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여러분이나 저나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이라는 의미이고, 그리스도께 속한 자, 그리스도를 닮은 자라는 뜻이면서 한때에는 조롱의 의미, 비꼬는 의미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에게 신문을 받을 때, 이 신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니까 바울의 행동에 대해 그가 깜짝 놀라면서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바울을 책망하는데, 그 만큼 그 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로 여겼던 시대였고, 예수 믿는 자들을 외면하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이 부끄러운 별명을 빛나고 존귀한 이름이 되도록 하였다고 소개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인지 여기에 담긴 내용들을 나누면서 오늘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본문은 고통과 역경 속에서도 복음이 멈춘 것이 아니라 확산이 되고 있음을 보이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행 11:19) 여기 ‘스데반의 일’이란 스데반의 순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의 순교로 인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환란이 찾아왔습니다. 이 환란으로 인하여 주의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들이 환난으로 인하여 흩어졌지만 피한 그곳인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가서도 복음 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아닌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는 지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고, 고넬료의 사건이 주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다고 꺼내고 있습니다.

 

고넬료의 사건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단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요 온 이방인의 하나님이고, 온 열방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이들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허락이 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행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방인인 헬라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몇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행 11:20) 전통과 편견이 아직까지 자리 잡고 있어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지만 몇몇 흩어진 성도들은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그 전도자들이 바로 스데반의 순교 당시 예루살렘에 있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라는 암시와 함께 그들이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사람들이고, 지금의 리비아출신의 소수이며, 선교의 지경을 넓히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해하여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는데, 21절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21) 주님의 손이 누구와 함께요? 이방인인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그들과 함께 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왔다는 이야기, 교회가 탄생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탄생된 이 안디옥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나 이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까지 전해졌고, 이방인들 사이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 앞에서 예루살렘교회가 가장 덕망이 있는 평신도 지도자를 선택하여 이 안디옥교회로 파송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22-23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행 11:22-23)

 

파송을 받은 자가 바로 바나바라고 말하고 있는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엄청난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이 안디옥교회에 내로라하는 사도들이 많은데 왜? 사도가 아닌 평신도를 보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베드로를 다시 보낼 수도 있고, 아니면 요한을 보낼 수도 있는데, 굳이 사도도 아닌 평신도를 보냈냐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묵상가운데 드는 생각은 어쩌면 사도들을 보내지 못할 만큼 부담이 예루살렘 교회에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부담은 헬라어를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할 줄 아는 자가 예루살렘 교회에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니까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나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훌륭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보내는 것이 예루살렘 교회에 부담이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바나바가 선택되었고, 요 17:18절의 말씀인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요 17:18)가 되어 그가 파송 받았으며, Webster 사전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특별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권위를 부여하여 보내는 것”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파송 받은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해 보니 정말 소문대로 헬라인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난 것을 목격하였고, 이로 인하여 기뻐하면서 ‘안디옥의 모든 사람들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머물도록 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가는 왜? 바나바가 적임자인지를 다시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24절입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행 11:24)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그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착하다’라는 의미는 ‘매력 없고 바보 같고 순진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훌륭하다는 말이고, 기본이 잘 되어있다는 말이며, 선행을 많이 베푼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있는 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였다고 합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능력과 감동이 그의 사역 가운데 나타났다는 의미이고 그 결과가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즉 믿음의 본을 보이니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그를 보면서 감명과 신앙이 더욱 견고하여졌고, 또 새로운 신자들이 더욱 많아져 아름답게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본질은 성령 안에서 기쁨과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고, 믿음은 저주에서 축복으로 옮기기 때문이며 죄인이었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변화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원하기는 여러분에게도 이 영적인 리더십이 가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렇게 안디옥 교회가 크게 성장하니 바나바는 자기 혼자 이 사역을 감당하기가 벅찼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사도들에게 협력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사울을 안디옥 교회로 부르게 됩니다. 25-26절이에요.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 11:25-26) 그러니까 절대로 혼자 일하지 않은 바나바이고 상대를 세워주며 같이 일을 한 바나바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왜? 사울이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았습니다. 그 이유가 사울이 이방인의 선교에 이 만큼 적합한 인물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고 그래서 사울을 불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면서 헬라어뿐만 아니라 헬라 문화를 잘 알고 있었던 그이며,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였기에 로마 제국 어디든지 아무런 제한 없이 다닐 수 있었던 인물이기에 심지어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자,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의 경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나바가 그를 불러 함께 동역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사울이 마음껏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고, 막 믿기 시작한 성도들을 가르치면서 이 사역을 동역하며 일 년 동안 머물면서 가르치니 풍성한 열매가 얻어졌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자라는 이름이고, 또 다른 하나가 예수님을 닮은 교인들, 즉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인데, 이것은 말씀을 보는 눈이 열림으로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이 있게 한 결과이고, 사도들의 경건한 삶을 통한 감화를 받은 결과입니다. 그저 나사렛 쪽의 사람들에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고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을 내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고, 세상 사람들이 안디옥 교인들을 자기들과는 구별된 사람들이라고 비꼬는 투의 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이라는 의미, 요즘 표현으로 ‘예수쟁이’, ‘예수환자’라고 불렀지만, 이 조롱의 말을 안디옥 교인들은 자랑스럽게 여겼고, 안 믿는 사람들조차 안디옥 교회 교인들의 변화된 모습과 열심이 저희들에게 도전이 되게 하였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안디옥은 국제도시이면서, 사치와 부도덕이 만연한 도시오, 아폴로 신을 숭배하면서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호화로운 생활로 인한 부도덕이 도시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안디옥 교인들은 그렇지 않음으로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본질은 단순히 먹을 것만을 나눠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눠줌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아, 거듭나고 중생한 새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동일한 신앙고백 위에 성령의 운행을 통하여 인격적으로 친밀한 연합적인 공동체가 교회이고, 사회적으로 보는 community가 아닌 본질적이고, 유기적이며, 영적 의미로서의 “communion” 즉 “코이노니아”가 바로 교회인데, 이 안디옥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만큼, 엡 4:15-16절이 말하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4:15-16)가 되고자 하였습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사랑하는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 사랑의 교회에 이 은혜가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안디옥교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27-28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 11:27-28) 여기 ‘그때’는 바나바와 사울이 교회에 일 년간 큰 무리를 가르치며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그때를 말합니다. 그때에 선지자들이 나타났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선지자들이란 구약에서 말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설교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가 커지니까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지도자들이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고, 방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흥집회를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성령에 감동되어 심각한 흉년이 온 로마제국을 휩쓸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글라우디오 황제 때에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방에 그 피해가 심하게 되었다고 누가는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를 향하고 신령함을 사모하니 하나님이 여러 가지의 것들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피차 견디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29-30절입니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 11:29-30)

 

예수 믿고 은혜를 받으며, 성경공부하면서 처음으로 한일이 천하에 흉년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모른다가 아니라 정성스럽게 헌금을 하였다는 것이고, 이것을 바나바와 사울을 통하여 전달하게 하였다는 이야기, 교회의 일치성과 지체 의식을 깨달을 줄 아는 폭넓은 시야를 이들이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교회이고 주로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교회이면서 자기들도 흉년의 피해를 겪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에게 선교사를 파송하여 영적성장에 도움을 준 예루살렘 교회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고, 복음으로 인한 진 빚을 헌금을 모아 도와주는 일을 한 것인데, 예루살렘 교회가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대한 불편한 것이 더러 있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한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보여 주었고, 작정만이 아닌 그대로 지킴으로 참된 믿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추집사님이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소중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분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였고 예수님을 나의 구조로 믿게 해주신 지금의 선교사에게 복음의 빚진 자의 행동을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 사랑의교회도 감당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교회로 꿈꿔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본문은 단순히 안디옥교회가 구제하고 성장하였다는 것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로는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예루살렘 교회와는 달리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생겨났다는 것이고, 선교의 지경을 넓히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해하여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결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 없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안디옥 교회가 생겼다는 것,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님께 돌아왔다는 말씀 안에는 먼저 주님의 뜻을 알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의 뜻대로 순종할 때 주의 손이 함께 하시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로는 사마리아에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했던 것처럼 안디옥에도 헬라파 유대인이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바나바를 파송했다는 것, 그가 왜? 파송을 받게 된 이유인 성령이 충만하고 착한 그가 보냄을 받아 안디옥 교회가 더욱 성장하게 되게 한 그 바탕에는 믿음의 본을 보인 그였다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자 했다는 것, 이미 믿는 사람들도 신앙이 더욱 견고하게 되면서 제자라는 이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붙게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역은 혼자만이 아닌 사울과 동역함의 결과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모습을 보임으로 은혜를 갚는 모습을 부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기는 우리도 우리 사랑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기를 힘쓰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는 결과들, 하나님께 영광이고 모든 이들이 칭송하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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