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9-7 주일설교
“회심 후 첫 출근길은 어떤 길?”
(사도행전 9장 19 하~31절)
여러분, 여러분은 회사에 취직해서 첫 출근 할 때나 사업을 시작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습니까? 자, 기억을 더듬어 봅시다. 아마도 설레고 기대했을 것이고,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새로운 동료들과는 잘 지낼 수 있을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까, 처음 시작하는 사업인데 잘 될까? 하는 걱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은요? 늘 낯섦과 설렘, 그리고 기대와 두려움이 함께합니다. 아마도 회심 후 사울의 ‘첫 출근길’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어제까지는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의심을 당연하였고, 어떤 이는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걸어갑니다. 왜냐하면 이 길이 바른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이요? 오늘 본문에 담긴 흐름입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살펴본 것이 무엇이에요? 사울이 다메섹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 그 환한 빛에 3일 동안 눈이 안 보였습니다. 그렇죠? 그리고 [아나니아]의 도움으로 눈을 떴고요? 세례도 받았고요? 음식도 먹고 힘을 얻었다고 나눴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어서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교제하였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나님과의 관계도 회복되었고, 몸도 회복되었고, 다마스쿠스에 있는 주의 백성들과 회복되는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9절 하 반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사울이 회심하고 첫 출근을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었다’입니다. 이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말씀을 준비하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먼저는요? 감격과 두려움이 함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까지는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다메섹에 왔던 사울이었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그들과 함께 머물며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제의 동료들은 그를 배신자로 보았을 것이고, 어제의 적들도 여전히 그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안 그러겠어요? 그런데, 감격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자리였다는 것, 혼자가 아닌 이제 ‘새로운 가족’과 함께하는 마음이 들었고, 또한 성령의 담대함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곧장 회당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선포하는 사울입니다.
무엇이에요? 이렇게 사울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즉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당시 크리스천들 사이에서 가장 위험인물은 사울과 함께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며칠을 같이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의 생애에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다메섹으로 피신한 그리스도인들을 다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끌고 가 종교 재판을 통하여 죽이기 위함이었던 그가, [아나니아]의 안수로 사흘 만에 시력이 회복되었잖아요? 그렇죠? 그리고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인생의 방향과 목적이 완전히 새로워져, 이전에 믿었던 것들은, 다 헛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가 사흘 동안 알게 된 것이 무엇이겠어요? ‘단지 유대인들이 못 박아 죽인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었고, 지금도 그분은 살아 계시며 그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라는 것뿐이었지 않았을까?’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 수가 없어요? 이 사흘 동안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이 지내면서 그 역할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솔직히 다메섹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으로 볼 때 사울은, 함께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안 그래요? 얼마나 그가 잔인한 박해자였는지 잘 알고 있는데, 주님을 만난 것과 세례를 받은 그의 회심을 의심하지 않았고,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흘 동안,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어떻게 오셨으며, 어떻게 사셨고, 무엇을 행하셨고,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떻게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 이유와 부활하신 이야기, 또 승천하신 이야기를 그들이 알고 있는 범위에서 가르쳐주었다고 봅니다. 그것을 첫 출근 자리에서 감격 가운데 들었을 사울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죠? 그리고 20절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성령에 충만한 그가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20절을 보면요? 다메섹 형제들에게 들은 것과 회심으로 인하여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였을 것이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이 구절은요? 갈라디아서에 사도 바울이 말한 ‘그 이후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갈 1장 17절입니다. 들어보세요?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러니까 사울은요? 감동의 첫 출근을 한 후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한 것이 아니라,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과 사흘을 보낸 다음, “아라비아”로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가 간 이 아라비아는 어떤 곳일까요? 사우디아라비아일까요? 아닙니다. 다메섹에서 조금 떨어진, 요르단 쪽에 있던 나바테안 왕국입니다. 나바테안 왕국은 어떤 곳인가? 여러분, 혹시 페트라라고 들어보셨나요? 바위에 새겨진 도시죠? 이 나바테안 왕국의 수도가 페트라입니다. 성지 순례 때 가보았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부터 생겨난 아람계 계통의 아라비아 부족 국가입니다.
현재 요르단과 시리아 남부, 그리고 사우디 북서부 지역에 걸쳐 있었던 나라로, 향료 무역, 아라비아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대상로를 장악하여 큰 부를 축적했던 1세기 당시에 강력한 독립 국가였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서 회심 후 전도할 때, “아레타 왕, 나바테안 왕국의 왕이죠, 이 왕의 다메섹 성을 지키는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곳에서 전도와 신학적 사색이 어우러진 시간을 가졌던 것이고, 이스라엘 역사와 율법을 새롭게 재해석하며 복음을 체득하는 시간을 가진 것입니다. 아라비아로 간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갈라디아서 1장 15–19절입니다. 들어보세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아라비아에서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고자, 예수님을 메시아로 새롭게 깨닫는 시간을 가지고자, 율법과 복음을 재해석하기 위해 갔던 것이고, 그런 그가 오늘 본문 22절에 나오는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게 된 배경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이 당혹하였다고 나온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즉 그의 삶의 방향이요? “율법 중심에서 복음 중심으로의 전환”의 시간이 되었고,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모세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했었지만, 이제 예수가 바로 메시아이고, 이 복음을 성경에 근거하여, 즉, 구약 성경에 근거한 재해석의 시간을 가짐으로, 사역을 위한 영적 준비의 기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 기간이 바로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고 있는 3년이었어요. 이 3년 시간을 보낸 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고, 이 3년이 이후에는 바로 로마 세계를 뒤흔드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라비아에서 돌아왔어요? 그런데 그는 집에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 그동안 몰라서 대적했던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자기 민족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기에, 이 진리를 자기만 알고 있을 수가 없었던 사울은요? 나가서 이 진리를 선포하죠?
그리고 이 선포에 다들 깜짝 놀라잖아요? 그 말씀이 20~22절까지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무엇이에요? 이들의 반응이 충격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려던 자가 바로 이 사울이었고, 다마스쿠스에 온 것도 잡아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는 것임을 알고 있었는데, 이제 자기가 박해하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니까, 충격이었던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리고 그들의 입장에는 이제 사울은 배교자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나온 반응이 무엇이에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는 반응, 23절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배교를 했기 때문에 죽이기로 공모하는 것보다는, 어쩌면 사울로 인하여 유대교인들의 마음이, 흔들렸던 사람들이 꽤 있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될 정도면 예수는 진짜네’ 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대안은 없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이 계획이 알려지죠? 24절입니다.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사울을 죽이려는 이 암살 계획이 사울에게 알려졌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져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누군가가 알려줄 수도 있겠죠? 하지만, 핵심은 주님이 드러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울의 거처를 옮깁니다. 옮김으로 이들의 계획을 무산시켜요. 25절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은요? 이 사건을 기억하며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나는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무엇이에요? ‘아레다 왕의 고관이 나를 잡으려고’라고 말하죠?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때 다메섹을 통치하고 있던 나바테안 왕국의 아레다 왕의 병사들을 매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성문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성벽을 타고 내려가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그의 제자들”을 통해, 즉 사울을 따르던, 이 사람들을 하나님은 도구로 사용하셔서 구해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볼 때요? 이것은요? 사도 바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구를 통해서든, 심지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생각지도 못한 방법들을 통해서도, 지켜주시며 인도하시며 역사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피신한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 오겠다고 다마스쿠스로 간 지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도들의 반응이 무엇이에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26절입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사울이 3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간 이유를 말하죠? 그곳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위함이었다고, 하지만 그의 과거 일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두려워하였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그의 말 자체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죠? 아멘. 이때 홀연히 등장하는 한 사람, 누굽니까? 바나바죠? 27절을 볼까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어떻게 사울과 깊은 친분 관계를 맺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요? 사울을 위해 이 멋진 동역자를 예비해 두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15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 때,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 즉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이자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목사인 야고보만 만났고, 다른 사도들을 만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 만나주는 슬픈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담대히 복음을 전파합니다. 28~29절,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년 전에는 이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했던 그가 받아들여져 형제가 되었고, 힘을 얻어 예루살렘을 출입하면서 예수님을 담대히 선포하며 헬라파 유대인들과 대화하며 토론도 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울을 죽이려고 굉장히 힘을 썼다고 하죠? 그것도 열심히, 왜? 이들이 힘을 썼을까요?
그를 당할 수가 없어서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말 그대로 헬라 지역에 나가서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니 헬라 말이 아주 익숙합니다. 사울도 그리스 지역에 속한 다소 출신이니까 헬라어가 익숙하죠? 이 익숙한 헬라어로 변론하며 토론했는데, 그들이 당해내지 못하니까, 그리고 헬라파 유대인들이 흔들리니까 죽이려고 합니다. 스데반과 같은 장면이 생겼죠? 사울은요? 스데반이 변론하던 바로 그 자리에 가서, 자신도 순교하는 마음으로 변론했는데, 주님이 그를 움직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30절입니다.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가이사랴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에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로마 총독이 머무는 곳이에요. 그곳으로 형제들이 사울을 데리고 가 배를 태웁니다. 그리고 사울의 고향인 다소로 보냈다는 말씀입니다.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그의 고향 다소로 보낸 것이에요.
사울은 이렇게요? 보름 만에 꿈을 접고 고향으로 낙향합니다. 그리고 고향, 이 다소에서 13년을 보냅니다. 누구보다 앞길이 창창했던 청년 사울이, 고향에서 무려 13년 동안 침묵하며 지냅니다. 그가 가만히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죠?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요? 자신이 고난을 많이 당했다고, 그 중 40에서 한 대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았다고 언급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일이 바로 이 13년의 기간 동안 일어났던 일입니다. 여러분, 13년은 그의 30대 황금기입니다. 이 황금기에,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꿋꿋하게 나아갔습니다. 주님의 뜻이라 생각했고 순종하며,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이전에 믿고 있던 유대교의 잘못된 사상들을 발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구약에 다 예언된 바로 그분임을 연결하는 신학적 작업을 여기서 하게 됩니다. 그러하였기에 신약성경에서 수많은 사도 바울의 편지들과 로마서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이야기를 써갑니다. 오늘 본문 31절입니다. 같이 읽어봅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30절 끝부분은? “다소로 보내니라”이었지만, “그리하여(그러니까)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갔다고 마무리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먼저 이 모든 일은요? 하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이 역사를 바울은 깨달아 그 유명한 로마서 8장 28절을 선포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약속을 받는 자들이 누가라고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31절에 나오는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입니다. 이 약속을 받는 자들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위로의 역사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그럴 때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 아니에요? 원하기는, 우리 교회에도, ‘그리하여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며 수가 더 많아지는’ 역사,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회심 후 첫 출근이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감동의 첫 출근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까? 혹시 세월이라는 이 시간에 묻혀서 변색이 되지는 않았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주신 말씀은 이 회심 후 첫 출근의 은혜가 계속 이어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