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멈춘 그 길에서
(행 9:1~9)
아주 오래전 사랑의교회에서 섬길 때 일입니다. [고구마 전도]로 유명한 김기동 목사님을 초청하여 전도 집회를 가졌어요? 그때 그의 간증 이야기입니다. 그가 집사 때 일입니다. 아내를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주일이면 친구들과의 골프 모임이 종종 있어서 주일예배를 종종 빼먹었답니다. 사실 교회를 다녔어도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기지도 않았던 때이었습니다. 그런데 큰 교통사고가 난 그날도 주일예배를 빼먹고 골프 치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쿵’하며 뒤에서 박고 앞 차와 충돌하고, 순간 기절하여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왔습니다. 눈을 떠보니 얼굴에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앞차와의 충돌로 인하여 유리 파편이 얼굴에 집중적으로 박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낫기까지 너무나 아팠데요. 그리고 자신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와 결단하고, 부르심에 순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종종 자기에게 ‘목사님처럼 예수 믿었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한 데요. 이유는 자신의 신앙생활에 큰 감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없이 예수 잘 믿는 것이, 더 값지다고 말해준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얻어맞으면? 너무나 아프기에 그렇다고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는 형에는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디모데 형’이 있고요? 다른 하는 ‘바울 형’이 있습니다. 디모데 형은, ‘모태신앙’이거나, 아주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들이, 부모님의 신앙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경우를 말해요? 반면에 바울 형은요? 성인이 되어 어떤 계기, 그러니까 어떤 사건을 통해 예수를 믿는 경우인데, 김기동 목사님처럼 교통사고라든지, 아니면 죽을병에 걸렸는데 이 계기로 예수를 믿는 경우라든지, 아니면 사업 실패 등등으로 어떤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믿게 된 형이 바로 바울 형입니다. 오늘 본문이요? 이 두 번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등장인물은 예수님과 사울,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핵심은, 그토록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이전에 어떻게 살았든지,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이고,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는 그토록 교회를 ‘잔멸하던’ 자였습니다. 이 ‘잔멸’이라는 의미는요? 심할 정도로 폭행까지 동원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울인데도 참아주시고, 친히 찾아와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변화시키시고, 구원해 주신 그 현장이 오늘 본문인데, 이 현장으로 우리 함께 들어가고자 합니다. 이 현장을 통하여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냐? ‘사울의 이전 모습’입니다. 1~2절을 볼까요?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아주 생생한 사울의 내면 상태인 “여전히”, 이미 스데반 집사의 순교 현장에 있었던 마음이고, 교회를 핍박하는 앞잡이로 활동했던 이것이, 시간이 지났는데도 변하지 않고, 더 강한 적대심과 결심으로 주의 제자들을 핍박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되어서, 실제로 죽이고자 하는 살벌한 증오심으로 가득하였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위협과 살기로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숨 쉬는 공기처럼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증오로 가득하였습니다. 왜냐? 그의 생각은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여겼기에 그렇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근거가 그의 배경인데, 그는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의 배경에서 자랐어요. 그러다 보니, 율법으로도 흠이 없었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나면서부터 할례받고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집안이었습니다. 다소에서 태어났어요? 헬라의 문화와 철학에 익숙한 ‘엘리트 중 엘리트’이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사용했어요? 마치 우리 자녀들이 미국에서 태어났어도, 한국에 있는 한국 사람보다 한국 문화를 더 잘 알고 있고, 한국말을 아주 잘하는 것과 같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 즉 금수저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 유대교의 석학으로 존경받은 힐렐 학파의 우두머리인 랍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니, 지성인의 자격을 완벽히 갖춘 최고의 엘리트가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당했겠어요?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것에 목숨 걸 정도로 행동을 보인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데반 사건이었고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닌 것들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을 찾아갔던 것도, 유대교에 대한 열심 때문에 대제사장에게 체포 영장까지 받아서 교회 핍박으로 인하여 여러 곳에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까지 갔다는 정보를 듣고요? 예루살렘으로부터 무려 20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으로 갔습니다. 왜냐하면? 옳지 못한 길을 걷고 있는 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하고, “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단들이니까, 내가 바꿔주겠다”라는 자신만만함이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의 죽음도 마땅히 여겼던 것이었어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폭력을 써가며, 옥에 넘겼던 것도 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가 아그립바 왕 앞에 이 고백을 하잖아요? 행 26장 11절입니다.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런데 그런 그를 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찾아오신 예수님’입니다. 3~4절을 볼까요?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스스로 옳다고 확신하며, 교회를 핍박하던 그를 멈추게 하였습니다. 주님이 빛 가운데 찾아오셨어요? 박해했던 그 예수님을 그가 만난 것이고, 주님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그대로 거꾸러집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 그는 훗날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1장 13~15절입니다. 들어보세요?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은, 내가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한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다. 우리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넘치게 부어 주셔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믿음과 사랑을 누리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만한 말씀이다.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그의 과거가 이렇게 “율법에 비추어도 흠이 없을 정도로 살았었고, 이 정도면 예수 믿는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쳤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앞에 서는 순간, 아니 빛이 멈춘 그 길에서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행 26장 14절을 보년 이것에 대한 점 더 구체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들어보세요?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가시 돋친 채찍을 발길로 차면, 너만 아플 뿐이다.” 가시 채는 소나 말을 몰 때 사용하는, 끝이 뾰족한 막대기거든요. 짐승이 제대로 안 가면 이 가시로 찔러요? 찌르니까 짐승이 화가 나거나 반항하면서 뒷다리로 차는데, 이것 때문에, 가시는 더 찔리고 더 아프다는 이야기, 하나님의 뜻에 거슬러 반항하였는데, 손해와 고통은 결국 자기 몫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옥에 넣고,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대적하는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비로소 허상을 붙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울입니다. 5절입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주님의 답이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입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존재가 엄청난 존재임을 느낀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느낀 것이에요? 그리고 그동안 허상을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항복하고 나옵니다. 누구시냐고 묻는 그 질문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라는 답을 듣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습니다. 이미 승천하신 예수님인데,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는 말을 들어요. 왜? 이 말을 들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를 박해한 것이 바로 ‘나를 박해한 것이다.’라는 말씀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성도를 해치는 것은 곧 주님을 해치는 것이 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곧 주님을 높이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억울하게 조롱받습니까? 주님은 “그것은 내가 당하는 고통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번째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울이고 함께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6~7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가라, 그리고 기다려라”라는 말씀을 듣죠? 그런데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가 됩니다. 분명히 주님의 빛과 음성을 체험했지만, 함께 있던 사람들은 부분적인 경험, 즉 소리만 듣고 할 뿐, 실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에게 삶의 전적인 방향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권자이었는데 예수님의 주도권이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강렬한 빛으로 꺾여버려 주님의 말씀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리에 놓이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내로 들어가라, 거기서 들으라”라는 부드러우면서 강력한 초청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지금 모든 답을 주지 않더라도, 한 걸음의 순종 속에서 놀라운 길을 여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는 찾아온 고통입니다. 8~9절을 볼까요?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자신감과 힘으로 가득 차 있던 사람이었고, 스스로 옳다고 믿는 열심으로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다 감옥에 넣으려 다메섹으로 향한 그는, 빛이 멈춘 그 순간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체적 시력을 잃은 것이 아닌 그동안 자신이 보던 세상과 가치관이 무너져 내린 것을 말하고, 그동안은 늘 사람을 끌고 가던 자리에 있었던 그에게서 반대로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는 그 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일 동안 식음을 전폐,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섯 번째는 하늘의 부르심입니다. 이 경험을 좀 더 자세히 소개한 부분이 행 26장 19절입니다. 들어보세요?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환상을 통해서, 소리를 통해서,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자신에게 전달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거스르지 않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인 것을 알았다.”라고 주신 그 사명을 붙들었고,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이미 스데반이 죽어가면서까지 천사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고, 심지어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을 포함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기까지 했던 모습의 근거인 예수님이 ‘아, 이게 진짜구나!’가 되었고, 스데반이 말한 그분, ‘그 예수님이 이분이시구나!’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내용이요 줄거리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그러면 오늘 본문이요?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울이 이렇게 회심하였다는 것만을 알리는 것일까요? “빛을 멈춘 그 길에서”에서, 아니 “빛을 멈춘 그 길”은 결국 그에게 있어서 주권적으로 그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난 길이었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길, 박해의 분노로 가득 찬 그를 직접 찾아오신 그 길이었습니다. 그 빛 앞에서 땅에 엎드려졌던 그 길이었고, 그의 의지와 자랑과 계획이 멈추게 하였던 그 길이었으며, 들은 첫 질문을 들은 길, 즉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질문에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물은 이 질문으로 시작된 은혜와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앞이 안 보여 사람들의 손에 이끌리어 다메섹으로 들어갔던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이 바리새인이, 하나님과 대적하고 있었던 그 길에서 이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그 길을 얻었고, 이전의 삶과 가치관, 목적을 완전히 버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고후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방향 전환이 된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늘 본문은 이렇게 단순히 한 사람의 극적인 회심 기록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사울을 주님이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이 찾아오셨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반역하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더라도, 찾아오셨습니다. 사업이 잘되고 있는데, 너무나 건강하였는데, 길을 멈추게 하였고 빛이 멈추게 하였습니다. 왜요? 사울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중요하다고, 왜냐하면? 내가 너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렇다. 내가 너를 위해 죽었기에 그렇다!!’입니다.
하나님과 막힌 담을 허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고요?, 단순히 입술의 노래만이 아니라, 존재와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되기를 원하셨기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동안 거룩하지 못한 삶에서 이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 그분을 닮도록 부름을 받은 삶을 살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에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성화되어 가는 삶을 위해 그렇게 빛이 멈춘 그 길에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즉 벧전 2장 9~10절을 위해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우연히 신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택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잘나서, 똑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은혜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권세와 중보적 사명을 동시에 가진 사람으로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기를 원하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예배자로 살고, 중보자로 기도하며, 죄와 세상의 어둠에 맞서 왕적인 권세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을 받은 우리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의 목적은 단순히 천국 가는 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고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우리는 거룩한 나라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포하는 삶입니다. 이 정체성을 붙들고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빛이 멈춘 그 길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하는 삶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