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희망이 있다”
(요한계시록 2:8~11)
여러분, 진짜 최고의 바이올린은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서운 인내력을 발휘하였던 나무로 만든 것이랍니다. 그래서 실제로 로키산맥 해발 3천 미터 높이에 가면, 수목 한계선인 지대가 있는데, 이 지대의 나무들은, 매서운 바람 때문에 곧게 자라지 못하고, 하나같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랍니다. 여기에 있는 나무들이 열악한 조건에서 생존하기 위해 무서운 인내력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 나무로 만든 바이올린을 최고로 여긴답니다. 이유는 가장 공명이 잘 된데요. 우리 인생도요? 아무런 고난 없이 편안한 조건의 삶을 산다면 명품이 아닙니다. 온갖 역경과 아픔을 겪어온 자가 명품이 된다는 이야기죠? 고난이라는 이 ‘언어’는요? 인종, 국적, 민족, 성별, 사회적 지위, 연령, 종교와 관계없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고생과 상심과 고난과 슬픔과 비애의 경험을 하나로 묶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요? 고난을 상심과 슬픔과 비애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고난마다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 가운데 구체적인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일반 사람과 하나님 백성과의 차이이에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은요? 고난을 감사하고,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요? 엄청난 고통과 쓰라린 박해를 겪고 있는 이 서머나 교회에게 편지를 쓰고 있어요? 그 편지를 들여다보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서머나 교회의 미래는 암울했습니다. 더 큰 슬픔을 앞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은 그들을 속속들이 아시는 분으로부터 아무런 책망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고, 단 한 마디의 부정적인 말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뭐에요? 칭찬만 받은 교회가 서머나 교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서머나 교회가 무언가 잘못해서 환란을 당한 것이 아니라, 박해 때문에 빈곤해졌어도, 주님은 오히려 영적으로 부자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9절을 볼까요?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먼저 주님의 인정은 “네 환난과 궁핍을 안다”입니다. 여기서 ‘환난’은요? ‘무거운 물건 밑에서 눌려 부서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외부적 핍박을 말하는 것이고, ‘궁핍’도 ‘외적 핍박으로 생긴 물질적인 빈곤’을 말합니다. 왜? 이런 핍박이 찾아왔을까요? 서머나 교인들이 황제 숭배를 거절하니까, 경제적 어려움이 생겼고, 일 년에 한 번 의무적으로 황제를 섬기는 신전에 올라가는 것을 안 하니까 감옥에 갇히고 죽음에 이르는 환난과 핍박이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유대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인들로부터도 심한 박해를 받았어요. 주님은 지금 이들의 훼방도 아신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서머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고, 서머나의 유력한 위치에 오른 자들입니다. 이들은 황제 숭배를 이용하여 거짓된 말로 로마 제국을 충동해서 결국, 서머나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을 처형하게 했습니다. 이들은 사단의 회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에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랑했지만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었다는 것, 사단의 회였다는 것, ‘여호와의 총회’라 했지만, 실체는 사단의 자식이고,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적대자이며, 교회와 복음을 방해하고 교인들을 핍박한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 서머나 교회에 나타나신 예수님의 모습을 요한은 두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처음이요 마지막, 즉 알파와 오메가, 영원하신 분이고, 다른 하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있는 분, 즉 부활의 주님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셨다는 말씀입니다. 8절,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데 여러분, 요한이 말하고 있는 이 “처음이며 마지막이요”이신 이 이름은요? 사 44장 6절의 이름과 동일한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무엇이냐면, 당신이 바로 만군의 주시고, 당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며, 당신이 구원자이고, 또한 성부 하나님 자신과 동등한 권능과 위엄을 지니신 천지의 창조주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처음”이신 성자 하나님은 서머나나 로마 제국이나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기 전부터 존재하셨던 분이고, “마지막”이신 그리스도는 현재의 터키나, 유럽이나 온 세상보다 더 오래되도록 존재하실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영원한 초월자이시며, 그분의 계획과 실행은 과거에서 미래로 영원의 양극단까지 이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희망의 말씀입니다. ‘호스에게네토 네크로스 카이 에제센’ 진정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이요, 완벽한 신성과 참된 인성을 겸비하신 분이기에, 영원하신 분이고 시간 속에 거하시고 만질 수 없는 무한하신 하나님을 우리 유한한 존재들이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사실 때문에, 그래서 우리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보고만 있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서머나 교회의 교인들에게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나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믿는 우리가 히 4장 6절 말씀, 그대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아멘~ 서머나는 에베소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도시입니다. 당시 인구는 약 20~30만 정도이었어요. 그러니까 아주 큰 도시입니다. 소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고 ‘서머나’에서 ‘머’의 의미, 즉 ‘유향’이 향료 수출지이었던 도시입니다.
그리고 당시 철학자 호머의 출생지답게 학문과 특히 과학과 의술이 발달한 도시, 이교 문화와 종교의 중심지, 황제 숭배의 중심지다 보니, 소아시아 도시들 가운데서 지리적으로나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우위를 차지하여도, 복음이 순수하게 전달되지 못하고 박해가 뒤따랐던 도시입니다. 결국, 사도 요한의 제자요,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순교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주님께서 “이제 다 끝났으니 쉬어라”라는 말씀을 하실 것 같은데, 더 많은 고난이 닥쳐올 것을 예고하고 있어요? 10절을 볼까요?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여기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라고 하시면서, 곧 있게 될 고난을 상기시키고 있고, 두려워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서머나 교회의 신자들이 장차 임할 핍박과 고난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하였기에 그렇습니다. 즉 박해와 궁핍과 비방에 대해 두려움으로 반응한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고, 큰 곤욕을 치르고 나면, 무력하고 나약하게 움츠러들 수 있고, 결국 완전히 신앙을 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아신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말로만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주님은 이어서 교회를 박해하는 진짜 배후 세력을 밝혔습니다. 그가 누구이에요?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그러니까 핍박의 가해자는 유대인들도 아니고, 로마인들도 아니고, 불가피한 운명의 수레바퀴도 아니고 진짜 적은 사탄, 핍박의 주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였다고, 이 마귀가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사람을 감옥에 넣을 것이라고, ‘시험을 받게 하리니’라면서, 시련을 통해서 ‘시험하다’이라는 것, 그러기에 감옥에서 받을 온갖 고난이나 핍박을 감수해야 한다고, 순교에까지 신앙을 증명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요? 이 닥쳐올 박해가 비록 심할지라도 그 범위를 제한하였습니다.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이것은 짧은 기간을 나타내는 셈어적 표현입니다. 사탄이 비록 허락을 받아 교회를 박해할지라도, 욥이 고난을 겪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쩌면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영적 국가대표급 인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약에서는 요셉, 모세이고요. 신약에는 바울, 베드로, 스데반, 그리고 서머나 교회 교인들이라 봤습니다. 이들은 영적 부상인 고난과 핍박을 이겨내고 승리의 메달을 딴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영적 국가 대표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있어요? 그것은 첫째로 우리 예수님은? 시련을 예고하신 뒤, “잘해보라”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무심하게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반응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서머나 교인들에게 설사 그들이 죽기까지 박해를 당해야 한다 할지라도 “생명의 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있고, 약 1장 12절처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 두 번째는 영적 전투에 시달린 서머나의 신자들은 이 진리를 다시 들을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적당히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적당히 살면? 핍박이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는 국민의례라고 하면서 참배한 목사들이 많았고 성도들을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어떤 신에게도 절하지 말라는 말씀을 따라 신사참배를 거절한 분들은 엄청난 박해와 순교를 당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884년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래, 약 2,300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왜? 영적 전투에 시달린 서머나의 신자들이 이 진리를 다시 들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박해를 당연히 여기는 믿음이 그들에게 필요하였기에 그렇습니다. 이 믿음을 가짐으로 박해를 받을 때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박해한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내가 못나서,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라는 자책이 아니라 완벽하셨던 예수님도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는 것, 이 믿음으로 결국 최후 승리를 얻는다는 이 사실에 머물기를 원하였습니다. 사도들이요? 공회에 잡혀가서 많은 채찍을 맞고 협박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석방되었는데, 그들은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하게 여겼습니다. 행 5장 41절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무슨 이야기에요?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은 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주심을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박해를 받음을 당연히 여기고, 승리에 대해 확신을 하는데, 박해를 받을 때, 두려움이 생기지만,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의 부탁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의 순교자들이 순교하기까지 충성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드러냈던 것처럼, 서머나 교인들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야 함을 시사하신 말씀입니다. 사실 당시 극심한 황제 숭배 강요 속에서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던 교인들을 향한 단호한 명령이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은요? 죽기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진 상급입니다. 온갖 핍박에서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입니다. 우리도 이 상급을 받기 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1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여기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라는 약속은 앞 절에서 언급된 생명의 면류관과 연결된 것으로 승리자에게 주어진 약속이고, ‘둘째 사망’은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 곧 영원한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최후에 비그리스도인이 당할 불 못 즉 영원한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약속이 순교에 직면한 서머나 교인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고, 박해가 아무리 심해지고 교회가 견뎌야 할 상황이 무엇이든, 그리스도의 약속은 그들에게 견디는 힘을 주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우리 주님이 우리의 형편을 자세히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했던 비극도 아시고 계시고, 승리, 모든 죽음과 삶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겨운 환난도, 우리의 처절한 궁핍도, 우리가 듣고 있는 쓰라린 비방도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에 능히 공감하시기에 이제 낙망이 아니라 일어나는 우리가 되시기를 우리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히 4장 14~15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런 찬양이 있죠?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두 번째는 힘든 상황이 지속되거나 더 심해져도 두려워하거나 달아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서머나 교회가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은 “환난이 끝났다, 최악의 상황이 다 지나갔다, 수고 많았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최악의 상황이 장차 올 것이라는 경고였습니다. 왜? 이 말씀일까요? 이 시련 속에서 우리 주님이 함께하시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죽는 날까지 버리지 않으시기에 그렇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죽음은요? 모든 환난과 비방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삶으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 13장 5~6절이 우리에게 약속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지금 고통 가운데 계십니까? 환난이나 시련이나 고생 가운데 계십니까? 그 가운데 주님이 계시고, 그 속에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고, 그분의 임재가 여러분에게 초자연적으로 견딜 힘을 주십니다. 그러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 41장 10절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