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강해 #17
“비극을 승리로 바꾸시는 하나님”
(계 11:1~14)
오늘 말씀의 제목은요? “비극을 승리로 바꾸시는 하나님” 입니다. 여러분, 시대마다 영웅들의 특징이 있어요? 그것은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난공불락의 역경을 참고 이겨낸 평범한 개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 호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 미국의 희극배우로 워낙 유명하고, 코미디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모든 면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지만, 젊은 시절에 이름 없는 권투선수로서 한 달에 겨우 200불쯤 버는 가난뱅이였습니다. 하지만 난공불락의 역경을 참고 이겨내어 시대의 영향을 끼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슈베르트는 어떻고요? 가난에 지쳐 31세에 죽었던 그야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음악가인데도 죽는 날까지 피아노 한 대가 없는 음악가였고, 오선지 한 장 없는 레스토랑의 웨이터로 지내면서 훌륭한 곡들을 남겼던 인물입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어떻고요? 해군 장교로 있다가 부정에 개입되어, 옥살이했던 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되었던 계기였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 다, 무엇이에요? 약점을 극복하고 훌륭한 목표를 이룬 이들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원래 약자들이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요? 당해내기도 힘든 위압적인 세력에 맞서는 ‘약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약자들의 특징은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늘 본문도요, 하나님이 이 약자들을 보호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이 큰 골자입니다. 특히 본문에 나오는 두 선지자, 그냥 “두 증인”이라고 부르는 이들 또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세대 속에서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던 약자라는 사실입니다. 비극을 승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은요? 여섯 번째 나팔과 일곱 번째 나팔 사이에 등장하는 내용이고, 10장의 내용에 이어서 11장 중반까지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11장 후반부에는 일곱째 나팔을 통해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왕권을 기대하게 만드는 장으로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설정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설정을 앞 장인 10장에서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고, 입에는 꿀 같이 달고 배에서는 쓴 두루마리에서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큰 기쁨이었지만, 그 말씀을 증거 하는 삶이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말씀을 만났는데, 오늘 본문도 현대의 잣대와 비슷한 갈대를 건넨 설정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2절을 볼까요?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먹은 요한에게 이제는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면서 측량하라는 하신 것입니다. 갈대이면 갈대이고 지팡이이면 지팡이인데, 지팡이와 같은 갈대라고 하시는 오묘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지팡이에 대한 의미는 양을 치는 목적이 있고, 다른 하나는 심판을 할 때 사용되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지팡이와 같은 갈대는 ‘측량 도구’인데, 헬라어로 ‘메트로손’입니다. 치수를 잰다는 의미의 단어로 보통 치수는 양복을 맞출 때나 집을 지을 때 재잖아요? 이 의미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 경배하는 자들”을 재라고 하셨습니다. 왜? 일까요? 파괴의 목적으로 재라 하셨을까요? 아니면 완성의 목적으로 재라 하셨을까요? 궁극적으로 완성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측량하고자 하는 성전은 이미 파괴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이 환상을 받은 때가 AD 96년경이고, 몇 달째 굴속에 지내고 있는 자신이 보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이 이미 25년 전에 티토 장군, 즉 로마인들에게 초토화된 것을 잘 알고 있는데 측량하라고 하시니까, 의아해하지 않았겠어요?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것은 환난 중에 세워질 미래의 성전을 말하는 것이고, 중동 지역을 중심으로 온 세상에 유례없는 긴장이 팽배해질 그 시기에 재건될 성전을 말하고 있으며,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참 성전 된 우리들 곧 교회를 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초림과 재림 사이를 살아가고 있는 이 말세의 이 지상교회를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게 하겠다는 것이고,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그 약속을 붙들고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신다는 것이고, 고난과 고통을 받는 현실의 교회가 다치기도 하고 때론 죽기도 하고, 불신자들에게 짓밟혀 모욕과 수치를 겪어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빼앗을 수 없게 하실 것이고, 보호하신다는 견고한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측량하라고 하신 것은 징계가 아닌 소유로 확정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한 측량에 관한 것으로 끝까지 보호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요한에게 건축용 기구인 갈대를 준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은?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계속 보니까 이곳을 누구에게 주었다고요? 이방인, 여러분, 유대인의 성전에는 두 개의 공간이 있는데, 하나는 안뜰이고, 다른 하나는 바깥뜰입니다. 안뜰은 제사장과 유대인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바깥뜰은 유대인이 아닌 사람, 즉 사형 선고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성전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지점이 그곳입니다. 이 말은 성전에서 예배하는 사람보다 제외된 사람들이 수적으로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소수의 남은 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계획을 능히 이루시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바깥뜰에 있는 그들이요? 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즉 3년 6개월 동안 짓밟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세요? 즉 “거룩한 성을 짓밟도록” 허용하실 기간을 미리 제한해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짓밟은 것이 허용된 것이 무엇일까요? 계시록 13장 5절에,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이 바깥뜰에 있는 이들, 미래의 적그리스도와 그의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적들에 넘겨진 후에 하나님의 두 증인이 펼칠 역동적인 사역에 카메라와 조명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3절부터 13절까지이에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증인에 대한 말씀이 이어지는데, 이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권세까지 주신다고 했어요? 그들의 복장은 통곡의 복장인 베옷을 입고 얼마 동안? “천이백육십 일” 동안 예언한다고 하셨습니다. 3절을 볼까요?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일을 예언하리라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그러면 여기 두 증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학자는 모세와 엘리야라 하고, 누구는 에녹과 엘리야라 하고, 누구는 베드로와 바울, 야고보와 요한으로, 심지어 AD 68년에 로마인들에게 살해된 두 제사장이라고 하지만, 저는 교회로 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계시록 1장 20절 마지막에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라는 이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두 촛대’는 바로 ‘교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권세를 받아 “천이백육십 일, 즉 3년 반 동안” 예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언하는 이 기간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받는다는 것이고, 특별한 권능을 받아 악한 적들에게 재앙과 심판을 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말씀이 4~6절입니다.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무슨 이야기냐? 한마디로 말하면, 신약시대의 교회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고, 교회의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데모하고 힘을 가지고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나라가 잘못 나감에 침묵하고 수용한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서 왜 내 삶에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머문다면 교회가 무엇 때문에 존재합니까? 교회는 전투 중입니다. 무엇이에요? ‘아직 우리는 전투 중이다’라는 상황을 인식하고, 아무리 세상의 공격이 거세게 몰아쳐도 하나님께서 측량하게 하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그 백성의 믿음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며 승리의 그 날까지 묵묵히 주어진 증인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굵은 베옷은 슬퍼하며 입는 옷이고, 이 땅에 임할 재앙을 슬퍼하며 선포하는 선지자의 사명처럼 교회가 천이백육십 일 곧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일을 제대로 감당할 때 증인 된 교회가 어떠한 교회인지, 우리 사랑의교회인지, 누군가 교회를 해 하고자 하면,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고, 즉 렘 23장 29절의 말씀대로,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라 하듯이, 교회를 통해 전해지는 말씀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원수들에게 사망선고와 같은 경고의 말씀이 되게 하고,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 즉 전해진 말씀을 무시하고 교회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세상이 맞게 될 심판을 경고하게 하는 파수꾼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어진 말씀을 보니까 박해와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7~10절,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칠 때,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하고 이겨 두 증인을 죽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체가 큰 성 길에 있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영적으로는 소돔, 애굽, 또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죄악이 가득한 도시,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헛된 우상숭배와 하나님 없는 문명으로 채워진 세상 나라,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내쫓아 못 박아버린 예루살렘에 시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두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원수로 행한 장소에, 자신들이 왕이 되어 재판석에 앉는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피고석에 두어 정죄하는 곳에 던져진 시체들이 사흘 반 동안 무덤에 장사하지도 못하고, 길에 버려져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다는 것이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낸다고 합니다. 즉 이 땅에서 교회가 당하게 될 핍박과 고난 특히 교회를 천대하는 세상의 공격이 있을 것이고, 교회의 고통을 즐거워하고 조롱할 세상이 온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이유로 길가에 버려진 시체와 같은 취급을 당하며 생명의 위기 가운데 살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요? 그러면서 이어진 말씀이 11~13절입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여기 ‘삼 일 반 후에’는 결국, 교회를 핍박한 이 세상 나라들의 즐거움이 오래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삼일 반 후에 오래되지 않아,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두 증인에게 들어가 발로 일어서자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역사 가운데 수없이 많은 핍박과 고통을 당했으나 성령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그 생명을 유지하였고, 앞으로도 유지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후 승리의 그 날 하나님께서 ‘이리로 올라오라’ 말씀하셔서 영광중에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 그러면서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반대로 ‘큰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 멸망과 심판을 경험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지진으로 인하여 죽은 칠천 명을 제외하고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렸다고 말씀이 있어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잃어버린 자들, 돌아와야 하는 자들, 돌아오기를 원하는 자들이 돌아오도록 자비를 베푸신 것이고 이것을 교회가 증인 된 삶을 계속해서 걸어가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땅에 회개할 자들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 우리가 이 ‘증인’의 삶을 살라는 주님의 부탁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이 삶은 누군가가 생명을 얻고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게 할 삶입니다. 우리를 증인으로 부르신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각자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신실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랬을 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 여러분의 약점은 강점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여러분의 비극은 결국, 승리로 변화될 것입니다. 왜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각자에게 주어진 삶에서 두 증의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