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0장에는 조금 웃프면서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설교가 길어졌습니다. 얼마나 길었는지 밤중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가에 걸터앉아 말씀을 듣다가 그만 깊이 졸았습니다.
결국 3층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교회에 설교가 유난히 긴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주일, 예배가 한참 길어지자, 한 성도가 손목시계를 자꾸 들여다보니까 목사님이 설교 중에
그 모습을 보고 말했습니다.
“집사님, 시계를 봐도 시간이 빨리 가지는 않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이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혹시 멈췄나 확인하는 겁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이 길어지면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허리가 아프고,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머릿속에는 점심 메뉴가 떠오릅니다.
유두고만 졸았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작은 유두고가 한 명씩은 있습니다.
유두고가 어디에 앉아 있었습니까?
창가입니다.
경계선입니다.
한쪽은 말씀의 자리였고, 다른 한쪽은 바깥이었습니다.
몸은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위치는 경계선이었습니다.
바로 그 경계선에서 졸기 시작했고, 결국 떨어졌습니다.
우리도 충분히 경계선에 걸터앉아 있습니다.
유두고가 떨어졌을 때 바울은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을 안았습니다.
우리가 죄에 빠지고, 믿음에서 떨어지고, 인생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예수님도 우리를 향해
하늘에서 꾸짖기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접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올라갈 수 없었기에 주님이 내려오셨습니다.
우리가 죽어 있었기에 생명이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는 “끝”이라고 쓰는데 하나님은 그 밑에 “계속”이라고 쓰십니다.
유두고는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바울은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떡을 떼고 날이 새기까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살려 놓고 집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씀의 자리로 데려갑니다.
회복은 단순히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앞에 앉는 것입니다.
다시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걸터앉지 않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말씀 가까이 앉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는 완벽한 사람 없습니다.
넘어졌을 때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다시 말씀의 자리로 올라오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드로아의 밤은 한 청년이 떨어진 밤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살아난 유두고를 데리고 가며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추락을 공동체의 위로로 바꾸셨습니다.
혹시 지금 떨어진 자리에서 울고 있다면, 하나님은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가능하면 앞쪽에 앉으십시오.
설교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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