남게 된다는 것, 단순히 ‘더 해진다’를 뛰어 넘어 ‘재생산’한다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재생산’이 무엇일까요? 재생산은 바로 나를 통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나를 통하여 구원받은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게 하는 일, 이 일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목표를 따라갈 수 있을까요? 두 가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주를 경외함으로’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이 주님 되게 하심이며, 하나님을 최고 가치로 인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왕을 향한 공포심이 아닙니다. 두려움 없이, 바로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잘 아는 성경말씀, 히 4: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4-16)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담대히 나갑니까? 기도로 말씀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위로’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의 힘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힘으로 하니까 교회가 평안해지고 교회가 성장하여 사람들이 와서 붙는다는 말이 이 말입니다. 붙는 다는 말은 붙어 있다는 말 또한 포함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사랑의 교회에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이 이런 집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위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인데, 이 의미가 바로 ‘격려’, ‘권면’을 의미합니다. 무엇에 대한 격려입니까? ‘성령의 용기 북돋음’입니다. 이것을 통해 모든 교회들이 부흥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소극적인 의미로 위로이지만, 적극적인 의미가 바로 ‘용기를 북돋음’이라는 말이에요.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령께서 개인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어루만져 힘을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고, 우리 생애 전반에 걸쳐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무리 할 때까지 도와주시며 격려하시며 보듬어 주심으로 힘들고 어려워 낙심할 때도 강하게 하신다는 이 사실을 믿을 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결국 교회가 건강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건강하려면 네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먼저 ‘일치된 마음’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요구에요. 엡 4:4-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4-7) 무엇이에요? 한마음을 유지하면 그에 성령의 위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요, 성령님이 보내시는 것입니다. 교회성장도 사람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회심의 역사가 일어나고 치유의 역사와 감동의 역사와 자신을 부수고 깨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기에 이런 역사가 우리 교회에도 가득하기를 소망해봅니다.   세 번째는 ‘제자훈련’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는 반드시 지도자들이 탄생되고 양육되며, 성장하고 훈련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도자들이 세상으로 내 보내어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이 왜? 제자훈련을 받았습니까? 바로 이 목적 때문입니다. 이 작은 교회에 무슨 꿈이 있겠느냐 하겠지만 저는 우리 교회가 끊임없이 갱신하며 인재를 양육하는 교회로, 그래서 이 사역자들이 세상에 내 보내지는 교회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주를 경외하였다”는 이 의미의 또 다른 의미는 성도들이 살아있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가져야 할 가장 큰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살면 모든 것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들의 문제는 이 예배를 경시하는 데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예배는 축제입니다. 무엇에 대한 축제일까요? 여러분에게 행하신 그 사건들에 대한 축제이고, 그것들이 예배 때 재생되어 하나님을 더욱 높이는 자리로 나가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의 모습이고, 이렇게 예배할 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2016년도 점점 역사의 그늘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참된 교회를 지향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사랑의교회가 참된 교회의 든든한 위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함으로 하나님을 더욱 높이고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과 우리 사랑의교회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사울과 아나니아”(행 9:10-22) 38일전

    “사울과 아나니아” (행 9:10-22)   여러분도 뉴스를 통해 들었고 보았겠지만, 지금 현재 대한민국은 최아무개 때문에 난리가 아닙니다. 정권 비선 실세인데다가, 이 최씨가 현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을 비롯하여 정부요직의 전반에 관여한 사실이 들어나, 현 대통령을 ‘하야’시키려는 움직임 등등과 청와대 내각의 총사퇴라는 혼란에 혼란들은 한마디로 핵폭탄 이상입니다. 이 가운데 한 점의 의혹이 없이 하려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지만 과연 법원 판사들이나, 검찰의 검사들이 제대로 수사할 지도 의문이 있기도 합니다. 이 사태를 바라보면서 저를 비롯하여 대한민국 국민 모두는, 이 사실 때문에 패배의식으로 가득한 주간을 보냈을 것이고 ‘이건 정말 나라도 아니다’는 생각은 많은 혼란을 가져와 누구를 탓하기 이전에 나 자신부터 회개하는 자리, 기도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무척 들었던 한 주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대한민국 현 상황은 이 나라 수준이전에, 아니 국민 수준이전에, 그리고 교회 수준이전에 아니 내 수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한 사람도 너무나도 큰 사건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패배의식과 혼란이 몰려와 좌절 가운데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사건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오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이었고, 무엇보다도 의기양양의 그였지만, 갑자기 하늘로서 강열한 빛에 둘러싸인 것부터, 심지어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음성과 함께 꼬꾸라짐과 시력까지 잃어버려 결국 다른 사람에 의해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유다라고 하는 작은 집안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생각하면서 절망과 혼란을 간직한 채, 기도로 나가는 사울을 보여주고 있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아나니아를 통해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와, 치유함을 받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이며, 그의 입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말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이야기가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 내용이 담긴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기 원합니다.   첫째로 사울의 회심을 보는 관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울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는 증명서를 지참하고, 몇몇 사람들과 함께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신학적인 문제가 대두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빛으로 나타난 것도 그렇고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는 것과 유독 바울의 귀에만 들린 이 특별한 경험이 모태로부터 택정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이 은혜를 이해하고 믿지만 예수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하겠느냐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분은 이미 승천하셨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분인데, 사울을 찾아오셨다는 것에 대한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느 누구의 주장대로 누가가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만든 창작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fact는 바울이 기독교를 박해했던 사람이었다는 것과, 다메섹에서의 회심과 그리고 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누가가 아주 세밀하게 적고 있는 이것은 결국 누가가 무엇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기에 이렇게 세밀하게 적은 의도가 바로 누가가 바라보는 사울의 회심 관점이고, 그것은 이제 그가 그동안에는 박해자이었지만 이제는 박해를 받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그가 이렇게 예수를 만난 이 일에 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역사에 직접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 아나니아라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이 이름의 의미를 가진 아나니아에 대해 성경은 특별한 기록을 별로 내놓고 있지 않지만, 오늘 본문과 사도바울의 간증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먼저 10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행 9:10) 다메섹에 이 아나니아라는 주님의 제자가 있는데, 사실 그는 열두 사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일곱 집사도 아닌 이 다메섹이라는 도시의 한 성도로서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제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을 위해 준비된 사람으로 이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데, 사도행전 22장 1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 아나니아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들어보세요?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행 22:12)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나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나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나 주위로부터 칭찬을 받는 이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대개 출신과 배경을 우선으로 보는 것이 있는데, 대개 ‘어디서 사느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위치에 서 있느냐’를 따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또한 이런 경우로 인하여 차별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 아나니아는 이런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냐?’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평범한 시골 성도이지만 하나님이 쓰시는데 결정적인 자기 역할을 잘하였던 자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름다워 예수님을 무척 사랑함은 언제나 기도의 자리로 나가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이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보듯이, 주님과의 대화는 너무나도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충만한 모습은 말씀을 준비하면서 참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원하기는 여러분도 이렇게 주님과 기도로 그리고 대화의 모습으로 자리 매김 되기를 축원 드립니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시대에 살고 있어서 기도도 생략하고, 하나님을 말씀으로 만나는 것도 생략하는 경우가 허다한 우리에게는 결국 참 믿음의 경험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생깁니다. 참 믿음은 하나님이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말씀하시고, 어떻게 운행하시며, 어떻게 기적을 베푸시는 가를 목격하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득한 신앙생활을 하시는 여러분, 기쁨이 충만한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 번째로 순종입니다. 순종은 아나니아나 사울 모두에게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거리 이름과 누구의 집에 누가 있다는 구체적인 명령을 듣고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고, 사울 또한 아나니아라는 자가 와서 안수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듣고 그를 맞이하는 순종입니다. 아나니아에게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이 11절인데 보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행 9:11) 무엇이에요? ‘직가’, Straight Street, ‘곧은 길가’로 가서 유다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 있는 다소 출신의 사울을 만나라는 구체적 명령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확신을 주기 위해 ‘네가 만나야 하는 이 다소 출신 사울도 네가 와서 안수하게 되는 것을 보았다’라는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12절,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행 9:12) 이 명령에 아나니아가 잠시 놀라며 당황하게 되는데, 이어서 13-14절도 봅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행 9:13-14)   이 말의 표현은 ‘아니 그 다소사람 사울을 말입니까? 그에 대한 소문을 저도 들었는데,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대제사장의 체포영장을 가지고 우리를 잡으러 왔다고 들었습니다. 그를 만나라고요?’라는 당황함으로 그가 순종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구체적인 명령에 등장되는 사울 때문에 당황함을 보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는 아나니아 아닙니까? 또 하나는 이 다소출신의 사울입니다. 그의 순종은 ‘저가 기도하는 중’이라는 문구에서 찾을 수 있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나니아를 보낸 것과 그도 또한 아나니아가 찾아와 자신에게 안수할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신 사실 때문에 순종을 자리로 나가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할 때 혼란과 절망이 아나니아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고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는 사울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생각해보면, 솔직히 주님의 말씀은 단지 몇 마디이었고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시면서 주님은 스스로를 밝히시며 이제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마디 이르시기만 하셨는데, 이 짧은 만남이 사울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의 가치관과 신앙관은 물론 그의 인생 전체가 바뀜으로 혼란과 두려움과 심지어 눈까지 보이지 않아 별의별 생각이 다 머리를 스쳐가, 도대체 이전에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이고, 내가 예수를 인정하면 나의 신앙관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등등의 끊임없는 생각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지 않았을까요?   이 혼란을 방치할 수 없어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가 무슨 기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넋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는 고백의 사흘을 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상한 심령이 되었고, 폭탄 맞은 마음으로 그동안 하나님을 잘못 알았던 모든 지난날의 편견과 아집을 깨트리는 기도를 하였을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를 하는 중, 하나님은 아나니아를 보내 그에게 안수함으로 회복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은 육체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의 영혼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트려 져서 하나님 그 분 앞에서 매달리느냐에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상황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고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에서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실 적마다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 기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역사들을 보게 하신다는 사실인데,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해답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솔직한 것은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이나 아나니아나 사실 내놓을 만한 업적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아나니아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나 종교적인 명분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보다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으셔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또한 본문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은 그냥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깨트려진 마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이고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마음이 깨트려져 영혼이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주시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온전히 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돌아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깨졌다는 것은 상한 심령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것이자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좌절했기 때문에 하나님만 붙들 수밖에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뜻들을 이루시고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룬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기도로 마음을 하나님께 열고, 하나님이 계심으로 내가 있고,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 방식의 기를 가까이 하기를 원합니다.   순종은 자기의 두려움, 자기의 선입관, 자기의 염려들을 전부 덮어두고 따르는 자리로 나갑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비밀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비밀의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사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이 15-16절입니다. 보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행 9:15-16)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하여 아나니아를 보내기 원한다는 말씀으로 바라고 원하기는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찾기 위해 보내기를 원하시는 그 중의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로 이것은 먼저 온 성령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17절을 보면,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행 9:17) 아나니아가 주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여 사울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갔고 거기 가서 안수를 했는데 성령이 먼저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는 놀라운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성령의 사건이 먼저 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고 할 때도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성령의 임재를 이야기 하였고, 심지어 고넬료도 마찬가지인데,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서 이렇게 사울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물세례를 받는 사울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18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행 9:18) 안수를 하니까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다시 보았다는 것이고, 일어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말하는데, 이어 19절도 봅니다.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행 9:19) 즉 성령이 먼저 오고 나중에 물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사울에게 있어서 변화입니다. 20절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사울에게 있어서 변화는 그의 입에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의 입에서 예수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니까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는데, 21-22절입니다.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행 9:21-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행 9:22) 여러분, 사울의 삶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은 이 사건은 그가 다메섹에 가까이 올 때 일어난 것이지만, 이것을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였지만 앞으로는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이 계획은 사울과 교회의 관계회복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자 가기를 꺼려하는 아나니아를 사울에게 굳이 보내신 이유가 바로 불편한 관계요, 원수의 관계에서 사울도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심으로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20-22절의 이야기는 누가가 바로 본문에 삽입했던 것이지만 사실 아나니아와 사울이 대면한지 2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고 눈을 뜨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사울은 아라비아로 가게 되는데, 나중에 나누겠지만 이러한 사실을 갈리디아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은 시내산, 즉 아라비아에서 거의 3년 동안 주님과 인격적인 사귐의 시간을 가짐으로 이 기간이 주님의 종으로서 부르심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하는 과정이었고, 주님과 개인시간을 가진 후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 예수를 증거 하는 그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왔지만 지금은 나사렛 예수를 통한 생명의 도를 전파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고, 그는 핍박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위대한 사도로 다메섹에 돌아온 것이자, 핍박자에서 핍박을 받는 자로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복음이 이방 땅으로 확장되는 역사적인 순간이 되게 한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몇 가장 중요한 영적인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또한 그 백성들을 통하여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시며, 그를 통하여 사람을 인도하시어 세상을 향한 당신의 역사하심을 확장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에게 보인 환상과 사울에게 보이신 환상, 그리고 그들을 만나게 하시는 이야기들은 결국 부활의 주님께서는 지금도 자신의 사역을 행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굳게 믿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것은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이고, 주권적으로 이루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우리의 자세가 겸손한 순종이라는 것, 아나니아가 그렇게 하였듯 우리 또한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함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원하기는 이번 한주간도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겸손히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면서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사울아, 사울아”(행 9:1-9) 52일전

    “사울아, 사울아” (행 9:1-9)   오늘부터는 우리가 사도행전 9장을 나누게 됩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저술가요 신학자를 꼽은 다면 사도 바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절반인 13권의 성경을 저술한 저술가요, 오늘 날의 모든 신학의 대부분이 다 바울 서신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온 내용이고, 주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말미암아 회심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기록이 오늘 본문인데, 그 이유는 한 개인의 구원문제가 아닌, 이 복음이 이스라엘로 들어가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 세계로의 확장으로 이루어지는 길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사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에서 자라났고,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전통과 히브리 율법에 아주 정통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사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헬라문화와 철학에 익숙했다는 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당대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업을 한, 완벽한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 일만 한 것이 아닌 자비량 목사, 즉 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 목회자이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던 자가 바로 사울입니다. 그의 신앙적인 확신을 보면 역사철학을 가진 배경의 지성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앞 뒤 가리지 않는 행동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 아주 나쁜 선입견이 있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잡아 드리는 일을 하였는데, 오늘 본문도 그가 이 일을 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살기 등등입니다. 살기 등등이라는 말은 바늘을 찌르면 바로 폭발할 것 같은 의미인데, 1-2절을 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그는 예수쟁이라면 다 잡아 넣을 계획으로 자기가 옳은 것에 대한 적극적 행동을 옮겼습니다. 그가 이런 적극성을 보인 이유는?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영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행 22:3절과 빌 3:4-6절을 통에 간증하고 있는데, 들어보세요. 먼저 행 22:3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행 22:3) 그리고 빌 3:5-6절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무엇을 말 하냐면? 그만큼 집안 내력이나, 법적 신분이나, 학문적 지식이나, 종교적 경건과 열심에도, 하나 뒤질 것이 없다는 자신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영접하기 전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스데반이나, 보잘 것도 없고 내 세울 것도 하나 없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어부출신이 율법에 대해서와 성전 희생 제사로는 구원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한 분노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유대지도층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를 죽인 천하의 죄인이라고 떠드는 것, 이것이 용납이 안 되어 이들을 잡기 위한 살기 등등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과는 거리가 먼 세리나, 죄인, 그리고 창녀, 문둥병자들을 옹호하는 모습은 더욱 역겨웠고,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간다는 말 또한 안 되는 어불성설이라 여기고 있는데, 문제는 이 가르침에 많은 유대인들이 열광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분명히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인데, 그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황당무계한 거짓말을 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종교적 지식과 여호와의 신앙으로 두고 볼 수 없어, 이들을 잡아 드려 질서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살기 등등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져갈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갈릴리에서 온 이 무식한 시골 어부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핵심 인물 몇 사람만 잡아 없애면 이 바람은 끝이 날 줄로 기대하는 살기 등등의 행동을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자꾸만 되살아나 알 수 없는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이 “살기가 등등”은 ‘씩씩거릴 정도의 화가 난 모습’이 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그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왔는데, 두 번째로 ‘홀연히’입니다. 3절을 볼까요?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혈기 당당한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빛이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홀연하게 내려쪼였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한 그가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개입이 갑자기 뜻하지 아니하게 임한 것을 말한 것이고 또한 ‘미리 예정했던 일이 때가 되어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즉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는 결과란 것이며, 천국보좌에 계셔야 하지만 직접 사울을 만나러 다시 강림하신 드라마틱한 역사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주관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만남이 되게 했고, 가시적으로 직접 현현하신 단 둘이서의 일대일 대면이 되게 한 것 아닙니까? 왜요? 그만큼 주님은 바울을 이렇게 한 치의 어김없는 준비하심의 결과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좀 역설적 표현이지만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회심이 안될 만큼 예수에 대한 반발이 가장 완악한 자이었기에 직접 나타나셨다는 것이고 그의 안에 가득 차 있는 강한 지성과 학식, 교양과, 자존심, 체면, 권세, 지위, 신분, 재물 등등의 견고한 진을 이 방법을 통해 부서뜨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모파심이 들었습니다. 구원 받은 사건들이 이렇게 극적이어야 진짜인가 하는 생각, 사람에 따라 극적인 만남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에 따른 많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예로 어느 모 목사님은 그 당시에 집사였는데, 주일에 골프 치러 갔다가 엄청난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결국 얼굴에 수백 개의 유리 파편이 박힌 가운데 깨어났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과정이 없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정말로 큰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날 때 바울과 같은 극적인 상봉은 역사상 단 한번 있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이 ‘홀연히’ 임한 빛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고 타고 갔던 말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엎드려 벌벌 기는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살기등등하여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는 그 다메섹 길에서 홀연히 임한 빛으로 인하여 앞이 안 보인 상태가 되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부름을 받은 당사자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여주님의 어떤 목적을 드러내신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즉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는 부름이고, ‘나는 분명히 살아계신다’라는 부름입니다. 이것은 시 공관을 초월한 임재이었고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면서 그가 사울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아닙니까? 이에 사울이 묻기를 ‘주여 누구시오니까?’라고 묻습니다. 5절을 볼까요?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사울의 질문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여러분, 보통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정상입니다 안 그래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보통 “후아유?”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것이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왜? 사울이 이렇게 물었을까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는 순간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면서 그가 ‘주여 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고 난 후 하늘의 예배 장면을 목도할 때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스랍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서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하늘을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며 서로 창화하며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장면을 이사야 선지가가 봅니다. 그 이전에 주님은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강한 임재로 말미암아 ‘화로다 나는 망하였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울 또한 하나님의 강한 임재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본 것이고 거부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을 느낀 나머지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사울은 소외된 채 진행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즉 사울 자신의 의식이나, 의지, 능력 등등,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자랑했던 학문적 지식이나, 신앙적 열심 등등이 첨부된 것이 아니라 한마디도 대꾸도 하지 못한 상태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고, 그의 유일한 질문인 “주여 뉘시오니이까?”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누구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 또한 일방적이어서 우리의 행위로나, 우리가 잘나서가 아닌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일방적인 것은 죄의 값이 사망인 이 값을 지시기 위해 죄 없는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었던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에 직접개입하신 주님이 자신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밝히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 밝힘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에 처형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고 바울이 핍박한 것은 당연히 예수 믿는 자들인데 주님은 당신을 핍박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네가 말살하려는 그 나사렛 이단이라는 자고, 네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우긴 그 부활한 예수이며,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죽은 대상이 바로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을 회개시킨 메시아이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이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즉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주인공이 바로 나, 그 예수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라는 대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대한 답을 줌으로 말미암아 이 대답을 들은 사울은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곳이 다메섹 도상이었지만 캄캄해진 영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력도 잃어버렸고 심지어 땅에 꼬꾸라져 누구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이렇게 혼란을 겪는 자리, 캄캄해진 영혼 속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왜요? 의기양양하게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살기등등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다 끌고 와야 한다는 신앙적인 열정의 개선장군이었지만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따랐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스데반의 긴 설교가 사실이었고 베드로와 빌립과 수많은 자들이 예수를 전파하는 이 복음이 사실이라는 이것 앞에 꼬꾸라져 결국 다른 사람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신세, 너무나 다른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8-9절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9) 여러분,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한 상황이 되고 만 사울, 하루아침에 이런 모습이 된 사울은 이 사미일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듯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이 믿고 추구하였던 모든 것들을 돌아보았던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주님은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만남을 예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누군가에 대해 주님은 6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6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 9:6) ‘성에가면 너를 만날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너에게 안수할 것이며 그 사람이 네가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이렇데 주님을 만났고 주님이 이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고요.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분명히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것은요,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주권적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왜? 여러분을 불렀을까요? 이것 깊이 생각해보셨나요? 사울은요,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것이고 반면에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는 목적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하심이고 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인데,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이상으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았다고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지만,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주님을 배척하였던 자들이 우리입니다. 우리도요, 살기등등하여 예루살렘에서 그 먼 길인 다메섹까지 당국으로부터 받은 합법적인 체포명령서를 가지고 간 사울은 아니지만 주님이 마음을 아프게 한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불러 주신 이유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고, 단 이 한 가지가 이유라는 사실 앞에 ‘사울아, 사울아’하면서 부르신 주님 또한 오늘 여러분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을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바라기는 바울의 고전 15:10절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던 그가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 않는 가운데 자신을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고백을 한 사울이 된 것 아닙니까? 우리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성령으로 살려주셨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이것과,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권속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며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 이유,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이 찬양 같이 불러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스데반이 순교한 후(행 8:1-8) 61일전

    “스데반이 순교한 후” (행 8:1-8)   여러분, 우리가 지난주에 나눈 내용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오늘 본문은요, 스데반의 순교 이후의 이야기인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의 급증으로 구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의 불만과 갈등이 일어났는데, 열두 사도들이 이 일을 맡을 일곱을 택하여 세우게 됩니다. 그 중에 스데반이 있었고, 성경은요, 스데반에 대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가리켰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라고 가리키면서 그가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논쟁에서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지혜가 충만하였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도 많아졌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 기독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위협을 느낀 힘이 있는 무리들이 스데반을 잡아 공회에 세웠던 것이 우리가 3주에 걸친 스데반의 긴 설교이었고 스데반의 긴 설교의 핵심이 너희가 메시아인 예수를 죽였다는 강한 선포와 함께 스데반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에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 박해가 시작되어 교회는 위기를 맞이했고, 사도들만 남기고 유대와 사마리아 땅 사방으로 흩어진 결과가 있었지만 그들은 흩어졌어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까지 약 300년간 복음 전하는 열정이 식지 않았습니다. 이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이고,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인데, 이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3가지입니다. 1절을 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무엇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까? 사울의 등장이고, 교회에 찾아온 큰 핍박이며, 흩어짐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울의 등장을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에서의 국한된 모습에서의 탈피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의 목표가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것이고, 제가 자주 인용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시선이 어느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온 인류이기 때문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이 말씀대로 주를 믿는 백성들의 수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가득했지만 흩어지게 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만의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유대가 복 받는 것이고 사마리아도 온 세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이 일의 시작이 바로 사울의 등장이라는 것, 그래서 핍박과 흩어짐이 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 사마리아 역사의 시작이 됩니다.   여하튼 사울은요, 1절을 보니까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죽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들, 즉 예수쟁이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백성이고 율법으로도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교회에 큰 핍박을 가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끌어내어 감옥에 가두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였습니다. 언제까지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교회에 큰 핍박을 가했는데, 사실 핍박은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듯이 하나님 당신의 교회를 확장하시는 역사이었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은 순교를 하였고 경건한 자들에 의해 장례가 치러지면서 그의 생애는 여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계기로 교회에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3절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무슨 이야기입니까? 성도들은 결국 흩어질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임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대개요, 이 어려움 때문에 상심에 빠집니다. 특히 사람에게 당한 것은 더욱 심합니다. 의욕 상실과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가운데, 이 어려움을 준 상대를 원망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 기간은 길어집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을 바라봐야 하고 원망을 품는 것 대신에 주신 상황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온 엄청난 핍박은요, 당연히 주눅 들게 만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흩어짐을 받은 이들이 주눅 들어 좌절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4-5절이에요. 볼까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 8:4-5) 핍박 때문에 흩어졌지만 이곳저곳을 다녀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곳저곳 다니면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대표로 성경은 빌립을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입니까? 이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요, 먼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섬깁니다. 즉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주, 그러니까 ‘큐리어스’ 의미 안에는 어떤 권위의 표현으로 고용주 또는 노예를 부리는 상전, 그리고 주인 혹은 소유주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라고 부를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의 상전이시며 우리의 소유주가 되시는 분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왜?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의 소유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요, 먼저 나라고 하는 이 존재의 소유자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그의 소유물이란 사실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6: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에요? 나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피로 값 주고 사신 나의 주인이신 그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새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섬기며 우리의 주인으로 받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잘 알고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가 가득찬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가 복음이고 다른 하나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무엇이냐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빌립은 침묵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움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하였고, 지금도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세계 곳곳에 나가 침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국 기독교 지도자인 리에게 어느 미국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였답니다. “중국에는 유교가 있는데 굳이 기독교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요. 그랬더니 리가 이렇게 답하였답니다. “공자는 선생입니다. 하지만 구세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공자는 죽었어요. 그는 죽은 것으로 끝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공자도 그리스도 앞에 나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이고 이 구원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여러분이 가만히 있다면 모순 아닐까요? 이 질문에 여러분 스스로 답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전해진 복음으로 인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6절을 볼까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 8:6) 그들이 보인 반응 첫째가 빌립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들었다는 것은요, 그냥 들은 것 이상을 말합니다. 즉 신뢰가 담긴 들음이고 귀 귀울이고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귀 기울이고 들은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목수가요, 일하다 애지중지하던 손목시계를 톱밥 더미에 떨어뜨리고 말았답니다. 수북이 쌓인 톱밥을 헤쳐 보았지만 손목시계는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하는 수없이 동료 목수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등불을 들고 톱밥 더미를 뒤졌지만 도통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는 것을 잠시 멈추고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수의 손자가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 손목시계를 찾아 작업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목수가 손자에게 “얘야, 이 시계를 어떻게 찾았니?”라고 물었더니 손자는 “조용히 바닥에 앉아 있었을 뿐이고, 조금 있으니까 ‘째깍! 째깍!’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시계가 어디 있는지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들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의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을 들었는데, 우리는 어느 목사님의 말을 주의깊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부모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효자가 되고 자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자애로운 부모가 되며, 아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은 남편이 되고 남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은 아내가 된다.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훌륭한 임금이 되고 자기 내면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영성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요. 사랑하는 서도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듣습니까?   두 번째로는 들었더니 이들이 행하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이에요? 성령이 충만해서 전하는 말을 들었더니 행하는 표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복음의 현장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행하는 표적이 무엇일까요? 7절에 이렇게 기독하고 잇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행 8:7) 복음을 들은 후 일어난 첫 번째 변화가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쇠사슬이 다 끊어져 버리는 역사를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귀신은 정말 귀신입니다. 귀신이라는 의미는요, 파리가 많이 붙어 있는 ‘똥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더럽다는 의미이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더러운 영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더러운 귀신이 떠나간 것이고, 믿는 자의 특권인 예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이 떠나는 경험을 한 것 아닙니까? 아멘!   그러기에 우리도 예전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러운 귀신이 내쫓기고,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과 성령의 역사를 우리의 영혼 속에 임하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함없는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복음이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샥이 왔는데, 근육이 마비된 사람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특히 40년 동안 앉아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복음이 선포되면 제일 첫 번째 반응이 숨어있는 악한 영이 떠나게 되고, 두 번째 반응이 병 고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아멘!   이제 마지막 두 번째로 큰 기쁨입니다. 8절을 볼까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로 ㅇ니하여 기쁨이 가득한 것이고 주님께서 예고하신 일로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기쁨은 자고 있는 곳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무엇이 자는 것일까요? 어떤 어린아이가요, 자기 방에서 아버지가 옆에 온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장난감 벽돌을 쌓으면서 놀고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인기척을 하자 아이가 “쉿!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하였답니다. 거기다 더욱 대견스럽게도 아이는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까지 하니까 그동안 예배 때마다 아이에게 조용히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 것이 큰 교훈이 되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왜 예배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하지?”라고 물었더니, 아이의 대답, “아빠도 참, 사람들이 다 눈 감고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되잖아요” 이것이 자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곳이 아닌 살아있는 신앙의 현주소에서만 큰 기쁨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무엇이 살아있는 신앙일까요? 바로 큰 기쁨이 넘치는 신앙이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는 자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의 현장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한 도시인 사마리아 성처럼 되었을 때 이루어지고, 빌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이 치유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됨으로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안에 이 기쁨이 가득하게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확신하고 따르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그 자체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곳에 말씀의 능력과 역사가 그대로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울이 머문 기간이 겨우 3주 아닙니까? 그러니까 3주 동안만 담임목사를 바울이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떠난 후 들리는 좋은 소문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중에 나누겠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지 않습니까? 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 8:14)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박해를 받지만 복음을 더 널리 퍼뜨리시고 박해 아래 있는 교회를 더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의 큰 손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시고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장 큰 타격과 손실을 입히던 열혈파 박해자인 사울을 기독교 최대의 선교사요 신학자로 만드신 역사가 되게 하셔서 교회를 더욱 크고 견고하게 세워나가신 것 아닙니까? 이 역사를 잠시나마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의 말대로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크고 통쾌한 복수인데, 솔직히 교회는 그 출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박해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되고 흩어졌지만 그만큼 더 많은 교회가 생기게 하였다는 사실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솔직히 헬라 시대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조롱거리였습니다. 헬라철학자들이 복음을 논리적으로 형편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전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하였고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세상과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그렇게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 왜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는데, 왜 일까요?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번 한주간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자리로 나가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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