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광야에서 준비하신다”
(사도행전 7장 17~36절)
오늘 본문은 스데반이 모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나눴듯이 지금 스데반은 공회 앞, 즉 죽음 앞에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기변명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모세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40세,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자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도망간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살아감으로,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준비시키셨다는 사실을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걸었던 모세의 ‘광야’를 오늘 우리도 함께 걸으면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때가 가까워지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즉 애굽에서 크게 번성했다고 하죠.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의 약속 때문이거든요. 이것을 위해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 가게 해서 바로 다음의 서열이 되게 하고, 이 요셉의 배경아래서 크게 번성하지만,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학대하며 갓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죽이도록 하죠?
모세는 바로 이러한 때에 태어나요? 태어난 모세가 아름다운 아이라고 본문은 전합니다. “잘생긴 것”을 말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다, 즉 외모 이상으로 하나님의 시선이 “특별한 뜻이 있는 아이”이지만, 현실은, 모든 사내아이는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믿음으로 그 아이를 보호했고 그 믿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가 되게 하였습니다. 3개월 동안 숨기며 키웠어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나일강에 갈대 상자에 담은 모세를 버리죠?
그리고 바로의 딸에 의해 양자로 자라나 이집트의 모든 지혜를 배우며 뛰어난 지도자로 성장합니다. 하지만 마흔 살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볼 생각을 가진 그가, 어느 날 이집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길래 분노하여 죽이고 말아요. 자신의 행동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계기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백성들로부터 거절당하고, 신분까지 노출되어 미디안 광야로 도망합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40년을 지냅니다. 철저한 무명이 되었고, 궁정의 언어가 광야의 언어로 바뀌었으며, 노예의 언어를 배우는 40년을 보낸 후, 그의 나이 80세 때, 시내산 광야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고 들었으므로 그들을 구원하러 가라는 사명을 주시죠? 두려움과 부족함을 느꼈던 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라는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에 의해 파송 받았다는 것,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절당했던 모세를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구원 역사의 정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버렸던 것처럼, 그들은 참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구원자, 바로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다”라는 이 사실이 오늘 본문 밑바닥에 깔린 중요한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을 나눌 때 성령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몇 가지를 같이 생각하여 봅니다.
첫째로 스데반은 왜? 모세 이야기를 꺼냈을까?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의도적이며 신학적이고, 예언자적인 고발을 하고 있어요? 사실 모세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거든요. 율법을 받았죠?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민족의 영웅이죠? 특히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는 ‘권위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6장 11절과 14절을 보면,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한다”, “이 예수가 성전을 헐고, 모세의 관습을 바꾸려 한다 했다”라고, 스데반이 모세 부정한 자로 고발당한 것입니다. 모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반박하면서 너희들은 모세를 진짜 거부한 자들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거절의 역사, Generations of Rejection”죠. “여러분이 존경한다고 말하는 이 모세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배척당했다. 이것은 지금도 똑같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보내신 참 구원자를 거절하고 죽였지 않았느냐?.”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한 사람을 이렇게 준비하셨다는 것을 스데반은 오늘 본문에서 시작하고 있죠?
그것의 첫째가? 준비된 사람, 모세입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하겠다는 때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나눈 ‘요셉을 통해 야곱 가족이 이집트로 이민을 간 결과’입니다. 그런데 시간은 그들을 고통스러운 노예 생활로 만들었다는 것이죠? 18~19절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그가 우리 족속에게 교활한 방법을 써서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 기록에 의하면요? 제18왕조 아흐모세 1세입니다. 그가 급속도로 많아진 이스라엘이 위협으로 느껴, 교활한 방법, ‘여자아이면 살려주고, 남자아이면 나일강에 던져 죽게 하라’인 이 방법으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가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20절,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이 아이가, 아니 하나님의 도구로 특별히 쓰임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님 손에 맡길 이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나일강에 버려졌지만, ‘극적인 반전’ 21~22절, “버려진 후에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바로의 딸이 데려다 키운 쉬운 일이 아님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나일강은? 바다처럼 넓고 물결이 치는 큰 강으로, 악어나 하마나 물뱀 같은 맹수들이 많은 곳이거든요. 이것에 모세를 버렸지만, 그 시간에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왔고, 그것도 이 상자가 있는 강 지점으로 왔고, 이 상자를 발견한 것, 하나님의 섭리 아니면 설명 불가능하다, 즉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니라”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의 명령은, 태어난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아이들을 다 죽이는 것인데, 그의 딸, ‘핫셉수트’는, 아버지의 말을 안 들었고, 정치적인 라이벌 관계, 투트모세 3세를 견제하려고, 모세를 자기 아들로 삼은 이 생각을, 하나님은 사용하셨다, 가장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하셨고,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신, 미래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처절한 실패와 무명 생활 40년’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살인자가 되고 말죠? 23~25절,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이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건장하고 늠름한 장년 40세에, 뜻하지 않은 사건, 이스라엘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니까 분노가 폭발하여 이집트 사람을 제압했고 죽이죠? 이것을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이렇게 한 것이라 의기양양해졌겠지만,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다음 날,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싸우니까 화해시키려 해요.
26~28절,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해시키려 하여 이르되 너희는 형제인데 어찌 서로 해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치는 사람이 모세를 밀어뜨려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는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형제끼리 싸우면 되나? 사이좋게 지내야지.”라고 했지만, 오히려 밀치면서 “누가 너를 우리의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고 덤벼들었고, 모세가 애굽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도망을 갔다고 하죠?
29절, “모세가 이 말 때문에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잘생겼고, 총명하고, 용맹하고, 행정력 있고, 무술도 잘하는 최고의 리더인 그가, 어쩌면 이집트 왕도 될 수 있는 그가 하나님은 드러나게 하심으로 광야로 도망하여 유명하지 않은 한 여인과 결혼하였고, 아들 둘을 낳았다는 것 아닙니까? 무엇이에요? 40년 동안 목자로 살아갔고, 처절한 실패와 무명의 40년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광야 40년은? 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즉 그의 입에서 늘 달고 살았던 ‘왕궁의 언어’를요? ‘광야의 언어’로 바꾸는 시간이 되었고, ‘노예의 언어’를 이해하는 지도자로 탈바꿈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광야는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일어나는, 즉 빚어내시는 하나님의 공방, Workshop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스튜디오이었습니다. 그의 인격과 믿음과 사명을 다듬고 조각하시려고, 애굽 궁정에서부터 부르신 것이 아니라 광야로 내쳐서 40년의 침묵과 낮아짐을 허락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지는 시간, 새롭게 빚으시는 공방이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기에’와 ‘내가 아니라 하나님’과 지팡이를 의지하는 겸손한 도구의 삶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아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공방도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지만, 속에서부터 천천히, 그리고 아주 깊이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그 빗 서 계시는 재료가 우리 실패입니다. 그 실패조차도 재료로 사용하여 다듬으신 후에 당신의 사람으로 세우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부르심’입니다.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어요? 즉 40년이 찬 것이죠? 하얀 머리털과 늙고 약해진 노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였습니다. 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보세요? 40년 동안이나 흔하게 보았던, 떨기나무 불붙는 장면인데, 이날만은 달랐다는 것, 아닙니까? 분명히 붙었는데 타지 않아 신기해서 그가 다가가죠? 31~33절,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드러났어요.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말씀하셨고,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다. 그러니까 신을 벗어라.’라는 음성을 그가 듣습니다. 즉 존재의 전환점이 임한 것이죠? ‘인생의 거룩한 전환점’이 임한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자리로 나가는 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신 이유를 말씀하죠. 34~36절입니다.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확실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이제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그들의 말이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속량하는 자로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복음의 정수이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구속사를 어떻게 이루셨는지를 말하고 있는 스데반입니다. 하나님이 거절당한 자에서 이제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무엇이에요? “거절의 역사,”죠. “여러분이 존경한다고 말하는 이 모세도, 그 시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고 배척당했다. 이것은 지금도 똑같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보내신 참 구원자를 거절하고 죽였지 않았느냐?.” 이것이 스데반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한 사람을 이렇게 준비하셨는데, “하나님께 쓰임 받을 사람은? 반드시 고난이라는 학교를 통과하고, 그 고난은 그 사람을 다듬고 정결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도구”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따라서 준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그분의 손길 아래서 인격과 믿음, 성품과 태도가 다듬어지고 성숙해졌다는 것이고, 이것은 단순히 능력이 뛰어나거나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지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마음이 열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애굽이 아니라 광야에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있는 광야도 이러한 곳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능력이나 조건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