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은 이세벨 일당이다”
(요한계시록 2:18~29)
여러분, 이 뉴욕과 아주 가까운 도시는 뉴저지에서 포트리, 에지워러, 위아켄, 호보켄일 것입니다. 그렇죠? 특히 이 도시들은 그래도 잘 알려진 도시이에요? 하지만 톰스 리버라든가, 플레인 필트라는 도시에 대하여 들어보셨나요? 이 도시들이 뉴저지에 있어도 모르는 도시입니다. “두아디라도”요? 주변의 크고 유명한 도시들에 가려진 작은 도시입니다. 태양신 트림누스의 신전이 있었고, 특히 이 신의 특징이요? 마치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묘사된 신입니다. 상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 길드라는 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이 길드가요? 사회생활과 종교 생활의 깊은 중심을 잡고 있다 보니, 화이트칼라보다는 블루칼라가 강한 도시이었습니다. 이 상황이,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자리 잡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업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이 길드에 가입해야 했고, 이교의 종교적 의무도 해야 했기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길드에 가입하지 않는다? 그러면 시업도 할 수 없고, 결국, 생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특정 명사, 이 이세벨은요? 길드에서 행하는 이교의 의식들에 그리스도인들도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이론적으로 잘 가르친 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관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죄책감이 있었던 자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관용이 뭐에요? 내 나름의 관점을 고수하되, 남들도 그들 나름대로 믿고 살아갈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 이상해도 그들이 법 테두리 안에서 행동하는 한, 용납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상대방의 태도와 행동도 존중하고, 신념과 가치관이라는 생활방식의 옷을 찬성하도록, 때론 힘과 법으로 강요합니다. 이 미국에서 요즘 종종 발견되는 부분 아닙니까? 한 예로요? 2년 전 이야기입니다. 동성애에 반대하는 트윗을 올렸다는 이유로 팀에서 방출된 미국 프로야구(MLB) 선수가 있어요? 그의 이름은 맷 더모디, 신실한 기독교인입니다. 2년 전, 보스턴 레드삭스와 계약한 투수인데, 그가요? ‘두려움 없는 토미 라렌’라는 팟캐스트에 출연하여 이야기한 것을 트윗에 올린 것이 팀으로부터 방출되었습니다.
고전 6장 9절을 인용하여,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지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적었고, “우리 모두 마음을 살피고, 예수님께 용서를 구하며, 모든 죄를 회개하기를 바란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 모두를 사랑한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트윗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어요. 그리고 결국 팀에서 방출되었습니다. 그는 매니저에게 “나는 누구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의 목록을 보았고, 나도 그 목록에 있었다”라며, “그것은 내 안에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나만 문제가 아닌, 다른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지옥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좋은 소식을 전파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미국이요? “소년이 자신을 소녀라고 생각하고, 소녀가 자신을 소년이라고 믿는 큰 정체성 위기로 괴롭힘을 받고 있다”라는 현실을 아파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관용이라는 큰 집에 머물면, 다 이해되고, 이 문제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 그래요? 하지만 관용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어려움이 생겨요? 주님이요? 오늘 본문에서 이 작은 교회가 죄를 관용하는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18절이에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여기에서 주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고 있어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시며 심판 주라는 말씀, 그리니까 심판 주로서의 모습이요? ‘그 눈이 불꽃 같고, 발이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모든 권능과 권세를 지니신 분이고, 이 교회의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까지 다 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있다?” “없다?” “없다” 입니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도전하는 악한 원수의 세력을 의로운 판단에 따라 발로 밟으실 능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말씀, 죄악을 회개하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리고 있는 자들을 각성시킬 수 있는 거룩하고 엄위에 찬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두아디라 교회의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있어요? 19절입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 교회의 신실한 성도들을 칭찬하셨어요?, 그것이 사업, 사랑, 믿음, 섬김, 인내이었고, 바꿔 말하면, 그만큼 신앙의 성숙이 있었다는 말씀입니.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던 에베소 교회와 달리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더 많았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하지만, 이어서 치명적인 문제점을 거론하세요. 20절,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문제가 뭐에요? 이세벨을 용납하였다는 것이에요. 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자칭 선지자라고, 아마 두아디라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뭐, 신학자도 되고, 좋은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 자도 되겠죠? 그러다 보니 그를 교회 일부들이 잘 따랐고, 믿었고, 그의 가르침도 잘 받아들여, 어두운 죄가 암처럼 숨어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그와 같이 지냈다는 것입니다.
즉 선한 부류와 악한 부류와 추한 부류가 교회 안에서 관용이라는 옷을 입고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 열왕기상 16~21장에 언급된 이세벨과 비슷했다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 고전 8장 5절에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라는 이 말씀을, 비틀어서, 우상 제물도 먹고, 복음을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오해로 유도하여, 성적 부도덕, 즉 길드가 요구하는 것에 빠지게 했습니다. 궤변적인 ‘독립’의 교리죠? 두아디라의 “이세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예요? 하지만 멀리 볼 필요도 없이 서울 서머나 교회 김성수 목사 이야기를 해봅니다. 많은 성도가요? ‘김성수 목사의 설교’에서, 인생의 답을 찾았고, 한국 교회목회 자가 얼마나 잘못된 설교를 하는지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설교는요? ‘인생이 너무 허무하고, 우울감이 강함’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세상에 소망이 없는 허무한 사람으로 몰아가요? 결국, 그는 자살로 마감했라려? 이것이 올바른 하나님의 백성입니까?
영지주의 주장처럼, 경제와 경제적 여유를 짐승의 세계, 마귀의 세계로 단죄해 버리는 것이 올바른 것이냐는 것이에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의 삶을, 극단적으로 존재가치가 허무주의가 되도록 유도하고, 설교를 들을수록, 세상의 삶의 무가치로, 모든 수고를 허망하게 만든 이것이 올바른 것이냐는 이야기이에요. 그리고 자신의 집 화장실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한 그입니다. 희한한 것은 그가 죽었는데, 성도는 현재 700명 이상이고, 아직도 그의 영상 설교를 계속 듣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상일까요? 저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하고 영혼이 병들게 만드는 이가 바로 이세벨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보세요? 본문에서 주님은요? 이 이세벨의 신앙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처지에 놓여 있는 교인들에게,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예요? ‘회개’이에요. 그런데 결과가 거부였다는 것입니다? 21절,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요? 더욱 강하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22~23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뭐에요? 이세벨의 행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구약 시대의 이세벨로 인하여 백성이 지은 죄와 그로 인하여 당한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이 얼마나 무서웠던가를 상기시키고 있어요? 관용의 결과 아닙니까? 사실 두아디라의 상황은요? 세상의 거센 압박입니다. 생계가 달린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만 했었어요. 우상 숭배를 거부한 성도들은,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야 했었고, 우상 숭배를 하며 편안하게 잘 사는 사람들을 어쩌면 부러운 눈으로 계속해서 바라봐야만 했던 문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버젓이 있었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도, 이 이세벨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라고 하면서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는 성도들을 죄에 빠뜨렸습니다. 마치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이 사용했던 전략처럼, 죄와 싸우는 성도들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두고 주님의 말씀은 24절에서? 꽤 흥미로운 말씀을 하십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일까요? 이세벨의 말을 따르지 않은 성도들에 대해서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는 매우 독특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의미는요? 순수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깊은 것’, 이것을 “스스로 사용한 표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탄의 깊은 것을 아는 사람들처럼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길드의 축제에 참여하는 정당함에 이른 행위이고, 이것이 결국 사탄의 깊은 것을 알아가게 함으로, 그 뿌리인 영지주의적 사상이 물들게 한 모습 즉 몸과 영은 분리되어 있어서 몸으로 하는 어떤 일도 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이 사상, 아무리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영적으로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결론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가르침을 했고 이것을 용납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즐기는 사회 문화를 그리스도인도 즐긴다면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 가르침에 두아디라 교회가 솔깃했어요?
논리적인 것 같아 선택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처럼 들렸기에, 이교의 문화를 자행하는 길드의 축제에 참석하는 것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굳이 생계를 걱정하면서 길드에서 나올 이유도 없었고, 두아디라 성도들이 원하던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니까,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니까 용납, 관용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책망이 그래서 이 이세벨을 교회가 용납했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면, 좀 더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지지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회개할 기회를 충분히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거절했기에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에요? 침상, 즉 병이고, 환난이고, 사망입니다. 즉 ‘심판의 무거움’입니다. 이 경고의 말씀에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세벨은요? 더 이상 이 땅에 없어요. 하지만, 이런저런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죄에 대해서 관대한 태도, 죄를 정당화하는 이것은 지금도 많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허울 좋은 변명이 필요 없어요. 사는 길은요? 주께 나와 회개하는 것입니다. 요일 1장 9절 말씀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회복이 임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리라.” 우리 행위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회개한다면 그 행위에 대해 보상하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행위를 벌하실 것이라는 말씀, 우리가 죄에 관대하고 내 삶을 내가 편한 대로 즐기려고만 한다면, 회개할 기회를 지금 주심을 기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요? 잘못할 때마다 순간순간 회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기는 자들에게 이 약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26~28절,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이기는 자, 주님과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말씀이고, 당신의 재림으로 현실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다스릴 권세를 자신에게 주셨던 것처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과 함께 다스릴 권세를 주시겠다는 약속, 새벽 별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다스리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멘. 이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신실하게 주님의 일을 지키며 이기는 삶은 쉽지 않아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에요. 편하게 사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흔들리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흔들려 타협의 자리, 관용의 자리를 허락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요? 우리 주님이,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 마음도 아시고 계신다는 것, 우리가 세상 속에서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어리석다는 말을 들어도, 우리의 답답함을 알고 계시고, 연약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섬기며 인내하는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어요? 뭐에요? 두아디라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에요. 죄에 관대해지면요? 그만큼 삶은 편해지고, 더 성공할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도 있고, 어쩌면 교회도 커지고? 헌금도 더 많이 나오고? 봉사할 기회도 더 많이 생기도, 결혼도 쉬워지고, 직장 생활, 학교생활, 모든 면에서 더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고, 우리 삶에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잖아요? 그러기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죄에 대하여 싸우고, 여기에서 생기는 불편함이 있어도, 손해를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주의 멋진 용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