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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마 5:1~12

 

여러분, 마음이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아십니까? 기독교 철학자들은 마음을요, ‘작은 우주’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가 마음이 너무나 오묘하고, 신비로우며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마음 안에는 지성과 의지와 감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청결하다’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위선이 없고 온전한 것’이고, ‘아무것도 숨김없이 열려 있는 것’이며, ‘신실하고 진실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할 때 이루어지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당연히 손도 깨끗하게 되고, 마음도 성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와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그렇고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자가 바로 복이 있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것을 나누기 위해 잠시 주님이 말씀하시던 그 동산으로 함께 올라가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의 마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요,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품는다는 것은 본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청결한 마음인데, 그러면 청결한 마음은요, 세상과 결별하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힘입어야만 가능하게 됩니다. 이유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청결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데서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보혈의 능력만이 청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을 추구할 때 청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성령이 우리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며 거듭나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주님을 바라볼 때 청결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는 것은요, 결국, 주님의 보혈이 주는 능력을 힘입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도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청결한 마음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후 5장 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났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요,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는 것과 같아요. 무슨 말이냐면, 죄인이 의인 되었고, 마귀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육신을 위해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결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런 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청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날이 도래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 본문의 바탕이에요. 본문의 배경은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구름 떼와 같이 아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어요.

 

갈릴리에서, 데가볼리에서, 예루살렘과 유다 지방에서, 심지어 요단강을 건너 이방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까지 몰려 왔는데, 모인 그들의 대부분이 누구냐? 병든 자들이었고, 귀신들린 사람들이었으며,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한 외로운 사람들이었고, 가난한 사람들, 죄인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실패자들이요, 소망이 없어 보이는 자들이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무리들을 이끌고 주님은 갈릴리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로 올라가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자리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르치기 시작하셨는데, 그 첫 문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이었습니다. 차원 높은 진리의 말씀을, 일반 무리들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내용의 말씀을 “산에 올라가서 앉으셔서”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여기 앉으셔서 선포했다’라는 이 표현은 가르치는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유대 나라 랍비들은요, 가르칠 때 다 앉아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선생의 권위가 앉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앉으셔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로 가지고 가르치시기 시작했고, 그 가르치심이 얼마나 권세가 있었는지 듣던 사람들 모두가 놀랐다고 그 반응을 7장 28절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다” “서기관들과 같이 아니했다”라는 것, 무엇이에요? 직업적으로 가르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다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는 것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 사람들의 귀에 들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천하 만물을 창조하신 만유의 주가 말씀하시기에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시고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시고, 갈릴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가르치시던 그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들려주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산에서 가르치신 핵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품을 말하고 있고 동시에 당신을 따르는 우리들의 성품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성품은요, 선천적으로 가진 본성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것”은 본성과 관계가 없다는 말이에요. 천성적으로 겸손하거나 눈물이 많거나 성격이 부드러우면서 의분이 강한 사람도 있겠지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성품을 갖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 즉 “나를 따르는 자는 내가 가진 이러한 성품들을 가져야 한다”라는 것이고,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성품이고, 이것은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성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성품을 내 것으로 받은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이렇게 행복하니까 너희도 행복해야 된다”라는 주님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에 주님은 “복이 있나니”라는 감탄사를 사용하였습니다. 원문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이여! 온유한 자의 행복이여!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의 행복이여!”입니다. 바꿔 말하면 “심령이 가난하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니? 화평케 하는 생활을 하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아니?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이 있나니”라는 이 말은요, 헬라어로 “마카리오스”입니다. 이 단어는요, 일반적인 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행복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행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나니”라고 할 때 해당하는 단어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자신의 행복을 가리키는 것이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리는 행복을 너희도 항상 체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이고, “너희도 나처럼 심령이 가난하면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라고 하신 것이고, “너희도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나처럼 행복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 만큼 가난한 분이 있었나요?. 예수님 만큼 사람들에게 핍박받은 사람이 있었나요? 그러나 그와 같은 고난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이 바로 심령의 행복이었고, 우리가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자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이 행복을 잘 간직했습니까? 우리는 이 행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원인이 바로 죄입니다. 죄가 우리의 눈을 가렸고, 죄가 우리를 속였으며, 죄가 행복을 주는 것 같았지만 일시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 속임수에 빠졌고 쾌락이 행복한 것 같았지만, 재물이 행복을 주는 것 같았지만, 명예나 권력이 행복을 주는 것 같았지만, 결국 “헛되고 헛되다”로 귀착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왕으로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기를 애쓰게 함으로 하나님이 누리시는 그 행복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 말로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 행복의 원천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안에 거하셨고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하셨던 것처럼 나도 심령이 가난해 지면 예수님의 행복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죠?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이 은혜를 놓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마지막은 예수님처럼입니다. ? ‘예수님처럼일까요? 행복은 소유보다는 심령이 가난한 데 있기 때문에 그렇고, 애통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렇고, 온유한 데 있기 때문에 그렇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데 있기 때문에 그렇고, 긍휼이 여기는 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있는 것이고, 화평케 하는 데 있느 것이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솔직히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핍박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 고통을 당하는 게 무슨 행복일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11~1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이것이 이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핍박은요, 헬라어로 ‘디오코’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가 무엇이냐면, 악의를 품고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스토킹이에요. 사단이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스토킹이고, 믿는 자들을 추격하며 괴롭히는 스토킹입니다. 그런데 이 핍박은 그냥 핍박이 아니라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하였습니다. 10절이에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그러면 의를 위한 핍박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잘못으로 인한 핍박이 아니라 11절에 나오는 “나를 인하여 당하는 핍박”입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입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키느라 당하는 고난이고. 예수 믿는 것 때문에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조롱을 당하고 배척을 당하는 고난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데, 만연된 적당주의와 왜곡된 청탁문화로 인한 괴롭힘을 받는 것이고 여기에 휩쓸려 살 수가 없으니까 당하는 핍박입니다. 상사가 부정한 회계 처리를 지시할 때, 신앙 양심에 따라 따를 수가 없어 거부하니 당하는 핍박이고 승진에도 탈락이 되어도 그는 천국을 소유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것만이 아니에요? 복음 전하다가, 사명 감당하다 당하는 핍박도 있습니다. 사도들과 바울 등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이 사명을 감당하다 핍박을 받았잖아요?. 주후 1세기에 하나 같이 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요? 9개월간 옥고를 치루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고, 안드레는요? 사지가 찢겨 X자형 십자가에 달려 순교했으며, 바돌로매는 가죽이 벗겨지는 고문을 받다 선교했고, 바울도 목이 잘려 죽는 참수형으로 순교했습니다. 그 후에도 복음을 처음 들어가는 곳은 예외 없이 순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핍박이 이 고난이 피할 수가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허용하시는 것이기에, 신앙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에 감사인 것입니다. 요 15:18~19절을 통해 주님은 “세상에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세상의 소속이 아니라 예수 소속이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기에 약속된 축복이 있어요. 11절~12절을 다시 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먼저 천국이 저희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큰 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상은 이 세상의 그 어느 상이나 축복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상입니다. ‘즐거워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좋아서 펄쩍펄쩍 뛴다’라는 의미입니다. 왜요? 지금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핍박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장차 얻을 영광은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막달라 마리아요? 간음한 여인이었고 버림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을 만나 행복을 소유하였고, 만나자마자 예수님을 마음에 모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성품을 소유하였습니다. 그녀는 울면서도 행복하였고, 가난하면서도 행복하였고, 실패자가 되어도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복이 있는 자입니까?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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