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생겨난 큰 문제”
(행 15:1-11)
여러분, 요즘의 산업 중 불황을 모르는 산업이 외모산업이라고 합니다. 이 산업의 종류가 무엇이냐면 예를 들어 미용실이라든가, 피부 관리실, 스포츠센터, 각종 화장품회사, 그리고 성형외과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들에 대한 어떤 통계의 의하면 이 산업의 매출이 무려 7조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호황이 무엇이냐? 바로 성형외과랍니다. 그 이유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맘에 안 드는 부분들을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요? 좀 못 생긴 상태로 태어나도 성형하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쉽게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사실 외모보단 마음이 중요한데, 이제는 이 말의 의미도 약해져가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음보단 외모치중의 다수가 더 강한 쪽으로 바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외모도 아니고, 아예 마음자체가 강퍅한 자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마음 상태가 ‘말라서 굳은’ 모습이고, ‘딱딱한’ 모습을 가진 이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경우를 아예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이라고 표현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성공적으로 1차전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들이 1차 전도여행에서 있었던 일들과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그 역사들을 보고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나눴는데, 이것에 대해 별로 좋지 않게 여기는 무리들이 유대로 부터 올라와 노골적으로 바울의 사역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결국 예루살렘 공의회까지 열리게 되었고 베드로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기에 담긴 말씀을 나누면서 우리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다툼과 변론입니다. 1-2절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행 15:1-2) 이 내용이 무슨 내용이냐면 지금 안디옥교회에 바울과 바나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로부터 온 이들은 일부러 찾아와 자신들이 제기한 문제를 가지고 가르치니까 바울과 바나바와의 적지 않는 다툼과 변론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예루살렘 공의회로 가지고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어떤 것일까요? 이들의 제기한 문제는 어떻게 보면 전통적인 신앙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고, 교리적인 갈등이지만 솔직히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것을 들고 와 바울의 선교보고를 방해하고 있고, 그들의 주장으로 안디옥의 성도들을 흔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주장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구원 받는 것도 좋지만 할례를 받아야 된다’라는 이야기, 즉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도 소용이 없고 완전한 구원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이라는 문구를 사용하면서 흔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들이 왜? 이렇게 할례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할례를 빌미삼아 자신들의 기득권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만이 온전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는 한마디로 자르는 의식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 된 표로 아브라함의 자손들과 그리고 그들과 연합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다 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할례입니다. 그 내용이 창 17:10절에 나오는데 들어보세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 17:10) 한마디로 하나님과의 연합이고, 세상의 모든 것을 끊어버린 신앙을 나타내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것을 그렇게 강조한 이유는 여기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 때문입니다. 즉 ‘너는 내 백성이고 내가 너를 보호해 주겠으며 나와 너와 언약을 맺는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만 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어 이것만 행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확신도 갖게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할레가 아브라함과 모세 이후에 율법이 되어 아예 고정화되어 버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 내용이 어떻든지 간에 형식적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할례를 받기만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믿음으로 타락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극단적인 견해를 갖게 되었고, 결국 형식만 남아 정작 내용은 죽어버린 상태가 된 것입니다. 항상 형식이 되어버리면 위기가 옵니다. 왜냐하면 위기를 자신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형식이 되어 버리면 자신을 속이기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게 만들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전통화 시키고 교리화를 만들며 상징화하는 것 아닙니까?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매주일 마다 드립니다. 수요일도 드리고 금요일도 드립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형식화 되어버리면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으로 다 거룩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처리되어 신앙생활을 잘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듭니다. 솔직히 이것은 우리를 기만하는 것입니다. 안 그래요?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믿음 좋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결정지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고, 그 내용이야 어떻든지 간에 이 전통대로 교리대로 형식적으로 반드시 이 과정을 거처야 만이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이것은요, 구약 때까지의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레위기나 신명기 민수기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구약 때 까지 제사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그래서 할례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끝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것 아닙니까? 뭔가의 행위를 해야만 얻는 것이라는 것이고, 그래야만 좋은 신앙인인 된 것 같고, 봉사를 많이 함으로 나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어딘가 부족한 느낌을 갖고 사는 것, 그래서 할례가 필요하고 할례를 꼭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한 것이고, 이 할례를 통해야만 내가 드디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도 확인 되니까 안심하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이들이 주장한 것이고 율법도 행해야 되고 할례를 받아야만 구원이 완성 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 문제에 대해 사도바울이 이렇게 정의를 내리지 않습니까? 갈 5:2-4절입니다. 들어보세요.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무슨 말이에요? 너희가 말하는 할례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예수님이 뭐냐? 라는 이야기 입니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즉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제는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갈 5:2-4) 예수님으로 인하여 할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즉 우리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를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가 구원입니다. 나의 조금이나마 노력을 가미해야 하는 것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가사처럼 “하늘을 두루 마리삼고 바다를 먹물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율법은 완전히 무시되어야 만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무시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당연히 선하고 흠이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을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정상이에요. 그렇지만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하나도 없는 것일까요?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절망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이 정상이에요. 왜? 안 되는 것일까요? 인간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말의 의미는요, 인간의 깊은 뿌리에 있는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솔직한 고백을 로마서에서 보게 되는데, 자기 자신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곤고한 사람이라며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겠느냐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왜? 입니까? 인간의 깊은 뿌리에 죄가 있다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을 온전하게 지킨 한 분이 계시는데,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그리스도 아닙니까?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인간으로 죄가 없는 분으로 오셨잖아요? 이 율법을 완성하시려고 오신 것이에요. 그의 완성이 무엇이에요? 당신이 죽어야만 되는 것, 당신만이 져야 하는 길, 인간의 깊은 뿌리에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를 해결하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완벽한 인생을 살았는지 얼마나 실수가 없었는지 묻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어려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 즉 믿는 것이고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이에요. 이것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가득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아멘!
그러기에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제사가 끝났던 것이고,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율법이 끝났고요,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할례가 끝난 것입니다. 즉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전했던 내용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예수님만이 메시아이다. 예수님만이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다. 이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 즉 다시 부활하셨다. 그래서 누구든지 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고 죄 사함을 받게 된다’ 이 메시지이고 이것을 전한 것입니다. 이것을 전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역사하셨던 일들이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나누고 있는데, 이들이 유대로부터 일부러 찾아와 예수도, 성령도, 구원도 다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즉 전통적으로 믿어야 된다는 것, 전통적인 틀을 제시하고 교리적인 틀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이 상황은 예수도 믿고 십자가도 믿지만 전통과 율법의 노예가 되어 결국 성령의 능력을 제한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이들과의 논쟁이 아주 심해졌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까지 가면서도 보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들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본격적인, 거론, 쉽게 말하면 교단 총회에 이 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 단순히 예루살렘만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가다가 작은 도시에 들려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행 15:3) 즉 이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디를 가든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예수를 전하고 그들이 다 주께로 돌아오는 일을 멈추자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바로 이들 안에 있는 예수님에 대한 충만 때문입니다. 즉 이들은 관념적으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요즘의 표현을 빌리면 성령 충만 입니다. 나중에 나누겠지만 사도행전 16장에 가면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붙잡혀 엄청나게 얻어맞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요.
생각해보세요? 감옥에 들어간 그들의 모습이 어땠을까요? 먼저 손이든 발이든 착고가 채워졌을 것이고, 어쩌면 밤중이 다 되었을 때 들어갔지 않았을까요? 빌립보 감옥이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지만 시설은 엉망일 것이고 벌레와 어두운 상태, 그리고 칙칙한 상태일 것입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맞았는데 불구하고 이들은 ‘아이구 아파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고 기도했습니다. 맞은 자리가 아팠겠고 심지어 배도 고팠을 것이지만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의 충만으로 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고 억울함보다는 찬송과 기도를 한 것입니다. 어떤 이유일까요? 그들 안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은혜가 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도 성령 충만이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매 순간순간 주님과 이야기하고요, 매순간순간 주의 음성을 듣고요, 매 순간순간 주님을 느끼며, 매 순간순간 위로부터 공급되는 힘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루살렘의 도착에서의 일입니다. 바울의 일행이 안디옥에서 파송 받아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장로들과 사도들이 그들을 환영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는지, 어떻게 이방인들이 복음의 문을 열게 되었는지 간증을 하면서 서로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파 중 어떤 믿는 사람들이 또 이 문제를 거론합니다. 4-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행 15:5) 말 그대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일던 바리새파 예수 믿은 자들이 예수도 좋고 성령도 좋고 다 좋은데 할례를 받아야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논쟁과 토론을 계속 하였다고 7절 앞부분에 꺼내고 있고, 심각하게 그리고 광범위한 토론을 한 후에 침묵하였던 베드로가 입을 열어 결론을 내립니다. 7절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행 15:7)
베드로가 자신이 경험을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택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자기를 택해서 역사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알다시피 백부장 고넬료와의 만남입니다. 그의 집에 가서 그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한 이야기, 그래서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주셨다는 것, 자신 환상을 통해 보자기가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었고 정말로 혐오하게 느꼈는데, 하나님이 이 더러운 짐승들을 먹으라고 하니까, 먹을 수 없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무려 세 번이나 반복적으로 하셨다는 것, 그러면서 내가 거룩하게 한 것을 너는 왜 더럽다고 하느냐고? 먹어라’고 했는데, 그때엔 몰랐지만 나중엔 이것이 바로 바로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구원을 의미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셨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8절을 볼까요?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행 15:8) 무슨 의미냐면 우리에게만 성령을 주신 줄 알았는데 이방인에게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만 성령을 체험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성령을 체험하게 해준 것이라는 이야기,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었다는 엄청나고 굉장한 말을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은 믿음을 주셨다는 것, 믿음으로 그들도 죄 사함을 받았고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이 깨끗해 진 것이고 이제 의인이 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9절로 이어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9) 제가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던 것이 있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신 이유에 대해서, 무엇입니까? 바로 이방인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택했다는 이 사실이 싫었고요, 이방인들을 개처럼 보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이방인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본 것입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본 것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은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들만이 하나님을 독점하고 싶었고,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축복도 독차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구원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일을 어떻게 한 교회만 해야 하는 법이 없잖아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교회가 동참하야 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만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세계 모든 열방들이 구원 받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잡을 쓴 이들도 예수님을 영접해야 하고 얼굴이 까만 흑인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하고, 인도나 중동이이나 중국인이나 이태리인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이들에게 즉 할례를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 대해 베드로가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행 15:10) 너희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일까요? ‘자기의 주장은 항상 옳고 자기의 믿음이 기준이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자기가 배운 것만이 절대이다 보니 양보도 없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희들이 주장하고 있는 할례 또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하는 것은 너희 조상도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율법을 시행하고 제정한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 못 지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도 못 지킨다는 것, 너희도 못하는 것을 왜? 하려고 하게 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전체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까? 11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행 15:11)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은 것이라는 말씀, 율법으로도 아니고, 할례를 행함도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결론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름 사람에게 멍에를 지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멍에가 다른 사람에게 힘들다면 우리도 힘든 것이에요. 제가요, 사랑의교회에 제자훈련은 아주 오랫동안 해왔는데 이 미국의 상황은 참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습니다. 원칙대로 하면 다 죽습니다. 훈련을 받는 그들이 바른 제자가 되도록 이끄는 것이 필요하지만 못하고 있다고 해서 배척이 아니라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현장이 이 미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면 정말로 율법의 멍에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이 사실을 굳게 붙잡아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자리매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 원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이번 주보 이것을 몸소 실천으로 옮기는 우리가 된다면 먼저 성령께서 도울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여러분의 입으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충만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