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마지막 부탁은 ‘잘 되라’가 아니라 ‘잘 지켜라’였습니다”
(행 20:28~38절)
여러분, 사람이요? 먼 길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부모님은 자녀에게 전화하면서, “공부 열심히 해라, 돈 아껴 써라, 운전 조심해라.”라고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밥은 먹었니?”라고 이 한마디를 꼭 덧붙입니다. 이미 밥을 먹었다고 세 번이나 말했는데도, 또 물어요? 이유는 부모님의 관심이 성공보다 자녀의 생명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고 있어요?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다시는 이들의 얼굴을 보지 못할 상황에서, “교회를 크게 만들어라, 사람을 많이 모아라,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모두 잘되고 성공해라.”가 아닌, 오히려 “삼가라, 양 떼를 보살피라, 깨어 있으라, 약한 사람을 기억하라.”라고, “잘 되려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잘 지켜라.”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하였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른 것이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28절을 볼까요?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양 떼를 잘 살피라”가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먼저 자신이 잘 살펴야 그다음이 양 떼이기에 그렇습니다. 즉 영혼이 메마르면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도요? 시편 139편 23절에서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라고 먼저 자신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에요? 이것을 “삼가라”한 번만이 아니라 계속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왜? 해야 할까요? 그 이유가 바로 두 번째, 피 값으로 사신 교회를 지켜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28절을 다시 보면요?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라고, 교회가 얼마나 귀한 공동체인지를 세 가지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의 첫째가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요? “내 교회”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왜요?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두 번째로, 교회는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치가 건물의 크기나, 교인의 숫자나 재정의 규모가 아니라 지불 하신 값,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사셨기에, 우리의 공로로 교회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한 몸이 된 것이고,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도,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랑하신 사람을 나도 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성령께서 그들을 에베소 교회의 감독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에베소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졌어요? 그죠? 3년 동안 교회를 돌보았는데, 복음을 가르쳤고, 세례를 베풀었고, 장로들도 세웠고, 자기 이름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들을 에베소 교회의 감독자로 삼으셨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감독자’라는 의미는요?, 헬라어로 ‘에피스코포스’인데, ‘관리자’, ‘보호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감독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는 일”을 위해 관리하고 보호하도록 장로들을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큰 세 번째로 바울은 이어서 사나운 이리와 왜곡된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지켜야 한다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29~30절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바울은 두 종류의 위험이 찾아온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밖에서 들어오는 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일어나는 위험인데, 밖에서 들어오는 위험은 “사나운 이리”입니다. 이것은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신이 에베소를 떠나면, 이단이나 거짓 선지자들이 에베소를 찾아와 성도들을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막을 역할을 ‘에베소의 이 장로들’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여러분은 삼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안에서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인들을 미혹하여 자기 유익을 꾀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어그러지다’라는 의미는요? 진리를 살짝 틀어서 왜곡시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에베소 교회의 장로 중에 나올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에베소 장로들은 굉장히 당혹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중 어느 누구도 그렇게 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영적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요? 에베소 교회가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쳤어요?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두면서 이렇게 부탁합니다. 디모데전서 1:3~4절인데, 들어보세요?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다른 교훈을 가르쳤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했고, 자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했다고 하죠? 여러분, 이들은 처음부터 교회 밖에 있던 이교도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리를 차지하려 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디모데전서 1장 20절에는 구체적인 이름까지 밝힙니다.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한때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지만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 파선한” 사람들이 되었다고, 후메내오는 나중에 빌레도와 함께 장차 있을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고 “부활은 이미 지나갔다”라고 가르칩니다. 디모데후서 2장 18절입니다.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그래서 바울이 말한 “사나운 이리가 들어와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한다”라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요? 여러분, 놀랍게도 에베소교회는 거짓 교사를 분별했습니다. 수십 년 뒤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지 아세요? 요한계시록 2장 2절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거짓 교사들을 분별하고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할 만큼 교리적으로 단단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조심하라”는 말보다 먼저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삼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도 망치고 주님이 맡겨주신 양 떼도 망치기에 그렇습니다. 네 번째는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31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워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그 근거가 바로 눈물입니다. 삼 년 동안 밤낮으로 가르쳤다, 차갑게 정답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에요? 진리는 눈물 없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말로 이기면 사람이 멀어질 수 있지만, 눈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만지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요? 에베소에 머무는 3년 동안 에베소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권면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섯 번째는 하나님과 은혜의 말씀에 맡겨야 한다고 부탁합니다. 32절,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은요? 에베소 교회를 더 이상 직접 돌볼 수 없어서 교회를 맡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요?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맡긴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여러분, 3년 동안 에베소에서 전한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을 비롯한 수 많은 사람들이요? 이 은혜를 깨달았고, 감격하였고 감사하였으며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말씀이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있게 전해지려면 전해진 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서 보여 준 모범을 거론해요? 33절,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자비량으로 돈 벌어가면서 목회하고,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천막 제조하고 판매하고, 전도에 필요한 경비를 직접 충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아니라 34절,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자신의 필요한 경비와 동행자들의 경비까지 다 부담했다, 이 사실을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라고 언급합니다. 이것을 에베소의 장로들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5절,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라고, 맡겨진 것을 지키는 사람은 약한 사람을 돌본다고, 복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채우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왔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진짜 일입니다.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고, 우는 사람 곁에 앉아 주며,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함께 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 사랑의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여섯 번째는 작별 인사입니다. 36절,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고별의 말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모인 사람들과 기도하죠? 무릎을 꿇고,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이 교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믿음의 모본이 되어 주기를 원하는 기도를 하였을 것이고, 에베소의 장로 들은 바울의 앞길에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기를, 그의 앞에 기다리는 고난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 37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울부짖고 크게 눈물을 흘리면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차례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함께 울었고, 엉엉 울면서 몇 번씩이나 계속 서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왜요? 찬송가 220장 사랑하는 주님 예수 3절 가사처럼,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으로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이 결심이 가득했기에 그렇습니다. 무릎으로 끝났고, 기도로 끝났으며, 눈물로 끝났고, 포옹으로 끝났습니다.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크게 울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기억이 크게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바울처럼 이런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즉 여러분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에서요? “저는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해 주신 당신을 기억합니다, 내가 넘어졌을 때 손을 잡아 주셨고, 모두가 나를 포기했을 때 당신은 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생각납니다.” 이것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38절,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로 말미암아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깊은 슬픔에 빠져들다’, 왜? 깊은 슬픔에 빠졌을까요?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이미 25절에서 이야기했듯이, 바울과 헤어짐이 이 세상에서는 이제 다시 보지 못하니까 슬픔을 안고 항구로 같이 나갔을 것이고, 바울이 배에 오르기까지 전송하며 영원한 작별이 정말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바울이 탄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배 위의 바울도, 항구에 서서 전송하던 에베소 교회 장로들도, 서로 바라보고 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또 하고,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까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배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 바라보면서 찬 222장 가사처럼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그랬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 후 이 밀레도로 부터 30마일 떨어진 에베소로 돌아가는 동안, 아니 평생을 바울이 했던 유언은 그들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요? 오늘 본문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할게요? 여러분, 이 바울의 유언이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까지 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바울은 말씀을 전한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압니다.”라 했고, 31절에도,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것을요? 에베소 장로들이 다 보고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아세요?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하며 유언을 남기는 일은요?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가족과 성도들, 평생 사랑했던 사람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망률은 100%이기에, 조사할 필요도 없는 통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자도 가고요? 가난한 사람도 가고, 유명한 사람도 가고, 이름 없이 살던 사람도 갑니다. 먼저 가냐? 나중에 가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마지막 말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요? “내가 그 맛있는 음식을 한 번 더 먹어 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미감에서 식사하는 것이 소원이다”가 아니라, “나에게 못되게 굴었던 그 사람에게 할 말을, 다 하지 못해서 원통하다”가 아니라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았던 믿음과 사랑의 말이기를 소원합니다. 즉 “얘들아, 나는 예수님 때문에 참 행복했다? 살아 보니 돈보다 믿음이 더 귀하니 서로 미워하지 말고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라, 힘든 일이 생겨도 교회와 예배를 떠나지 마라, 나는 먼저 간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이것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피로 사신 교회를 사랑하며, 진리를 굳게 붙들되 사람을 향한 눈물을 잃지 않게 하옵시고 우리의 자녀와 가정, 사랑하는 성도들을 주님과 그 은혜의 말씀에 맡깁니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주님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언젠가 서로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게 될 것을 기억하며 오늘 사랑하고, 오늘 용서하고, 오늘 함께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