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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가의 은혜

히 9:11-14

 

 

 

여러분,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종려 주일은요, 영어로 Palm Sunday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날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더라’. 이것은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된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이날을 ‘호산나 주일’이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루살렘 입성에서 메시아 또는 선지자, 왕을 맞아들이는 예식을 거행했어도 그들은 5일 만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기희생의 절정인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종려 주일에 맞는 찬송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으로, 찬송가 254장 ‘내주의 보혈은’입니다. 이 찬송가는요, 믿음의 선배들이 밤낮없이 부르면서, 십자가 앞에서 그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던 곡입니다. 너무 좋아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고 또 부르고 또 불렀던 이 찬송을, 오늘 같이 불러봤으면 합니다. “내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약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아멘

 

 

사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요, 당신이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놓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왕이며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종려 주일 이후의 한 주간이 바로 고난주간인데, 우리는 이 기간에 온라인 특별 새벽 기도회를 가집니다. 다 참석하여 이 한 주간에 십자가로 향하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던 그 길을 우리도 가기를 원합니다. 먼저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가졌던 이 한 주간을 대략 살펴보면, 안식일인 토요일에 벳바게에 도착하셔서 안식일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그러니까 지금으로 하면 주일이에요.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월요일에는 성전을 청결하셨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으며, 화요일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물으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힐문에 ‘세례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하는 질문으로 응수하셨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비유와 악한 종들의 비유를 말씀하셨고, 화요일은 가룟 유다의 반역이 있었습니다. 수요일에 관한 기록은 없어요. 목요일에는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이 목요일 밤에 예수님이 체포되잖아요? 그리고 금요일 새벽까지 심문을 당하셨으며,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고난 겪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토요일에는 무덤에 계셨어요? 그리고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요, 예루살렘 입성을 위해 나귀를 준비시킵니다. 두 제자를 보내면서, ‘맞은편 동네에 가서 나귀를 끌고 오라고’라고 합니다. 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것인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일은 솔직히 제자들에게나 나귀 주인에게나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안 그래요? 제자들이 의아해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나귀 주인도 ‘주가 쓰시겠다’라는 말에 두말없이 내주었어요. 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대해, 마태는요, 구약의 예언, 즉 스가랴 9장 9절의 성취라고 했습니다. 들어보세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무슨 이야기이에요? 예수님이 만유의 주인이시다는 것이고, 나귀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인이시고,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라는 것이에요. 그러기에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얼마든지 선하신 뜻대로 사용하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끌어온 나귀를 타시고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데, 생각해보세요? 그 어떤 왕과도 비교할 수 없이, 높고 위대하시며 영광스러운 왕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온 우주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고, 그 모든 것을 절대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분 아닙니까? 그러니 당연히 위풍당당한 군마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어요. 이유가 무엇이며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로 어떤 왕이신지 보여준 것이고, 군사적이고 정치적 영웅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그들의 기대를 무너트린 것입니다. 즉, 그러한 인간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려고 오신 왕이 아니시므로, 예언을 성취하시고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신 분이시기에, 위대하시면서도 겸비하시며, 인자하시고 온유하신 평강의 왕인 그가 이렇게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죄를 해결해주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길이며, 이 길을 지금 만왕의 왕이 나귀를 타셨던 것 아닙니까? 여러분, 이때는요,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 시즌이었어요.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많은 유대인들과 전국의 많은 유대인들이, 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나귀 위에 얹었고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다 깔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에워싸고 큰 소리로 찬양했는데,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유월절 때 그렇게 찬양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마태는 마태복음 21장 9절에 “앞서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왕으로 영접한 것이었고 메시아로 해방해 줄 왕으로 맞이했습니다. 왜냐하면, 종려나무 가지가 주는 의미가 바로 승리를 상징하고, 이것을 들고 흔들었다는 것이 왕을 영접하는 의식 중의 하나였기에 그렇습니다. 특히 ‘호산나’라고 찬양한 것은 ‘지금 구원하소서’ 또는 ‘원컨데 구원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로 단순한 왕을 뛰어넘어 메시아로 환영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메시아로 알고 이처럼 열렬히 환영했던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성경에 예언된 대로 알지는 못하니까 나중에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메시아와 다르다는 결론을 내려 바리새인들의 충동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아라!”라고 소리치지 않습니까?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이고, 십자가를 향하여 더 가까이 다가가셨던 것을 그들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향하여 쏟아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죄에 대한 참혹한 대가를 대신 받으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셨고, 반대와 시기와 적대감과 음모로 점철되었던 상황을 안고 기꺼이 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천하가 다 아는 불법적인 재판을 통하여, 사형을 선고받으셨으며, 가장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형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은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꺼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것은 ‘페이버’라는 책의 내용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요, 하형록 회장입니다. 그는 전도유망한 남자였습니다. 유펜의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에, 아주 젊은 나이로 유명한 건축설계회사의 중역이 되었습니다. 말 그대로 탄탄한 대로를 걸었던 자에요. 그런데 그가 1991년 가을, 뉴욕으로 가는 고속도로 I-95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병명은 심실빈맥증,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다 호흡곤란으로 쓰러지는 병입니다. 그 이후로 자신에 맞는 심장을 찾게 되는데, 2년 뒤에요? 꼭 맞는 심장을 만나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자기 몫으로 온 이 심장을 뜻밖에 옆방에서 죽어가던 한 여성에게 양보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을 때’에 자신에게 온 선물을 희생해서 이웃을 도운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덕분에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어요. 그때는 아마 주후 30년 4월 7일경일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 복음서 모두가 기록하고 있는데요, 아주 간결한 세 마디로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못박히시니라, 운명 하시니라, 장사 지내니라”. 이 엄연한 역사적인 사건이 불가사의한 사건 아닙니까? 왜요?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죽었다는 이 사실은요,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모순투성이라 할 수 있어요. 의인이 죄인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것 때문에, 그것도 가장 참혹한 죽음의 방식으로,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당한다는 이 자체가 모순이라는 이야기에요.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이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얼굴까지 돌리시잖아요? 그것만입니까? 해도 빛을 잃었고요, 땅도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진동까지 했습니다. 여인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을 했고, 이 전율과 감동이 아직도 식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아닙니까?

 

여러분, 오늘은 종려 주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절기라고 했는데, 바로 이것을 위한 입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는요, 이 십자가에 대한 반응이 없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아니고요. 제가요, 맨해튼의 어느 장로교회에 가서, 설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십자가 이야기를 했었어요. 그리고 예배가 끝나 잠시 친교를 하는데요? 아마 그 교회 수석 장로님인 것 같았습니다. 그분이 제가 다가와 이런 말을 했어요. “목사님, 우리 교회는요, 십자가 이야기보다 우리에게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제가 그 말을 듣고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교회가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니 목사가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것이 과연 교회일까? 이들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왜? 일까요? 답은 십자가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른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내용을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으로 모른다는 말이고, 그러다 보니 영적으로 밤을 맞이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와 은혜를 잘 모르고,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말이고, 이것을 모르는 가운데 당연한 것처럼 교회를 다닌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사실 이것은 불행이고 비극 아닙니까? 십자가의 은혜는 하나님의 비밀인데, 그 깊은 차원은 끝이 없고,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나올수록 끝없이 새로운 은혜를 계속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것을 모른다는 것이고 성령의 도움을 못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이고, 다시 말하면 죄인이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는 말씀에 의하면, 우리 모두 다 죄인이라 그 결과인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 모두 다 죽습니다. 안 그래요? 심판이라는 이야기에요.

 

만 약에요? 경찰차가 여러분의 차를 쫓아온다고 가정해봅시다. 죄지은 것이 없는데도 가슴이 덜렁덜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문제 아닐까요? 하나님의 심판은 정말로 무섭고요, 우리는 다 죄인이기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심판을 면하려면 구원을 받아야 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 즉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꼭 십자가에 죽으셔야 할 특별한 이유이며, 이것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무엇이에요? 이것이 하나님의 답이라는 것이고,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십자가에 예수님이 꼭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요, 구약의 제사를 가지고 지금까지 나눴던 이 사실을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구약에 있는 모든 제사제도는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실 그 죽음을 미리 가르쳐 주고 미리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예표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제사제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원리를 제시하셨는데, 그 원리가 히브리서 9장 22절입니다. 들어보세요? “율법을 좇아 그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무슨 이야기냐면? 피가 없으면 죄 용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죄인이 되므로 인하여 생명을 잃어버렸고, 그래서 찾아온 것이 죽음인데, 이 죽음을 대체할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라는 것입니다. 피가 있어야 하기에 구약에서는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피를 뿌렸고, 죄지은 사람이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면, 그 짐승은 자기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는 사람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제도가 다 일시적인 것이었잖아요? 그림자요,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구약에 대제사장도 사람이기에 죄인이었고, 죄인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입니다. 즉 대제사장으로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에요. 또 구약에 드리는 모든 제사도 짐승의 피, 아닙니까? 그러니까 일시적인 효력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죄를 범할 때마다 자꾸 반복해서 짐승을 잡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불완전하고 일시적인 제사제도를 계속하시기를 원치 않았기에, 때가 되매,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기 위한 준비를 하셨고,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 죄가 없고, 완전무결한 대제사장이, 우리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게 만드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분이 완전한 제사요, 영원한 제사를 위해 짐승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로 한번 드림으로 끝나는 제사를 하였고,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한번 드림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제사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셨잖아요?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희생이었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은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이 돌아가심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이 우리 가슴에 깊이 젖어 들어오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만이 십자가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고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겠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이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에게 영원한 속죄를 안겨주었다고 오늘 본문 12절에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자기 몸으로 제사를 지냈다는 것,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물 때문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즉 한번 용서한 다음에는 절대 회개도 필요 없고, 절대 용서도 필요 없는 완전무결하고, 영원히 유효한 죄의 용서를 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 앞에 나가면, 씻지 못할 죄가 없고, 용서받지 못할 죄도 없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강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약해짐으로 죽음의 고통을 스스로 흡수해 버린 신비한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한번 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전부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 가장 위대한 사건인 십자가를 위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가 종일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고 우리가 종일 죽임을 당하는 자처럼 취급받지만,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능력이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를 내일부터 시작되는 고난주간을 통해서 다시 발견하실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 십자가의 감격, 십자가의 능력으로 뜨거워지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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