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야 미안하다, 지금은 지나가야 한다
(행 20:13~16)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에베소야 미안하다, 지금은 지나가야 한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살아오면서 하루에 가장 많이 걸어본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10km, 아니면 20km입니까? 혹시 군대에서 행군하며 30km 이상을 걸어보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요? 바울이 상당히 먼 거리를 혼자 걸어갑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걸어가요? 그 거리는 대략 20마일, 약 32km 정도였습니다. 당시 바울의 동역자들은 배를 타고 앗소로 향했지만, 바울만은 이상하게도 배를 타지 않았어요. 13절입니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분명하게 걸어서 가기를 원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요? 누가 억지로 걷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배에 자리가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걸어가겠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나눴지만, 바로 전날 밤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드로아에서 밤늦도록 말씀을 전했습니다. 유두고가 삼층에서 떨어지는 사건이 있었고요? 다시 올라가 떡을 떼고 날이 새기까지 오랫동안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습니다.
보통이면 “오늘은 좀 쉬자, 눈 좀 더 붙이고 떠나자”인데,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가지만 바울은 배를 타지 않고, 걸어갑니다. 그것도 약 32km를 걸어갑니다. 이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오늘 본문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받고자 합니다. 본문이 말하고 있는 첫째는 때로는 혼자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에요? 신앙생활에는 함께 걸어야 할 길이 있고, 혼자 걸어야 할 길도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에게는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도 있었고, 디모데도 있었으며, 소바더도 있었고 아리스다고와 세군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길만큼은 바울 혼자 갑니다. 그가 혼자 간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설명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반드시 이것 때문에 걸었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한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22절을 보면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들어보세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이어서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라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에요?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꽃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수받으러 가는 길도 아니고, 성공하러 가는 길도 아니고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32km를 혼자 걷는 동안 바울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생각이 오갔겠습니까? 어쩌면 “주님, 정말 가야 합니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데 그래도 가야 합니까? 여기서 방향을 바꾸면 안 됩니까?”라고 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물었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중에 이 고백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러기에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이어진 긴 길이 바울에게 마음을 정리하는 길이었을 것이고,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으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다시 세웠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명을 아는 사람에게는 방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14–15절을 보면 바울의 여정이 나옵니다. [앗소에서 미둘레네로, 미둘레네에서 기오 앞을 지나, 사모를 거쳐, 마침내 밀레도]에 도착했다고, 누가는 지명을 아주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왜 세밀하게 기록하였을까요?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떠난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바다를 건넜고, 실제로 길을 걸었고, 실제로 피곤함을 견뎠으며, 실제로 위험 속에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에는 방향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16절입니다.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아니하려 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여기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죠? “지체하지 아니하려 하여”와 “급히 감이러라”, 무슨 이야기냐면요? 목적이 분명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곳에 시간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목적지가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에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의 문제인데, 인생의 문제는 시간이 부족한 데 있지 않고, 방향이 없는 데 있습니다.
보세요? 모든 사람에게 하루 24시간이 있습니다. 그죠? 부자도 24시간이 있고, 가난한 사람도 24시간이고, 목사인 저도 24시간이 있고, 여러분도 24시간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요? 24시간을 사용하고도 인생을 남깁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24시간을 사용했는데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점점 나이를 먹어갑니다. 그래서 “내게 얼마나 시간이 남았을까?”라는 질문이 가까이 들립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남은 시간을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 젊을 때는 시간이 무한한 줄 압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아, 시간이 빠르구나.”를 깨닫죠?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세요? 금방 자라 대학교에 다니고 졸업하고 직장에 다닙니다. 우리는 어떻고요? 검은 머리카락이 새치가 생깁니다. 그것만이나요? 부모님이 떠나죠? 친구들의 부고가 들려옵니다. 우리 몸도 전과 같지 않아요? 무엇이에요? 시간은 저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돈은요? 아꼈다가 내일 쓸 수 있지만, 오늘의 한 시간은 아꼈다가 내일 쓸 수 없습니다. 오늘이 지나가면 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시간을 사명에 씁니다. 그래서 방향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사랑해도 지나가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보면요? 바울은 에베소를 지나갑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에베소는 어떤 곳입니까? 3년 가까이 사역했던 곳입니다.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쳤고요? 그래서 복음이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마술하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값비싼 책들을 불태웠던 곳, 아데미 신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도시가 복음 때문에 흔들렸던 곳, 바울의 땀과 눈물이 가장 많이 묻어 있는 도시 가운데 하나가 에베소입니다. 그런데 지나가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요? “에베소야 미안하다. 지금은 지나가야 한다.”입니다. 에베소가 싫어서 지나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오래 머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에베소에 들어가면 보고 싶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바울 선생님!” “사도님!”하고 달려와 안길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함께 울고 싶었을 것이고, 함께 기도하고 싶었을 것이며 지난 이야기를 밤새 나누고 싶었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런데 지나갑니다.
여기에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 좋은 것이라고 항상 붙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것만 버리는 것이 믿음 또한 아닙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좋은 것도 내려놓아야 더 중요한 것을 붙들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에베소는 나쁜 곳이 아닙니다. 바울이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에게는 예루살렘이 더 중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에베소가 있어요? 그죠? 좋았던 시절, 자랑스러운 과거, 정든 자리, 사랑하는 사람, 성공했던 경험, 한때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 받았던 방법 등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제 지나가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과거에 살아요? “옛날에는 말이야.” “그때 우리 교회는 말이야.”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내 사업이 잘됐을 때는 말이야.”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의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일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과거에 은혜 주신 하나님이 오늘도 새로운 길을 여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추억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추억에 붙잡히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네 번째는 바울이 급했던 이유입니다. 바울은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려 했습니다. 본문 자체는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함께 보면요? 바울은 당시 마게도냐와 아가야 여러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절기였기에 복음을 증언하기에도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부르심과 연결된 목적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좋은 소식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갑니다. 왜 급할 정도로 가야 했을까요? 더 중요한 사명, 마게도냐와 아가야 여러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일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여러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정성껏 모은 구제헌금을 가지고 가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5장에서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쁘게 연보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가방에는 단순히 돈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사랑이 들어 있었고, 마게도냐 교회들의 눈물이 들어 있었으며, 고린도 성도들의 정성이 들어 있었고, 이방인 교회와 유대인 교회를 하나로 묶으려는 복음의 마음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제자매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전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오순절은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이는 큰 절기였습니다. 명절이 되면 풍족한 사람에게는 기쁨이 더 커지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가난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남들은 가족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데 먹을 것이 없고, 남들은 감사하며 절기를 지키는데 생활조차 어려운 형제자매들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바울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만 더 빨리 가자. 이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급했던 것입니다. 그의 급함은 조급함이 아니라 사랑의 긴급성이었습니다. 우리는요? 보통 나를 위한 일에는 급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사람의 아픔 때문에 급했습니다. 복음 때문에 급했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 때문에 급했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사명 때문에 급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질문을 하나 던져봅니다. 요즘 우리는 무엇 때문에 급한가요? 바울이 급했던 것은 자기 인생을 챙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손에 맡겨진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위험이 기다려도 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편해야 한다.” “하나님 뜻이면 문이 술술 열려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은 힘든 길이고, 때로 하나님의 뜻은 손해 보는 길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뜻은 눈물 나는 길이며, 때로 하나님의 뜻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편안하냐? 불편하냐가 아니라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가?” 그것입니다. 제가 주보에 칼럼을 썼는데 제목이 과이부정(過而不停) , ‘지나가되 머물지 않는다’입니다. 무엇에는 머물고 무엇에서는 지나가야 합니까? 죄에는 머물지 말아야 하고요? 상처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고요? 과거에도 머물지 말아야 하며, 사람의 평가에도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주님의 뜻과 주의 말씀, 그리고 기도, 복음, 주님께 받은 사명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배 위에서 에베소 해안을 바라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멀리 익숙한 산과 도시가 보입니다. 그곳에는 보고 싶은 얼굴들이 있습니다. 같이 울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같이 기도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한번 들렀다 갈까?” “하루만 있다 갈까?” “사람들 얼굴만 보고 갈까?” 그러나 바울은 지나갑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을지 모릅니다. “에베소야, 미안하다. 지금은 지나가야 한다.” 왜입니까? 사랑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많은 것을 지나가야 합니다. 젊음도 지나갑니다. 직장도 지나갑니다. 사업도 지나갑니다. 건강도 지나갑니다. 사람도 지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세상 자체를 지나갑니다. 그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주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었느냐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여러분에게도 달려갈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나이가 들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은퇴했다고 사명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나님이 쓰실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숨 쉬고 있다면 아직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며 여러분의 자녀에게 믿음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손주에게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고, 낙심한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으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지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여기까지다.”라고 하시면 지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놓아라.”라고 하시면 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시 가라.”라고 하시면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이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중간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길을 걸었습니다. 사랑했던 에베소도 지나왔고, 두려웠던 예루살렘도 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께 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오늘도 지나가되 멈추지 않고, 주님이 부르시는 그곳까지 끝까지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오늘까지 걸어오게 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나가야 할 곳에 머물러 있었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지나간 상처에 머물고, 지나간 성공에 머물고, 사람의 인정과 세상의 편안함에 붙잡혀 주님이 부르시는 길을 외면했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바울처럼 홀로 주님 앞에 서는 시간을 갖게 하시고, 말씀과 기도 가운데 우리의 길을 다시 분명히 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게 하옵소서. 썩어 없어질 것보다 영원한 것을 붙들게 하시고, 나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기쁨을, 나의 유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나의 성공보다 복음의 영광을 먼저 구하게 하옵소서. 지나가야 할 에베소를 지나갈 용기를 주시고,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 할지라도 주님이 보내시는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갈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붙들고 충성하게 하시며, 마침내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