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말씀이 두루 퍼지니라”(행 13:42-52)

 

우리는 지난주에 회당에서 전한 바울의 설교를 나눴습니다. 바울이 설교한 이곳이 어디입니까? 그레데 섬을 지나 다시 갈라디아 지역 쪽으로 오게 되는, 비시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인데, 그곳에 있는 회당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곳은요, 주전 약300년경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 한 사람에 의하여 건설된 도시인데, 헬라인과, 유대인, 로마인, 그리고 본토인, 부루기아인으로 혼합된 사람들로 구성된 도시가 이곳입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이 교통의 요새지였기에 주전 6년에는 로마의 영토가 되어 버렸던 곳입니다. 이 도시에 유대인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기반을 확보하여 상업의 요새지로 삼았고, 나중에 나누겠지만 유대인의 행사하는 영향력이 결국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고 이 도시를 떠나가 만들 정도입니다. 여하튼 바울과 바나바가 안식일이 되어 예배를 드리러 이곳의 회당에 들어갔고, 그들이 말씀을 전하라고 기회를 주니까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경건하게 살려든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영적인 훈련을 받는 곳이고 모인 사람들이 어느 정도 종교적인 대화가 소통되는 이들이 있는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러면 바울이 전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는 바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이다, 다윗의 자손으로 약속된 메시아였고, 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다시 부활했다. 이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었습니다. 이 메시지가 한마디로 큰 반응을 일으켰고, 오늘 본문은 이 메시지가 전해진 다음 이들에게 나타난 반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즉 그 곳 사람들에게 큰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켜, 저들이 그 다음 안식일에도 거의 온 성이 다 바울과 바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자 모였다는 것, 이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에게 모여 드는 안디옥의 군중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복음 전도를 변박하고, 이어 안디옥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한 자들을 선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을 뿐 아니라 쫓아내고 말았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이 주의 말씀이 그 성중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에 담긴 내용을 중심으로 두 가지만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Once again입니다. 즉 복음을 다시 듣기 원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그들은 또 듣기를 원했습니다. 42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행 13:42) 이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아 한번이 아닌 다시 다음 안식일에도 설교해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요? 복음이 그들에게 있어서 처음 듣는 생소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설교가 그들 마음가운데 느끼는바 있게 했던 것이고, 설교가 그들의 폐부를 찔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은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설교를 들은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 즉 이방인으로서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고 쫒았는데, 43절입니다. “회당의 모임이 끝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행 13:43)

 

이 말은요, 설교가 끝난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나가니까 그 뒤를 우르르 쫒아갔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 받은 이들이 옆에 좀 더 있고 싶어 했다는 것이고, 뭔가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 그렇게 했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무엇이라고 해요?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은혜 받은 자들에게서 당연히 나오는 행동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이요, 아프리카 어느 민족에게 말씀을 전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방금했던 이 말씀을 또 해달라는 했다는 그의 간증을 들었는데, 이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 그렇게 부탁한 것이고 일주일이 지나 말씀을 전하는데, 난리가 났던 것이에요.

 

44절을 볼까요?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행 13:44) 그러니까 처음 바울의 설교를 들었던 그들 외에 ‘온성이 거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왔던 것이고,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돌아가 그날 자기들이 은혜 받은 것을 이야기하였다는 것입니다. 한번 가보자고 함으로, 온성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온 것인데, 여러분, 복음은 다시 들어도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만든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붙잡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여러분의 생애와 여러분의 가치관을 통째로 뒤바꿔 버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됨으로 예수님과 깊은 만남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 정도가 되니까 유대인들이 시기했습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유대인들의 시기입니다. 45절을 볼까요?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행 13:45) 한마디로 말하면 바울을 욕했어요. 그러면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요?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이방인들을 빼앗아 바울이 따로 한 모임을 만들까봐 욕한 것이라는 충분한 일반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어제요, 어느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그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가 LA에서 대학캠퍼스 사역을 하였는데, 하나님이 참으로 많은 부흥을 주셔서 학생들이 1000명이나 모이는 은혜가 있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교회 장로님들이 당회장 목사님을 찾아가 이 목사님이 LA에서 절대로 목회 못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하여 결국 타주에서 목회를 시작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오늘 본문의 이 구절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장로님들이 한 행동이 무엇입니까? 성도를 빼앗길까봐 그런 것이거든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누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 있어요., 그것은 누가가 그 다음 안식일에 바울과 온 성의 사람들, 즉 이들이 모인 이곳이 회당인지 다른 곳인지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을 전해달라는 부탁으로 일주일이 지난 이 안식일에 말씀을 전했는데, 설교를 다시 들으려고 온 자들이 그때 들었던 사람들만이 아닌 온 성의 사람, 그 도시의 시민들이 거의 다 모이니까 이것을 본 유대인들이 바울을 욕했다는 기록을 남긴 것 아닙니까? 즉 누가는 복음으로 인하여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사람들과 이해 못하고 빈정대고 욕하는 무리들을 대칭시키고 있습니다. 안 그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이 행동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요, 비록 누가가 유대인들의 행동이 매우 부도덕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고, 온 성의 사람들이 다 모인 것에 대한 북받친 퍼부음이라 보이고 있지만 이곳이 예루살렘도 아닌 비스디아 안디옥이라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본토인과 로마인에 비해 훨씬 적은 디아스포라의 소수민족이다 보니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자신들의 신앙적 전통을 해체하려는 자들에 대한 처리방식은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정당하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예수당의 사람들을 잡아들이려는 열심을 보인 것 아닙니까?

 

하지만 누가의 강조는요, 이 유대인들의 분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유대인을 통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유대인들에게 먼저 들어갔지만 유대인들이 이 복음을 거부했다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 향한 분명한 이유를 밝힌 것이 그의 강조입니다. 즉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선택하였습니까?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땅 끝에서부터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부르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렀고 택하였고 싫어 버리지 않았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에요? 이스라엘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하나님 당신의 구원을 베풀어 땅 끝까지 이르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을 통해 이방인이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이에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거부했고 이방인들 개처럼 여겼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한다는 분명한 이유를 바울이 46-47절에 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6-47)

 

‘하나님의 말씀이 마땅히 먼저 너희들에게 전해져야 할 것이로되’라고 하였고, ‘너희가 이 복음을 거부하고 버렸다’는 직설적 표현을 써가면서,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스스로 생각하여 이방인에게로 이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이다‘라는 분명한 이유를 밝힌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것일까요?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은 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 표상과 다르다는 이유에요. 이에 대한 뿌리가 어디에 있느냐면 바로 자신들의 전통적인 것, 즉 하나님 경험을 폐쇄적으로 수호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신들의 인식 범주에 갇혀버린 모순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솔직히 이것을 벗어났다면 그들은 벌써 예수님을 메시아로 따랐습니다. 이것에 대한 한 예가 고넬료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이 베드로에게 반복적으로 보여준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아닙니까? 그 안에 하나님이 금지한 각종 짐승과 벌레들이 들어 있었고, 이것을 잡아먹으라고 했지만 거부한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즉 갇힌 인식에서 탈출하라고 하셨던 것이고, 폐쇄적인 것을 부스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선입관이나 전 이해에 근거해서 해석하여 정작 본질을 발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신약성경에서 계속적으로 예수님과 변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어떻게 해요? 예수님이 자신들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믿을 수 없는 자리,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자리까지로 나가 십자가에 죽여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50-51절에도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어요.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행 13:50-51) 그래서 누가는요, 앞에서 하나님의 분명한 목적을 이야기함으로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밝혔고, 복음을 전하였는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즉 그들이 주를 믿음으로 기뻐하고 찬양하며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진 이유를 말함으로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에 비록 그 지역을 떠났지만 그러나 복음은 그들 마음에 살아 움직였고 왕성해졌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48-49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행 13:48-49)

 

그렇다면 이제 말씀을 맺으면서 다시 집고 넘어가봅니다. 바울의 설교와 그들의 말을 주고받은 결과가, 다음 안식일에 거의 온 도시 사람들이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습니다. 이것은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이 선포했던 이 말씀은 다른 말씀도 아닙니다. 행 13:16-41절의 말씀을 그가 두 번에 걸쳐 전한 것이고 그들은 두 번에 걸쳐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 했어요? ‘약속을 응하시는 하나님’과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말씀 아닙니까? 우리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이고, 이미 믿고 있는 기초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메시야를 보내셨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너희들이 그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그러기에 이것을 믿으면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에요? 이 말씀을 전했고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기뻤고, 주를 믿기로 결단했던 것’ 아닙니까?

 

이 설교를 들은 경건한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이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쫓으니까 다른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함으로 배척하였고 결국 이 도시에서 쫓아내고 말았는데, 이유가 무엇이에요?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주시는 특권이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갈 수 있느냐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기에 바울의 설명은 유대인이 먼저 구원에 참예하고, 후에 이방인이 부름을 받는 것이 맞는 말이지만, 먼저 믿어야 할 유대인이 거부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으로 옮기는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바울과 바나바가 추방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기쁨이 충만하였고, 복음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는 사실로 마무리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먼저 예수 믿는 사람의 특징이 바로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기쁨은 예수님에게서 발견되고, 복음이 또한 기쁨을 발견하게 하고, 복음을 전할 때 나오는 것이며, 전함으로 받는 핍박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기쁨이 있습니까? 원하기는 정말로 있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는,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자기만 그 지식을 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 했고, 알렸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그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고 ‘그 지방에 두루 퍼지게 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누가가 오늘 본문을 통해 밝히고 있어요. 그러면서 복음에 대한 나의 태도를 묻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복음을 들었고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복음을 듣도록 애쓰고 있느냐? 는 질문을 던지고 있고,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겠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것 하나만은 확실한데, 복음을 통하여 얻는 기쁨은 나눠줄수록 넘쳐나고 반대로 복음을 나눠주지 않으면 기쁨은 그만큼 반감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마지막으로 누가는 우리에게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은요, ‘담대히’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함에 대한 확신과 기쁨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분명한 체험이 그들로 하여금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삶이 비록 큰 역사를 이루지 않아도, 평범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복음의 확신이 삶 속에 넘쳐나야 하지 않을까요? 받은 은혜 때문에 은혜에 대한 감격이 넘치는데 우리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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