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향한 갈망
(요 1:43~51)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주를 향한 갈망”입니다. 사랑의 시작은 갈망이라고 하죠? 그래서 ‘무엇을 갈망하며 무엇을 사랑하는가’는, 결국, 그 사람 삶의 내용을 결정합니다. 에콰도르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떠났던 미국의 선교사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이요? 선교지에 도착해서 제대로 선교일정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처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그들에게 권총이 그대로 있었다는 점이에요? 충분히 총으로 목숨을 보호할 수 있었지만, 구원받지 못한 저들의 영혼들을 위해 총을 사용하지 않고 순교하였습니다. 무엇이에요? 이들이 주를 만나 구원받기를 원하는 갈망이 가득했습니다. 이 갈망은 빌립과 나다나엘에게도 가득했습니다. 빌립에게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갈망하여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의 말에 나다나엘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무엇이에요?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은 모를까, 나사렛은 주목할만한 동네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빌립은 “와서 보라”고 전했고, 나다나엘이 예수를 만나보겠다고 생각으로 옵니다. 나다나엘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죠?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무엇을 말합니까? 나다나엘을 크게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에게 간사하지 않은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덕담이 아닌 말씀입니다. 이에 나다나엘은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나다나엘의 질문에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말하기 전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이미 알아보았노라고 답하시니까, 나다나엘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예수님의 몇 마디 말만 듣고 이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이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보다 먼저 한 고백이고, 신앙고백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앞으로 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나누면서 2023년 마지막 주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나다나엘이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냐고 따졌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에게 단 몇 마디만 나눴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있었기에 이 고백을 하는 것일까요? 그 중심에는 알 수 있는 것이 두 가지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빌립이 부르기도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나다나엘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나다나엘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더 큰 일을 보리라고 약속해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먼저 ‘참 이스라엘 사람, 간사한 것이 없도다!’를 봅니다. 47절과 51절,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리고 51절,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와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생각나십니까? 야곱이죠? 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얻은 새 이름이 “이스라엘” 아닙니까?
천성이 이름처럼 간사한 자, 누군가를 속이는 인생을 살았던 자이고,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과 외삼촌 라반을 속여, 자신의 재산을 늘렸던 사기꾼 기질의 사람, 그가 얍복강에서 하나님 만나고 간사한 자에서 진실한 사람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주님이 보시기에 나다나엘은 참으로 진실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무엇이에요? 예수님을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나다나엘이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를 알고 계셨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다나엘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하니, 안 그래요? 그래서 그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지 않습니까? 이런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나다나엘의 마음과 영혼에 곤고함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곤고함으로 발버둥 치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마음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기를 바라고 원함은 있지만, 자기 자신의 거짓과 위선에 괴로워하며 때때로 눈물을 짓곤 했던 게 아닐까? 어느 날,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하나님께 마음으로, 영으로, 눈물로 그러한 괴로움을 호소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다나엘이 하나님께만 쏟았던 마음과 괴로움, 눈물을, 근본 본체 되신 예수님께서 보아주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간사한 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기뻐하는 이유가 무엇이에요?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거짓 없는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임을 우리 주님은 이미 알아보셨던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감찰하시고, 우리의 깊은 속까지 들여다보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른 하나는 보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어요? 48절을 볼까요?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러면 나다나엘은 무엇 때문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갔을까요? 이스라엘은 무더워서 나무 그늘에 가면 시원하기에 갔을까요? 그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서 쉬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조용히 묵상하지 않았을까? 로마의 압제에서 나라를 구원해달라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기다리며 기도했지 않았을까? 그래서 조용히 혼자 하나님께 나가 무화과나무 아래 사람이 되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나다나엘을 특별히 주목하셨던 것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은 특별히 여러분을 주목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냐? 무화과나무 아래는 하나님을 특별히 찾고 있는 시간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날마다 세상을 떠나 은밀한 장소로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그 장소가 침실이라도, 주위의 소음들이 당신의 마음에서 희미해지고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의식이 뒤덮을 때까지 그 은밀한 곳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이 자리에 나와 내면에 울리는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리가 영원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응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에, 이 성전이 무화과나무 아래요 하나님 앞에 잠잠히 엎드릴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는 말에 너무 놀라서 예수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하고 외칩니다. 무엇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기도하는 자신을 너무도 분명하게 꿰뚫어 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남몰래 홀로 거룩한 고독 속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에 특별히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주목하고 살기를 원합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과 대면함으로 옹졸한 성경 지식이 깨졌고, 신앙 경험도 산산이 조각났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외쳤던 그 입술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에게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내가 보았노라 하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하나는 믿는 자에게 더 큰 일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50~5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무엇이에요? 믿는 자에게 더 큰 기적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리고 무엇이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일까요? 믿는 자에게 더 큰 일이 임하는 것, 그것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예수님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축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시는 기적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2024년에 이 은혜가 넘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더 큰 일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네가 믿느냐?”라고 물을 때, “내가 믿습니다”라고 답한다면, 여러분의 2024년은 예수님께서 더 큰 일을 보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진실한 사람은요? 참 이스라엘처럼 신실한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신다면요, 나다나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 자주 가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전에 나와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무엇이 갈망입니까? 간절히 바람이 바로 갈망 아닌가요? 다윗의 마음을요? 평생 만족시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부모에게는 버림을 받았고, 친구도 없었고, 형제들도 다윗의 마음에 사랑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성의 첫사랑인 미갈도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친밀한 애정도 다윗의 가슴을 채우지 못했어요? 아비가일은 지혜로운 여자였지만, 온전한 여자 아니었고, 밧세바도 다윗을 매혹했으나 진정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마지막 죽을 떄 압살롬을 많이 사랑했지요? 그러나 사랑한 아들로 인해 왕궁에서 쫓겨나고, 그것 역시 진정한 사랑이 아님을 배우게 됩니다. 다윗의 유언은 무엇입니까? 인생에는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추구, 우리의 존재 이유도 바로 예수님입니다.
야곱은 어떻고요? 라헬을 사랑하고 요셉과 베냐민을 사랑했으나 사랑한 사람마다 자신의 곁을 떠나고 마지막으로 베냐민을 내려놓아야 했을 때 절규했지 않았습니까? 나중에 그의 고백은 “오직 주님이다”라고 합니다. 다윗도 메마른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의 사랑이 궁극적으로 가장 귀하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이렇게 외치지 않습니까? 롬 8장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주를 갈망함으로 입술만의 찬송이 아니라, 평생의 찬송으로, 그리고 손을 드는 몸짓이 동반되는 찬송으로 확장되어,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기쁨으로 채워지는 역사가 가득하기를 소원합니다. 룻기 1장 14절에 보면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좇았다고 했습니다.“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이것은 ‘가까이 따르니’입니다. 우리에게 다윗처럼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가 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2023년은 분주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분주하게 살아가다 보면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깊은 갈망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혹시 하나님이 심어 놓으신 깊은 갈망을 잊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때론 강제로 인생의 광야로 데리고 나가시죠? 왜? 그렇게 하세요? 우리 영혼의 깊은 갈망을 보여주시려고, 호세아서 2장 14절 말씀대로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그렇게 하십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 있는 주를 향한 갈망을 발견하고 주께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 안에 있는 그 갈망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저 힘든 상황만을 봅니까? 하나님의 광야 효과를 경험했습니까? 아니면 광야에서 마음이 강퍅해졌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졌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보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더 잘 알고 싶은 열망도 있습니까? 성령님을 더 강력하게 체험하기를 사모하십니까?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는 그 영혼이 만족하고 배부름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갈망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부르는 찬양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우리 갈망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2024년에 가득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