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쫓으라”(마 9:9-13)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희망은 풍요함입니다. 요한은 풍요를 ‘페리소스’라는 단어로 전했는데, 의미는 ‘남아돌다, 넘쳐나다’입니다. 그러니까 풍성한 삶은 ‘영원할 뿐만 아니라 차고 넘치도록 풍족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풍성한 삶의 요건은 그동안 우리가 가졌었던 옛 이전의 생활방식과 선택방식, 행동방식을 주님이 이끄시는 삶으로 바꿀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다른 말로 결단인데, 여러분, 결단은 일시적이 아닌 평생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요구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공급되는 선물이고 출발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풍성한 삶을 위해 한 사람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한사람이 마태요, 직업은 세리입니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른 것은 베드로 형제 및 야고보 형제를 부른 일에 이어 두 번째로 부르신 것으로 베드로와 야고보를 바닷가에 나가셔서 부르신 다음 다시 같은 바닷가에 나가셔서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마태를 부른 곳은 가버나움인데, 이곳은 다메섹에서 지중 해안을 거쳐 애급에 이르는 대로에 위치한 곳이고, 잡은 생선을 검사한 후 세금을 부과한 곳입니다. 그러니까 바닷가 근처에서 통행세를 받는 곳일 수 있고 고기에다 세금을 매겼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마태를 부르셨습니다. 당시 세리라는 평은 악평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을 등에 없고 많은 부패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랬고 이 일을 하는 사람치고 정직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당시 세리였습니다. 로마는 유대인의 과수와 우물, 토지 및 가축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였고 이 세금 징수를 세리들이 담당하면서 내는 세금에 더 징수하는 방식으로 그것도 강압적이고 과중한 세금을 매겨 강한 반발을 샀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이 마태이고 마태복음을 기록한 자이고, 마가는 그를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누가는 단지 그를 레위라 불렀는데, 아마도 원래 이름이 레위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그를 부르셨을 때,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별명을 붙여 주신 것처럼 그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확실하게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의 아들이었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이었는데, 그가 가판에 앉아 세금을 걷는 사람이 되었고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원래 이 직업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너무나 가난하여 이 직업을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세금을 매기고 그 가운데 자기 이익도 챙겨야 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나를 쫓으라”고 그를 부르십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영적침체에서 벗어나라입니다. 무엇이에요? 어쩌면 제국의 권력을 등에 업고 유대인들의 돈을 뜯어내고 있지만 그의 마음 에 있는 공허는 그냥 덮어버림이 되었을 것이고 레위인이기에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해야 할 그였지만 동포들의 납세액을 부풀어 뻔 한 거짓말로 내 후리치는 사람이 되고 말아 탁자에 앉아 돈을 거두는 그런 이름이 아닌 그가 그곳을 털고 일어나라는 의미입니다. 즉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영적침체가 무엇입니까? 일반적인 형태는 신앙의 무기력감 아닙니까? 말씀을 읽어도 감동이 없고, 기도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 신앙의 모든 행위들이 무의미해지고 예배에 집중할 수 없게 되다보니 모든 것이 형식으로 흐르고 그 의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마음이 지쳐버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영적침체입니다.

 

어쩌면 마태도 신앙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 신앙을 포기하였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흔들렸을 것이고 부정적인 사고가 자리 잡아 쉽게 낙심하고 낙담하는 삶을 가졌을 것입니다. 역대하 28장 23-25절을 보면 아하스 때에 이스라엘에 찾아온 영적 침체로 에돔과 블레셋의 공격이 있었고 결국 성읍들이 다 침노를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극한 어려움이 찾아 왔다면 당연히 하나님 앞에 나와 도움을 구해야 하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찾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를 친 이방인의 신, 다메섹 신들에게 나가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 대신 이반신의 도움 받기 위해 여호와의 문을 닫은 채 엉뚱한 행동을 한 것인데, 어떻게 했냐면 예루살렘 구석구석마다 이방신을 섬기는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결과가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하고 말았는데, 원인이 바로 영적 침체입니다. 이 때 한 왕인 히스기야가 제일 먼저 이 영적 침체에서 일어서기 위해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였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니 회복함이 찾아왔고 하나님의 축복이 다시 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침체에 빠져 있는 이 레위를 주님이 찾아오셨고 나를 쫓으라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레위를 어떻게 아시고 부르셨을까요?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주님이 레위의 징세 탁자 옆을 지나시다가 그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주님은 그를 창세전부터 아신 것 아닙니까? 때가 되어 그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가 그렇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된 이 사실을 가슴에 꼭 붙잡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부름을 받은 사실 앞에 이렇게 축복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민 6;24-27절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민 6:24-27) 이 축복을 이번 한 주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로 즉각적 순종하라입니다. 보세요, “나를 좇으라”하신 주님의 말씀에 마태는 일어나 즉시 좇았고 순종을 거절하거나 미루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분, 거룩한 은혜의 능력은 즉시 응답으로 이끌고 모든 반대를 물리친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가 예수님을 쫓음으로 앞으로 더 가질 지위와, 돈에 대한 생각, 어쩌면 국세청장이 되는 승진에 대한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는 세를 걷는 좌판에 앉지도 않아도 됩니다. 그가 주님의 “나를 좇으라”하신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그곳으로 갔다는 내용을 성경 어느 곳을 뒤져봐도 볼 수 없게 하였습니다. 무엇이에요? 은혜를 받은 순종에는 타협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은 순종은 결과를 따지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뒷일을 다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 예수님이 마태를 부르신 사건은 그 당시 모두를 충격으로 빠지게 하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창녀만큼 다 싫어하는 세리를 예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고 이 부름의 당사자인 세리 레위도 즉시 가판 문을 닫고 예수님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마 9:9) 이 말씀처럼 그의 즉각적인 순종은 그 이후 다시 과거 자신이 누렸던 그 문을 열지 않는 다짐이 되어 문도 열지 않는 순종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가 어떻게 합니까? 자신을 죄에서 돌이킨 기념으로 성대한 파티를 열었고 예수님도 지금 세리와 죄인들과 교제하고 계신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마 9:10)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 잔치에 참석했으니 큰 잔치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이들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레위 그가 옛 친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소개한 것이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한 것입니다. 무엇이에요? 자신이 구원받음에 감사하는 파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주님께로 인도되었던 것처럼 친구들 또한 주님께로 인도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고난과 비난이 함께 해도 감사가 우선이다입니다. 여러분, 이 잔치에는 세리들과 예수님의 제자들만 있지는 않았고 그래도 로마 권력자들과 알고 지내는 모든 이들도 왔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 지역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이 끼여 있어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불편한 사들도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즉 사회의 음지의 사람들인 세리들과 창녀들과 다른 죄인들이 이 친구의 결정을 축하하려 하자 곁눈질하며 수군거리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11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마 9:11) 무슨 이야기에요? 마태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행동을 트집 잡았고 비난한 것입니다.

 

사실 종교는 언제나 왕들과 정부들이 이용하는 단골 도구입니다. 이 이야기는 통제할 백성들의 믿음을 구체화한 유형적 기관과 누가 우리 편이 될 수 있고 누가 반대편으로 남아야 할지를 결정할 권위만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자신의 영적 운명이 당신의 손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무엇이나 믿고 거의 무엇이나 원하고 거의 무엇이나 행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종교라고 신념’한다고 했습니다. 1세기 이스라엘에 이스라엘을 종교적으로 통제하려고 다툰 주요 집단이 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생하기도 하고 어쩌면 애증의 관계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누구냐면 사두개인이고 바리새인입니다. 사두개인은 귀족층입니다. 그러니까 권력의 공직을 점령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의 가장 유형적 기관인 웅장한 헤롯 성전에 대한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로마에 드러내놓고 부역했고 조국의 해방을 갈망하는 유대인들에게는 돼지로 여김을 받았습니다.

 

다른 하나가 바로 민족주의가 아주 강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눈에 띄는 유대인 행세를 하였고 유대인 대중에 대한 통제권을 고수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유대인이 되는 기준으로 삼아 어떤 대가도 마다 않고 도덕 분야에서 왕이 될 사람들이 바로 이 부류입니다. 특히 죄를 피하는 데 아주 엄격하여, 경건의 모양을 갖추는 데 있어서 그들보다 더한 열심당원들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경건의 능력에 대해서 그들보다 더 큰 적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에게 트집 잡을 만한 것도 정면으로 그리스도를 트집 잡을 용기도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제자들과 다투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보다 인간의 관습을 더 우선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불평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신다’입니다. 행악 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그들의 기준인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기에 그래서 그들은 제자들에게 이 점을 들어 그리스도를 비난하였고 어쩌면 예수에게서 제자들을 꾀어내려고 세리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에 어긋난다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그리스도께 화를 내었습니다. 그 첫째가 예수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기를 원했던 것이고 둘째가 세리와 죄인들에게 어떤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호의를 시기하였습니다. 이무엇을 보게 됩니까? 모든 규정의 기초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있었지만 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그것을 비틀고 부풀렸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것을 무기삼아 선량한 유대인들을 영적으로 사기 꺾었고 더 이상의 요구들에 부합할 재간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네 번째로 진정한 쉼을 가져라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레위를 부르신 예수님 초대의 제시된 내용이 바로 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쉼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헬라어에서 이 의미는 “멈추게 하다. 무엇을 끝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안식일이라는 히브리어 동사와 아주 유사한 단어가 쉼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멍에는 나무로 깎아 만든 막대기인데 짐승 한 쌍의 어께에 메워 쟁기나 다른 농기구를 나란히 끌게 하는 도구로 예속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가까운 동맹이나 연합을 상징하기도 하였고 나중에 도덕적 전체의 멍에로 나타는데, 주님은 마 11:28-30절에 말씀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께 예속된 상태를 가져라’는 말씀이고 진정한 쉼을 주시는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마태가 이 사실을 잘 이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 특별한 토대를 기록한 사람이 마태뿐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멍에, 특히 창녀들과 세리들, 스트립 쇼하는 여자들과 마약 밀매 자들, 경멸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지고 사는 무거운 짐을 기억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처절한 밑바닥 인생들이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는 사람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이것을 부술 수 있는 은혜가 찾아온 것이고 그것이 ‘나를 쫓으라’ 아닙니까? 입니다. 여러분, 은혜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기 원하는 훌륭한 성품 거의 모두가 은혜에 들어 있습니다. 은혜는 겸손한 사람이 수치당한 사람에게 건네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죄가 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일부러 그 너머를 봅니다. 은혜는 아무리 딱딱하더라도 세상과 분리된 것이라 해도 따뜻한 자비의 선물이 바로 은혜라는 이야기입니다.

 

막힘없이 베풀어지는 넘쳐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인데, 마태에게 ‘나를 쫓으라’ 하심은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은혜였던 것입니다. 가장 볼품없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자기 의에 빠진 자들을 밀어내는 사건이고 이것을 위해 주님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은 변호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12, 13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2-13) 무엇이에요? 세리와 죄인들과의 교제의 정당성을 주장하셨고 자신과 제자들을 변호하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큰 소리로 그리스도의 도움을 청한 세리들의 궁핍과 위급한 사정, 어쩔 줄 모르는 불쌍한 죄인들의 심한 궁핍은 그리스도로 하여금 순전한 영역인 하늘로부터 이 더러운 곳으로 내려오시게끔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솔직히 세리였던 레위 마태는 병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치료하고 도울 사람을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에게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솔직히 영혼의 병입니다. 죄는 사람을 불구로 만들며 약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황폐케 하고 죽이는 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혼의 위대한 의사라는 사실, 죄로 병든 영혼들은 바로 참 의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건강하고 온전하다고 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레위는 예수님이 제자로 두기 원하시는 바로 그런 죄인입니다. 죄라는 죽을병에 걸린 자였고 그것을 치유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인정할 만큼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주님이 우리를 찾으십니다. “나를 쫓으라”고, 여기에 어떻게 행동을 옮기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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