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시 23:4)

 

여러분, 오늘 설교제목이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입니다. 함께한다는 힘이 얼마나 클까요? 샌프란시스코에 막 들어서면 엄청난 다리 하나를 보게 되죠? 그 다리 이름이 금문교입니다. 이 다리는 6차선 너비의 다리에요. 2,825미터 길이의 다리이고, 이 길고 육중한 다리를 붙드는 힘이 기둥이 아니라 바로 철사랍니다. 철사들이 서로 묶여있는 ‘함께함’이 그 육중한 다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227미터의 주탑에 매여 있는 1미터 굵기의 철선이 육중한 다리를 붙들고 있는데, 그 철선의 한 통은 쇠붙이가 아니라 머리카락보다 약간 굵은 1번 철사 2만 7천 개의 가닥이 함께 꼬여 있는 철사이고, 이 2만 7천 개가 함께 붙어 있음으로 엄청난 하중의 다리를 붙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힘 있게 살 수 있는 것은 바로 주님이 붙들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푸른 초장이신 예수님이 함께 하심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의 공급함과 돌보심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경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면서 두 가지의 늘 괴롭힘이 우리를 공격합니다. 그 하나는 부족함이라는 괴롭힘이고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라는 괴롭힘입니다. 이 둘이 우리 인생에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앞 절인 3절에 보면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3)라고 이 괴롭힘이 전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요? 자신의 영혼이 슬픔을 당하였지만 예수님이 새롭게 하시기 때문이고, 약할 때 강하게 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정말로 부족함과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시편34편을 보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나누고 있는 간증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가드로 도망갔는데, 이 가드가 어떤 곳이냐면 자신이 죽였던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그곳으로 도망을 갔지만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던 상황에 놓인 것 아닙니까?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았고, 그때 다윗에게 찾아온 감정이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 이렇게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들어보세요?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 34:4) 솔직히 당시 두려움의 대명사는 골리앗입니다. 이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 중의 용사가 다윗인데,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다윗은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찌 다윗뿐이겠습니까?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어제는 두려움을 이겨도 오늘은 그 두려움에 다시 넘어지기도 한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다윗의 고백은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고 즉, 기도로 하나님을 주목하였고, 두려움에서 건진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 그의 소생을 노래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소생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회복불가능을 회복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 지하 병동에서 있었던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어떤 한 소녀가 이 병동 지하에 격리되어 수용돼 있었습니다. 이유는 심한 정신병을 앓아서입니다. 사람들이 다가오면 괴성을 질렀고 사납게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의사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능이 없어보이자 의사는 회복 불가능이라는 진단을 내려버렸습니다. 그 이후론 부모도 포기했고 어느 누구도 면회를 가지 않았는데, ‘회복 불가능’ 진단이 회복과는 먼 꿈으로 되고 말았지만 어느 은퇴한 한 늙은 간호사가 이 소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갈 때마다 그에게 늘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이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무려 6개월 동안 찾아가 위로하고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소녀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왔어요. 마음속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상을 향해 문을 열기 시작했고, ‘회복 불가능’이 정말로 회복으로 바뀐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회복된 그녀가 자신과 같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복 불가능이라고 진단을 받은 소녀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헬렌 켈러]입니다. 그리고 이 소녀를 빛으로 이끈 한 늙은 간호사가 바로 [앤 설리번 메이시]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입니까? 설리반 안에 있는 예수로 인하여 회복이 이루어지게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짜 소생은 푸른 초장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만 이루어집니다. 다윗의 환경은요, 너무나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푸른 초장이신 예수님을 그가 보았고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소생케 하신 분이심을 경험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구체적 고백이 오늘 본문 4절 아닙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여기 이 구절 안에는 풍성한 의미의 함축이 있습니다. 보세요. ‘내가······다닐지라도’라는 부분에서 여러분, ‘다닌다’가 주는 의미는 그냥 다닌다가 아니라 눈 감고도 가는 길을 다닌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곳으로 가는지를 알고 있는 길이고, 그 길을 따라 걷기로 결심함으로 안전함을 느끼는 길,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길을 다닌다는 의미가 ‘내가 ...다닌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길에 다윗은 하나의 지명을 거론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골짜기]입니다. 여러분,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 또는 절벽과 절벽 사이 등에 만들어진 움푹 패인 지형을 가리킵니다. 이 사이로 하천이 흐르기도 하고요, 때론 교통로로 이용되는 곳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곡 안에서 이리저리 걷는 것으로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 계곡을 가로질러 걷는다는 의미로 이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즉 골짜기를 지나갈 때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면서 간다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향하여 빨리 가로질러 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짜기에는 단순히 계곡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뜻밖의 일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골짜기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골짜기를 가야하는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도 이 골짜기 앞에 붙은 부사처럼 [사망의]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망의 그림자가 있는 골짜기]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사망의 본질이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계속 이 그림자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 이 골짜기를 만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기에 자포자기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있다는 반전을 이야기한 것이고, 빛이 찾아온다는 반전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강한 선포 아닙니까? 그러면 이 선포는 그의 아집에서 나오는 선포일까요? 하도 고생을 해서 그렇게 생각해버리는 자기만의 도취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이 되는 선포이고, 사망의 골짜기이니까 죽음이 찾아올 수 있는 상황도 만들어지기도 하겠지만 자신은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선포입니다.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과 염려와 슬픔과 비극과 비참함이 있겠지만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선포인데, 왜냐하면? 오직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이기 때문에, 상황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이고, 어둡고 음침한 곳에 지나가더라도 주님이 자신의 영혼을 지키시기에, 두려워하지 않을 것에 대한 분명한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또한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백의 주인공이 되기 원합니다. 주님이 우리와 아니 여러분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여러분을 향하여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다는 사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1-2) 아멘! 이 사실을 믿으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 ‘구체적인 함께’의 결과를 다윗은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바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팡이와 막대기”가 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대부분은요, ‘노인’이 의지하는 이미지를 떠오릅니다. 그런데 다윗이 말하고 있는 이 지팡이와 막대기는 ‘때리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7:14절에 보면 하나님이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고 막대기나 지팡이를 ‘때리는 것’과 관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앞으로 다윗이 잘못을 범한다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들어서 다윗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자녀들끼리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고 그것을 지켜보는 다윗의 마음이 아프도록 한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팡이와 막대기는 그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하고 있습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이 때론 벌하기도 하고, 때론 공격하는 세력을 물리치는 하나님의 도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고백의 바탕에는 이미 여러 차례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효력을 체험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지팡이와 막대기가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평생에 적들에게 둘러싸여 힘들었을 때나 곤경에 처했을 때 목자이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던 그였고,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목자로서 그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 시편 34편의 고백처럼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시34:4-6)의 확실한 은혜의 경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곳곳에 이런 경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지팡이와 막대기”가 ‘보호한다’는 것이 아니라 “안위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왜? 다윗은 보호가 아니라 안위라고 했을까요? 여러분, 안위라는 의미는 ‘애석해 하다, 유감으로 생각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 슬픔, 동정, 위로를 표현하는 단어가 안위입니다. 이 단어를 다윗이 왜? 보호가 아니라 안위라고 했을까요? 다윗은 이 안위를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안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로’하셨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들고 어려울 때, 목자이신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떠올렸고, 이 지팡이와 막대기가 적들을 물리친 것처럼 그렇게 보호하시는 안위를 주셨다는 것이고 사방에서 적들이 공격해 올 때, 부하들이 자신을 배신할 때, 자녀들 때문에 속이 썩을 때,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괴로울 때, 자신이 무기력하게 보여서 할 수 있는 것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을 때도 하나님의 안위하심을 경험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가 이런 경험을 했을까요? 하나님을 찾음으로, 시 34:4절에 보이고 있는 그 말씀처럼,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구했더니 하나님의 안위가 머물러버렸다고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빌 4:6-7절,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는 말씀이 바로 안위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머물러서 하나님의 큰 안위를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 미국에 ‘뷸라’라는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갑자기 급성 관절염을 앓아버렸습니다. 몸은 손 쓸 새도 없이 굳어졌고, 오른쪽 손가락의 신경만 왕성하게 살아 있게 되어 버렸는데, 그 이후로 병상에 누워 하늘과 운명과 세상을 원망하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른쪽 손가락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갑자기 오른손으로 전화하는 일에 흥미를 느껴 병실에 전화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병상의 환자들과 가족들, 친구를 잃고 슬픔에 젖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전화를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힘을 얻었습니다.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새로운 삶을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로의 전화’의 시작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 자리로 이끌었습니까? 바로 목자 되신 주님, 자신을 안위하시는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헨델도 과거에는 대충의 성도였습니다. 요즘 용어의 표현을 빌리면 잡사였습니다. 그의 신앙은 대충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깊이보다는 적당하게 믿으면서 즐거운 술로 인생을 달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날도 술에 취에 집에 돌아왔는데, 친구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 편지 내용은 보내준 한편의 시에다가 곡을 붙여달라는 제안이었습니다. 헨델은 그 시를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이 뜨거워졌고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그에게 임했습니다. 그 시는 사 40장 1절 말씀을 인용한 시였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오 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주의 영광은 드러나고야 말리 그 육체가 그 영광을 보리라” 자신의 신앙생활을 돌이키고, 나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곁에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바로 그 심정을 담어 오선지에 옮겼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헨델의 메시야]입니다.

 

여러분을 위로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는 선한 목자입니다. 여러분이 힘들어 고통 하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어 하시는 분이시고 여러분이 인생의 골짜기, 특히 깊고 어두운 날을 보낼 때마다, 친히 목자가 되신 당신께서 ‘지팡이와 막대기’,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하고 효력 있는 것들’로 여러분을 돌보신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 곁에서 크고도 놀라운 위로를 주십니다. 어떻게? 여러분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때론 우리가 가끔 세상이 더 커 보이고, 사람이나 원수의 공격이 더 강해 보이고요, 자신의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을 만나도 그때마다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시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나간다면 그 믿음은 그대로 여러분의 현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 “지팡이와 막대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 주위에 있는 하찮게 보이는 것을 들어서 여러분을 돌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여러분,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가 필수가 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분명히 말씀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부르면 응답하시겠다고 하셨기에 어떠한 고난을 만나도 두려움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를 원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고 해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은, 바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는 이 약속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이번 한주간도 예수님의 이름을 들고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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