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말라는데 바울은 왜 갔을까?”
(사도행전 21장 1~6절)
여러분, 내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다 보면 가끔 이런 일을 만납니다. 내비게이션은 “직진하십시오”라고 하는데 옆에 앉은 사람은 “아니야, 여기서 돌아가야 해!”라고 말합니다. 운전자는 순간 혼란스러워집니다. “직진해야 하나? 돌아가야 하나? 도대체 누구 말을 들어야 하나?” 오늘 본문이 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말하는데,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놓고 볼 때, 성령님은 바울에게 가라고 하신 것인가? 가지 말라고 하신 것인가? 성령의 말씀을 거역하면서까지 예루살렘으로 간 것인가? 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은 바울의 여행 경로를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사명을 따라가는 사람의 결단, 사랑하기에 붙잡는 성도들의 눈물, 그리고 믿음의 유산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아름다운 가정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고난이 없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있음을 알고도 하나님이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어가는 말씀이 오늘 본문인데 이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아름다운 곳보다 사명을 바라본 바울입니다. 1절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 배를 타고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다라로 가서” 바울 일행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눈물로 작별한 뒤, 배를 타고 고스와 로도와 바다라를 거쳐 갑니다. 특히 누가는 “우리가 그들을 작별하고”라고 기록하였는데, 이것은요? 서로 떨어지기 어려울 만큼 깊이 사랑했지만, 결국 헤어져야 했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먼저 ‘고스’에 갔습니다. ‘고스’는 고대 의학과 문화로 유명한 섬입니다. 그리고 ‘로도’로 갔는데 이곳은 무역과 교육의 중심지로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였던 거대한 로도스의 청동상이 있는 곳입니다. 아쉽게도 이 청동상은 바울 시대보다 훨씬 전인 주전 226년경 지진으로 무너졌어요? 하지만 로도스는 여전히 화려하고 이름난 도시였고, 이 도시들을 그냥 지나갑니다. 머물면서 전도하고 구경해도 되는데, 예루살렘을 향한 사명 때문에 지나갑니다. 좋은 것을 몰라서 지나친 것이 아니라 더 귀한 것 때문에 지나간 것입니다.
바다라에서 베니게로 가는 배를 발견하고 갈아탔다고 합니다. 2절,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무슨 이야기냐? 지중해를 건너는 상선을 탔다는 것입니다. 그 배를 타고 가는데, 3절에 보니까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항해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의 짐을 풀려 함이러라.”라고, 구브로를 왼편에 두고 항해하여 두로에 도착했다고 하였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구브로가 한눈에, 즉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죠? 누가는 이 사실을 그대로 적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이 구브로는 바나바의 고향이면서,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선교 여행을 시작했던 곳이었다고,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말씀을 전했고, 섬을 가로질러 바보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복음을 방해하는 엘루마와 맞섰고, 총독 서기오 바울이 주의 가르침을 듣고 믿었던 그곳, 이 그곳을 왼편에 두고 지나갔다, 한때 바나바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일하심을 보았던 곳을 지나갔다는 것이고, 예루살렘을 향해 갔다는 것이고, 맡기신 길을 걷는 것이 사명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고난을 피하는 것보다 사명 완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두로에 도착한 후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두로는 바울의 고향이나 바울이 세운 교회가 있는 곳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항해 중 배가 화물을 내리기 위해 정박한 항구가 두로였습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제자들을 일부러 찾아가 칠 일 동안 함께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장 19절에 보면 이 두로의 제자들은 스데반의 순교 뒤 흩어진 성도들이 베니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15장 3절에 나오듯이 바울도 이전에 베니게 지역을 지나며 형제들에게 이방인의 회심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두로는 베니게의 도시입니다. 바울이 그때 두로 교회를 방문했는지, 그 제자들을 이전부터 알았는지, 누가 그 교회를 세웠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지만, 두로와 바울의 확실한 관계는 복음 안에서 만난 형제자매의 관계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4절에 나오듯이 두로의 제자들이요? 성령의 감동을 받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요? 성령 하나님이 가르쳐준 것이에요? 바울에게 닥칠 고난을 알게 되었고, 그를 사랑했기 때문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울도 이미 성령께서 각 성에서 결박과 환난을 예고하셨고, 두로의 제자들도 만류했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가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령께서 고난을 알려 주실 때, 그것이 언제나 돌아서라는 뜻이라, 때로는 앞으로 걸어갈 길을 기도로 준비하라는 것이고, 위험을 알면서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더 귀히 여기며 간 바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의 사랑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계속 이야기를 하였지만, 예루살렘에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경고를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끝까지 감당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경고를 금지로 이해하지 않았고, 성령께서 고난을 알려 주어 앞으로 당할 일을 미리 알고 준비하게 하셨다는 것, “어떻게 하면 고난을 피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께 받은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였음을 누가가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기도로 보내 준다는 사실입니다. 5절입니다. “이 여러 날을 지낸 후 우리가 떠나갈새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이레, 일주일이 지나 떠나는데, 그때 두로의 제자들은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성 밖 항구까지 따라 나왔어요? 바울을 말리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보내 줍니다. 그리고 그 길을 기도로 축복합니다. 5절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을 축복하며 기도로 보내 주고 있어요? 제자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나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까지 함께 해변으로 나와, 바울 일행과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과 바울의 앞길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함께 있었겠죠? 염려를 숨기지 않았고, 바울이 가야 한다고 믿는 길을 끝까지 막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이에요? 충분히 마음을 전한 뒤에도 상대가 하나님 앞에서 그 길을 가기로 했다면, 붙잡던 손이, 기도하는 손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처럼 보여요. 그죠? 우리가 대신 걸어 줄 수 없는 길입니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작아 보일지라도, 함께 무릎 꿇는 일이고, 이것은요?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해변에서는 손을 놓았지만, 기도 속에서는 그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가족 모두가 “그들이 다 그 처자와 함께”, 남자 성도들만 나온 것이 아니라 아내와 자녀들이 함께 나왔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을 보내는 이 일은 몇 사람만의 일이 아니었기에 그렇습니다. 아내도, 자녀도 바닷가까지 함께 걸어 나와 바울이 가는 길을 여전히 걱정했기에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말렸는데도 가는 바울에 대하여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자녀들을 들었지 않았을까요? 떠나는 형제를 혼자 보내지 않고, 끝까지 따라가 함께 무릎 꿇었으며 마지막까지 기도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드는 생각은 그날 아이들이 이 바닷가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사도 바울을 보았을 것이고요? 그를 사랑하여 눈물 흘리는 부모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며, 성도들이 사람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지 않았을까? 안 그래요? 그래서 바닷가에 무릎 꿇은 부모의 이 모습이 그들에게 오래 기억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원하기는 우리도 자녀에게 남겨야 할 가장 귀한 유산이? “우리 부모님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셨고, 기도하는 부모였고, 우리 부모님은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셨다.”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네 번째로 이제 헤어짐입니다. 6절입니다.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니라.” 자, 오늘 본문은요? 담담하게 기록하면서 마칩니다. “우리는 배에 오르고 그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바울 일행은 사명을 따라 배에 올라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두로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살아야 할 일상의 자리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록한 누가는 어떤 마음으로 남겼을까요? 바울만 사명 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떠나는 사람에게는 떠나는 사명이 있고, 남아 있는 사람에게는 돌아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선교지로 떠나죠? 반면에 어떤 사람은 가정으로 돌아갑니다. 즉 장소는 달라도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모두 사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요 두로에서, 이레, 즉 일주일을 보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죠? 그런데 온 교회가 가족들과 함께 항구까지 나와 배웅합니다. 여러분, 사람의 가치는요? 얼마나 오래 만났는가로만 결정이 되지 않아요? 만나는 동안 무엇을 남겼는가로 결정됩니다. 바울이 복음과 믿음과 사랑을 남겼듯이 우리도 우리의 발자국이 사라진 자리에 복음의 향기가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두로의 성도들은 바울에게 분명하게 “가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배에 올랐습니다. 고난을 몰랐기 때문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그들의 사랑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에게 있는 주님께 받은 사명, 이 사명이 있었기에 배에 올랐습니다. 바울이 탄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났을 것이고, 두로의 성도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날 아이들의 마음에는 어떤 그림이 새겨졌을까요? 아마도 이 한 장의 이 그림이 아닐까요? “바울 사도님은 고난을 알면서도 주님을 위해 가셨다.” “우리 부모님은 저분을 위해 바닷가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셨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저렇게 사는 것이구나.” 여러분, 우리도요?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마지막 모습을 남깁니다. 그때 자녀와 성도들의 마음에 귀한 고백, “우리 부모님은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셨다, 어려워도 예배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고난 앞에서도 사명을 버리지 않으셨다, 나도 우리 부모의 삶을 보며 예수님을 믿고 싶다.”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바울처럼 고난이 있음을 알고도 주님께서 부르신 길을 걸어갈 믿음을 주시고, 세상의 아름다움과 편안함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과 행동과 기도가 자녀들의 마음에 믿음의 장면으로 남게 하시며, 재산보다 믿음을, 성공보다 예수님의 향기를 물려주는 부모가 되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뜻대로 붙들려고 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며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우리보다 먼저 십자가의 길을 걸으시고 끝까지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도 맡겨진 사명의 길을 충성스럽게 완주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