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행 14:1-7)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사순절 기간의 말씀을 나누는 관계로 사도행전을 잠시 떠났다가 오늘 다시 돌아왔습니다. 14장의 말씀을 나눌 것인데, 기억나실지 모르지만 그동안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에 관하여 나누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바울과 바나바가 AD 46년경,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지 않습니까?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안디옥의 항구인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라는 섬으로 들어갔는데, 이곳이 첫 번째 선교사역장소입니다. 첫 번째로 구브로를 정한 이유는 이곳이 바나바의 고향이었기 때문이고, 바나바가 고향 사람들에게 복음을 듣게 하고파서 첫 선교지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살라미라는 곳에서 요한 마가가 합류하였고, 그 다음 수도인 바보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마술사이며 거짓 선지자인 엘루마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가 복음을 전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주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소경이 되게 하셨고, 그곳의 로마 총독인 서기오 바울을 전도한 후에 바울의 일행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라는 곳으로 향합니다. 배를 타는 문제 때문에 이 과정에서 요한 마가는 일행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고, 이것으로 인하여 바울은 상심이 매우 컸다고 행 15:8절에서 누가가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바울과 바나바는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들어갔고, 안식일이 되어 이곳의 회당에 갔는데, 회당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바울에게 설교를 부탁하니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때 많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큰 감동을 받아, 다음 안식일에도 말씀을 전해 달라고 요청하는데, 아마 제 생각으론 그때는 회당 안에 그리 많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이 좋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도 듣게 하고픈 생각들이 들어서 부탁을 했다고 보는데, 돌아오는 안식일에 바울이 다시 설교를 하였을 때는 이 도시 사람들의 거의가 참석하였고, 이 과정 속에서 설교로 인하여 유대인 사회에 큰 불화가 생겨,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확고한 다짐을 하고 이고니온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일어난 내용들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에게 대한 악감을 품게 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바로 떠난 것이 아니라 오래 있으면서 주를 힘입어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고, 그런 가운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두 모습이 나타났다는 이야기, 특히 믿지 않는 자들이 결국 바울을 돌로 치려하니까 잠시 피해 루스드라와 더베로 가서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담긴 내용들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큰 은혜를 소원해봅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1. 변하지 않는 메시지

바울과 바나바가 이고니온에 들어간 이유가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를 했듯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의 강퍅한 유대인들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피해 옆 동네인 이고니온으로 가 이 이고니온에서도 복음을 전하였는데, 1절을 볼까요?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행 14:1) 바울이 이 이고니온의 회당에서도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로 전하였고 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바로 변하지 않는 메시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변하지 않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라는 문구이고, 이 문구 안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말했던 그것을 똑같이 반복해서 다시 말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한 메시지나 지금 이고니온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동일한 메시지인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자신의 인생전체를 바꿔 놓는 메시지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행하심과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는 바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전하고자 하는 절심함이 가득한 바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유앙겔리온’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복음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복음이 무엇인지, 그 복음이 약속한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르거나 한 측면만을 왜곡된 채로 이해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으로서 ‘하나님의 구원통치’가 임박했다는 기쁜 소식이 복음이고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네 마디로 요약하면, 1)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이고, 2) ‘그가 장사되었다는 것’이며 3) ‘그가 사흘 만에 성경대로 일으켜졌다는 것’이고 4) ‘그가 게바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시키기 위해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울은 이고니온이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했던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십자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전했는데,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에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 즉 인종도 배운 자도 배우지 못한 자도 가난한자도 부자도 시간도 시대도 그리고 상황도 지역도 초월하는 능력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이 왜?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는 지방으로 가셨습니까? 복음이 이스라엘 한 곳에만 국한될 수 없다는 증거입니다. 무덤 사이에 거처하였고 쇠사슬로도 맬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죽음과 멸망에 머무는, 그래서 무덤 사이의 은밀한 처소에 거하여 돼지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가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존재였어요. 이 은혜를 모르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 아닙니까? 이 은혜를 나누는 수많은 사람들을 역사에서 볼 수 있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하고 있는 선교사님들 또한 이 이유 때문에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혹시 엘리자베스 엘리어트 여사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녀는 88년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아름답게 마친 믿음의 선배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어트, 1956년 미국 전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그입니다. 1927년 미국의 오리건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휘튼대학 재학시절 지도력이 남달랐던 자였으며, 레슬링부의 챔피언이자 스타가 바로 그였는데, 그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남아메리카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느껴 에콰도르로 갑니다. 그곳에서 사역했던 선교사와 교제하면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아우카 부족에 대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짐과 엘리자베스 둘은 에콰도르 선교사로 부름을 받아 아예 1953년 10월 8일 에콰도르에서 결혼까지 하고 1년 뒤인 1955년 가을, 비행선교사 네이트 세인트가 이 아우카 마을을 발견하여 이 아우카 족에 대해 짐 엘리어트에게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개월 뒤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은 아우카 부족 마을에 들어갑니다. 비행기를 착륙할 비행장이 없었기 때문에 공중을 몇 번 회전하다가 마침 강가의 모래 턱이 보여 그곳으로 착륙합니다. 다시는 비행기가 뜨지 못한 상황도 알면서 들어간 이들 모두는 도착한 직후, 몇 시간이 지난 후 이 아우카족에 의해 창과 도끼로 죽임을 당합니다. 이때가 바로 1956년 1월 8일, 짐 엘리엇의 나이는 29세, 당시 Life지와 Time지는 이 사실에 대해 분노를 보도하였습는데, 그들의 선교가 너무나 무모했고, 불필요한 낭비라고 의문까지 제기하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이 젊은이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멀리 남미까지 가서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의 기사를 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와 인터뷰를 하는데 엘리자베스는 “낭비가 아니고 남편은 어렸을 때부터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이다. 남편은 이제야 그 꿈을 이룬 것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남편의 글과 일기를 모아 책을 출간하면서 남편 짐 엘리엇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편지를 발견하여 그 책에 소개하였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들어보세요. “하나님, 제가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부족한 나의 나무토막 같은 인생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가 주를 위해 탈 수 있도록. 나의 삶을 주님께서 소멸시켜 주옵소서. 주님 제 몸은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오래 사는 것보다 완전하고 풍성한 삶을 원합니다. 바로 주님과 같이 살기를 원합니다”라고요.

 

이것을 끝난 줄 알았는데, 이 젊은이들의 아내 다섯 명은 한두 살밖에 안 되는 어린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남편이 순교한 그 아우카 부족을 다시 찾아갑니다. “우리 남편들이 못 다한 일들을 우리들이 마저 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이 찾아간 이유였습니다. 이때 아우카족은 여자를 해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생각하여 부인들을 해치지 않았고, 아우카족을 위해 여러 해 동안 헌신하는 이들의 사역에 감동한 추장이 예수를 믿게 되었고, 선교사를 살해한 사람들은 현재 와오라니 교회의 담임목사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마을에는 수백 개의 교회가 생겨났으며, 짐 엘리엇이 죽고 나서 태어난 그의 아들은 그 마을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 엘리엇 선교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시간 안에서 모든 일을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 가심을 믿는 거예요.”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짐 엘리엇도 바울과 바나바의 전한 메시지도 이렇게 변하지 않는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이었고, 핍박을 받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쫓겨나 지금 이고니온으로 와서도 전한 것은 변하지 않는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또한 붙잡아야 할 메시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나타난 두개의 반응

2절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행 14:2) 무엇이에요? 이 구절을 보아 알듯이 이들은 처음부터 거부했고, 마음이 삐뚤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대처가 3절에 나옵니다.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행 14:3) 1) 이들이 핍박을 했다고 해서 떠난 것이 아니라 ‘두 사도가 오래있었다’는 것이고, 2)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이었습니다. 이 의미는 무작정 기다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접근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3)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게 하시니’, 즉 기적과 표적을 동반하는 은혜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의 의미는요, 누가의 설명에 따를 때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기독교인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지만 복음이 참되다는 이 사실에 ‘기적’과 ‘놀라운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파됨으로 생겨난 두개의 그룹이 있었는데, 4절입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행 14:4) 그러니까 유대인 편에 서는 사람과 바울 편에 서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참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모두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받아들이는 건 아니었다는 의미가 이 구절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왜? 이들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믿지 못하였던 것일까요? 믿는다는 것은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은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말해도 끝까지 믿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적인 진리는 영적인 인식을 통하지 않으면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것이에요. 참된 기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이 눈을 소유한 사람은 ‘홍해’사건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그러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눈을 가진 자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바로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초자연적 기적만 찾는 미몽에 빠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관적 인식론을 절대화하는 모순을 양상 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하나님은 역하신다는 이 사실을 굳게 믿고 믿는 자리에 우리 모두가 서기를 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이들의 반응으로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요. 그것이 5-7절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14:5-7) 무슨 이야기에요? 상황이 악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고니온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소나기가 오니까 잠시 피했던 것이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났는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루스드라와 더베의 지방으로 피했지만 “복음을 전하였다”라고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피신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는 점,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누가가 이 사실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제든지 복음을 전하는 곳에는 복음으로 인한 반대의 세력이 등장한다는 사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이에요. 우리 교회 한 성도를 통해 구원받지 못하고 운명하시는 부모님을 앞두고 있는 버마 청년이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선교사님을 찾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부탁을 들으면서 그곳에서 사역하고 계시는 선교사님을 찾게 되었고 마음 한 구석에는 부모님이 구원받지 못했지만 평소에는 무심히 지냈고, 노력을 해도 잘 안 되었는데, 이제 천국과 지옥 갈림길이 눈앞에 닥치니까 너무나 안타까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이것 아십니까? 여러분, 천국에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두 가지 질문이 주어진답니다. 하나는 “혼자 오셨습니까?”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 당신은 혼자 올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이래요. 우리가 만약에 “제가 전도한 사람이 있어요”라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혼자라도 천국에 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그 말을 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는 수긍하실 수 있는 대답이 있어야 한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가 생각났고 이 말에 저는 큰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솔직한 우리의 마음은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부담감을 긍정적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이 부담감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왜? 전도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것일까요? 바로 복음 때문이에요.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이고,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던 우리이었지만, 우리를 살리려고 영생의 길로 이끄시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순교하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대속의 길, 죽음의 길을 가신 것 아닙니까? 이것을 사도 바울이 이고니온에서 전하였던 것이고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전하였으며 지금도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을 알았던 자리에서 이제는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자리에 서있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에게로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가 누굽니까? 그를 위해 기도하고 때가 주어지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또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번 한 주간을 살면서 믿는 자의 본을 보이는 모두가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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