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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입성”

(마태복음 21:1-11)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에 관한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보게 되는데, 먼저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부르며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식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종교적 지도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한 지방의 선지자로 이해하는 부류입니다. 그리고 이어 두 개의 그림까지 이어서 보게 됩니다. 그 하나는 성전 밖에 계시는 메시아이신 예수님과 다른 하나가 메시아를 기다리는 성전 안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군중들과 함께 계시면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있는 메시아와 달리 나름대로의 확고한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자신들만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속에서 던져지는 질문은, ‘하나님이 원하는 신앙이 무엇이냐’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신앙은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내가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성령님과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님과 끊임없는 일치를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은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성령님과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님과의 끊임없는 일치를 위함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카톡을 통해 묵상한 큐티 내용처럼 우리는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간 인생이고 이 인생인 우리를 위한 예루살렘 입성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약 2Km 정도나 떨어진 벳바게라는 마을에 오신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위치가 해발 811m나 되는 높은 곳이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바로 눈 앞에 보이기도 하는 곳에 예수님이 도착하여 두 제자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면 메인 나귀 새끼가 있다고, 그곳에 가서 메인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가 쓴다고 하면 준다는 하였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해서 나귀새끼를 끌고 왔습니다. 그 나귀 등위에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얹히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타게 하였고, 무리의 다수들이 나뭇가지를 베어 길을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신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찬송하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까, 이 소리에 예루살렘 성 안에 지금 말하는 이가 누구냐고 하니 갈릴리 나사렛에서 온 선지자라고 한 내용이 오늘 본문의 줄거리이요 내용입니다.

 

오늘 이 안에 담긴 중요한 몇 가지를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8절에 이렇게 반응이 나왔습니다. 8절입니다.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마 21:8)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는 많은 무리들이 환호와 찬송을 부르면서 입성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요한은 요 12:12-13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 명절이라면 유월절을 말합니다. 이 명절을 지키려고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함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요 12:12-13) 무슨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모인 많은 무리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소리치면서 환영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면서 의심되는 한 단어를 요한복음이 제시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흔든 나뭇가지 이름인데, 공관복음에서는 그냥 나무라고 했지만 유독 요한만은 이 나뭇가지를 종려나무 가지라고 구체적으로 가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종려나무라고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종려나무가지의 의미입니다. 종려나무는 수전절, 즉 민족해방을 시켰던 마카비 시대를 소망하는 의미의 나뭇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루살렘 근처에는 이렇게 따서 흔들만한 종려나무 가지가 거의 없기에 한마디로 준비해서 흔든 것이고, 학수고대의 흔듦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외침은 예수님을 메시아임을 알아 외친 외침보다는 그들이 기대한 조국의 해방자로서의 환영이 더 강했다고 볼 수 있고, 힘으로 로마 정부를 엎어놓는 그날을 소망하는 환영이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입니다.

 

그러면 이 수전절이라는 절기를 알 필요가 있는데 이 절기는 어떤 절기일까요? 기원전 164년경,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고 제사를 드린 하누카, 여러분, 성탄절이 다가오면 곳곳에 하누카를 알리는 등불이 켜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것은 유다의 마카비가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에다 돼지를 가지고 제사지내며 하나님을 모독하니까 그들을 무력으로 물리쳐 성전의 제사를 회복하고 민족의 해방을 오게 한 기념의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옛날 유다 마카비가 정치적으로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예수님이 지금의 이 로마제국을 물리쳐 이스라엘의 독립을 가져다 줄 인물로 기대했기에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고 심지어 먼저 앞에 있었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인한 엄청난 소문으로 인하여 이들은 더 흔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의 구체적인 것이 무엇이에요? 예수님이 사실 죽기 위해 오신 이유를 무시한 것에서 답을 찾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그리스도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지 죽기 위해 오신 메시야가 아니라 여겼고, 이것에 대해 그들은 아예 들어본 일도, 생각해 본 일도 없다’라 여겨, 오직 자기들만의 메시야로, 자신들의 조국을 구원해 줄 메시야로 환영했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모른 것이고 아예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에요? 그들이 하나님을 바로 믿으며 살아감으로 오늘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이방인들이 보게 함으로 그들 또한 하나님 앞으로 나오고 하나님을 믿는 그 자리에 나가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들은 부정하고 있고 모른다고 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너무나 급하도록 이른 이침부터 포도원에 들어갈 자들을 찾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주님이 타고 입성하신 어린 나귀입니다.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마 21:7) 그런데 이 말씀이 요 12:1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만나서 타시니”(요 12:14) 여러분, 겉옷을 그 위에 얹었고 그 위에 탄 것과 ‘이 나귀를 예수님이 만났다’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마태는 나귀를 데려온 상황을 이야기 했지만 요한은 만났다는 아주 적극적인 표현을 하였습니다. 요한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사는 길은 바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밖에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이 일을 이루고자 나귀를 만났던 것이고 그리고 이 나귀에 타신 것은 바로 오래전에 예언된 예언의 성취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예언은 어떤 예언일까요? 바로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예언입니다. 이 예언을 마태도 그랬고, 마가도 누가도 인용하였고 요한도 인용하였는데, 마태는 본문 5절에서 요한은 12장 15절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5절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5) 요한복음 12:15절도 이어서 봅니다. 들어보세요. “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으니라”(요 12:15) 그러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스가랴서 9:9-10절은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요? 한 번 더 들어보세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슥 9:9-10)

 

무슨 말이냐면 쉽게 말하면 바로 이 의미입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이시다. 이 분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어 버리는데, 이방나라에 화평을 전할 것이고, 인간들이 자신의 보호를 위하여 의존하는 무기를 왕이 오셔서 다 제거해 버리고, 자기 백성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신다는 말씀, 즉 나는 왕이다. 그런데 너희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그런 모습의 왕이 아니다. 나는 백성 위에 군림하여 다스리는 왕이 아닌 만물을 섬김으로써 다스리는 왕이고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 주시는 분이자, 섬김의 왕으로 오셔서 자기의 생명까지 내어주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의 모습이 바로 이 모습 아닙니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화목제물이라는 말씀인데, 이 사실을 요한은 요일 4:9-10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라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다고 선포했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본문도 그렇고 성경에는 이 나귀의 주인에 대해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 나귀 주인은 주님이 쓰신다는 말에 두말없이 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아주 큰 은혜가 있습니다. 왜 큰 은혜냐면 이 내어줌이 바로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가 되었고, 하늘의 왕을 등에 태우는 역사가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구체적인 일을 하게 되는 영광스러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어린나귀를 타셨는징 대해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12:16절에 보면 자신들의 그 당시 무지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 무엇이에요? 당시에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상황으로 다시 돌아 가봅니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셨는데 그것도 모르고 열렬히 환영하는 백성들의 소리에 그들은 얼마나 뭉클했을까요? 나 자신도 누가 나에 대해 감동적인 훈훈한 말을 해줘도 눈에 눈물이 맺힐 정도로 뭉클하게 되는데 제자들은 얼마나 더 했을까요? 무엇인가를 쟁취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요? 정치적으로 한 자리도 차지 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가질 수 있는데, 그런데 여러분, 주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가고 계시는 이 길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죽으러 가는 길 아닙니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길이었고 어느 누구도 아닌 예수님만이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안 요한은 ‘영광’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대한 표적 거부의 종교지도자들이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놓치고 싶지 않아 예수님을 죽이기로 한 것과 함께, 그들이 모여 결의한 내용이 온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제물로 예수를 희생으로 바치겠다고 선언하여 그들의 지혜를 총동원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에 대항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인을 위한 속죄제사로 삼으셨다는 것, 이것이 바로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계획이 영광이라는 사실이기에 그렇습니다. 이 만민 안에는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예루살렘으로의 입성하심은 죽이 위하신 것이고, 유대인들이 말하는 다윗 왕조를 재건하여 실제로 정치적 왕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범한 죄를 씻는 속죄 제사를 위해 입성하셨고, 하나님의 새 백성을 창조하는 새 언약의 제사로 하나님이신 본인 자신을 바침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새 백성을 창조하는 것,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를 위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신들의 민족을 구원해달라는 마음의 오침이 아니라 고난의 메시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메시아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심의 구원해달라는 외침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오늘 마태는 본문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나라가 어떠한 것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한 어린 나귀를 만나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며 외친 이들이, 자신들을 구원해 줄 왕으로 기대가 아니라, 지금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 왕이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 길을 위해 친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심 메시아임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들은 자기들을 구원하여 달라는 외침에 답할 메시아를 찾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메시아를 찾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원함을 위한 메시아를 찾고는 잊지 않습니까?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 예수님을 찾아야 하는데, 혹시 화려한 주님, 민족의 해방을 원하시는, 특별히 사회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찾고 계시는 우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오늘 잡히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에 로마 제국에 맞서줄 정치적 메시아, 공의는 뒤로하고 사랑만을 찾는 우리의 예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보다는 용서라는 합리화로 변해버리는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훗날 이들처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더 큰 소리로 외치는 자들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아시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이날의 환호성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셨을까요? 우리는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가도록 하신 은혜를 받았습니다. 비록 1시간 밖에 안 남았지만 들어 보내게 해주신 은혜의 감격하여 손에 피멍이 들도록 주인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아닌 이 감격을 멀리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 포도원에 들어가도록 하시기 위해 주인이신 당신은 직접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십자가를 향해 죽으러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이번 한주간도 이 은혜의 감동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 다음 주일에 만났을 때 이 감동을 가지고 예배에 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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