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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도 UPDATE가 필요합니다

(행 19:1~10)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면, 계속 앞으로 가는 것이 발전이 아닙니다. 돌아서서 바른길로 되돌아가는 사람이 가장 빨리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앞으로만 가면 발전이라고 생각하죠? 오래 믿었으면 믿음도 깊어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배를 많이 드렸으면 영혼도 성숙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분을 오래 감당했으면 하나님을 더 잘 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오래 걸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요? 어느 방향으로 걸어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여 어떤 제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제자라고 여겼습니다. 세례도 받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들의 신앙 연수도 얼마나 오래 믿었는지도, 무슨 직분을 가졌는지도 묻지 않고, 바로 그 믿음의 중심을 찌르는 질문,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를 던졌습니다. 이 질문 앞에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라고 답합니다.

 

 

믿는다고 했지만, 성령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고, 제자라고 불렸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 요한의 세례, 회개를 촉구하는 준비 단계에는 머물러 있었지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께서 주시는 새 생명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거기서 멈추어 버린 것입니다. 출발은 했지만, 목적지에 이르지 못했고, 이전 단계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업데이트란 복음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대에 맞게 고치는 것도 아닙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낡아진 나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은 업데이트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도 업데이트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업데이트되어야 할 것은 말씀을 듣는 우리의 귀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며, 복음 앞에 순종하는 우리의 삶입니다. 오래된 컴퓨터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감당하지 못하듯, 굳어진 마음으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오늘 말씀 앞에 세우시고 이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정말 복음을 알고 있느냐?” “너는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 “너의 믿음은 오늘도 살아 있느냐?” 이것은 우리를 정죄하려는 질문이 아니라 다시 살리시려는 질입니다. 에베소의 제자들은 자신들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바울이 안수하자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이 내용이 담긴 오늘 본문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이 업데이트되어야 하며, 그 믿음이 어떻게 성령의 생명과 말씀의 능력으로 새로워지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복음 자체를 업데이트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복음은 이미 완전해요?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십자가의 진리가 바뀌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무엇을 업데이트해야 하냐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업데이트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변하지 않는 복음을 더 정확히 알고, 그 복음이 오늘 우리의 생각과 삶을 새롭게 다스리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1절입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바울은 지금 제3차 전도 여행 중임을 말하고 있어요?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지나, 로마제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 항구와 상업의 중심지이며, 특히 아데미 여신 숭배와 주술 문화가 깊이 자리 잡은 이 에베소에 들어왔습니다. 무작정 온 것이 아니라, 오겠다는 약속, 18장 21절에 나오죠? 제2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고린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길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에베소에 잠시 들러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자, 사람들은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그때 머물 수 없었기에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라고 약속하며 떠났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먼 길을 지나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을 잊지 않은 것이고, 그곳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남겨 두고, 하나님께서 길을 여시는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돌아와 짧은 방문으로 끝내지 않았다는 것, 그곳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던진 질문이 바로 2절입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만난 어떤 제자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물었더니,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다”라고 답하여 다시 물어요? 3절,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냐?”라고 물었더니, “요한의 세례니라.”라고 답한 것, 즉 세례요한의 가르침만을 알고 있다는 답입니다. 세례요한은 위대한 선지자이고, 백성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던 자, 주의 길을 준비하라고 선포했던 자의 자리, 즉 회개도 알고 있고, 메시아가 오실 것도 알고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는 답을 하니까 그래서 복음을 설명한 내용이 바로 4절입니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요한이 가리켰던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었다고 전하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요한은 오실 분을 준비하라고 외쳤다, 그러나 복음은 그분이 이미 오셨다,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회개하는 죄인의 값을 담당하셨다, 요한은 길을 준비했지만, 예수님은 친히 길이 되셨다”입니다. 회개는 알았지만, 십자가의 은혜를 몰랐고,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알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5~6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그들이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안수하는데 성령이 임했고 방언과 예언의 은사까지 나타났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세례요한의 준비 단계에 머물던 사람들에게도 온전히 전해진 것이고,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부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오늘 본문이 그랬다고 해서 모든 성도가 반드시 방언이나 예언해야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지역으로 전해질 때 성령께서 눈에 보이는 표징을 주신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핵심은 세례요한의 가르침에 머물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고,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 없이는 누구도 진심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거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령의 내주’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신다는 것과 내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도요?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이 아니라 내 고집이 꺾이고 예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감정이 뜨거워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하고, 탐욕을 내려놓고, 거짓을 버리며, 맡겨진 자리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예수님의 성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분노에 끌려가고, 욕심에 지배받고, 미움을 품고 살아간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령의 다스림을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한 번의 사건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사는 것은 날마다 계속되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성령을 이용하여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다스리셔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믿음의 업데이트는 말씀을 배우고 순종할 때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8절입니다.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를 전했습니다. 설명하고, 질문에 답하며, 사람들이 복음을 이해하고 순종하도록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9절에 모든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무슨 이야기에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만 그치지 않고 마음이 굳어졌다는 것이고, 순종하지 않았으며, 결국 복음을 비방했다는 것, 복음 전파의 훼방이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요? 복음을 몰라서 믿지 못하지만, 순종하기 싫어서 복음을 거부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정보를 하나 더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왕좌를 바꾸라고 요구하기에 싫은 것입니다. “네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네 생각이 아니라 말씀이 기준이다.” 그러므로 복음 앞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이해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비방하는 사람들 때문에 바울은 그들과 다투지 않고,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말씀을 가르칩니다. 9절,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믿는 사람들을 제자로 세우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이 두란노 서원에서 무려 두 해 동안, 2년 동안 가르쳤더니 그 결과가 바로 10절,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튀르키예 서부 지역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러 두란노 서원에서 말씀을 가르쳤고, 말씀을 배운 제자들이 주변 도시와 마을로 흩어져 복음을 전한 것, 복음이 지역 전체로 퍼져 나간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신약의 역사서가 사도행전이기에 이 사건을 누가가 기록했는데, 단순히 이 사실을 위해 기록했을까? 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즉 ‘그러면 누가는 왜 이 사건을 기록했던 것일까?’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누가 가요? 에베소에서 일어난 특별한 성령 체험만을 소개하려고 이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례요한의 회개 운동에 머물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가 말하고자 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아볼로도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은 결국, 성령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 믿음은 한 번의 결단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말씀을 배우고 순종함으로 자라야 한다는 사실을 누가가 전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확한 복음으로 세워진 작은 무리가 한 도시와 한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사는 자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그들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또한 버리지 않고 새롭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래된 기계를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이 식었다고 해서 버리지 않으시고, 잘못 알고 있었다고 외면하지 않으시며 오랫동안 같은 죄에 넘어졌다고 포기하지 않으시며 기도가 약해지고 첫사랑이 식었다고 폐기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머물지 말아라.” “과거의 은혜에만 머물지 말아라.” “오래 믿었다는 이름만 붙들고 있지 말아라.”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오너라.” “다시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라.” “다시 말씀 앞에 무릎을 꿇으라.”라고 하신 주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소망은 결심의 강도에 있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있습니다. 아멘. 에베소의 열두 사람을 찾아오신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새롭게 하시려고, 복음을 더 정확히 알게 하시려고 찾아오십니다. 그것이 때론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설교를 통해 만나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준비되어 있어서 성령을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새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찾아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너무 오래 믿어서 새로워질 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많이 실패해서 다시 시작할 수 없는 사람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굳은 마음도 부드러워지고, 말씀이 임하면 잠든 영혼도 깨어나며, 십자가 앞에 서면 교만한 사람도 무릎을 꿇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절망한 사람도 다시 일어납니다. 복음은 영원하며 완전합니다. 업데이트되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버티려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다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시 성령께 마음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아주 오래된 팝송 중, ‘Danny Boy’라는 팝송이 있습니다. 이 곡은 전쟁에 부름을 받은 이와 가족의 마음이 담긴 노래입니다. 그래서 떠나보내는 사람의 깊은 사랑과 기다림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보내야 하지만,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꽃이 지고 산과 들이 변해도, 사랑하는 이를 향한 기다림은 끝나지 않음을 노래합니다. 우리의 믿음도요? 때로는 주님 곁을 떠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몸은 예배의 자리에 있지만 마음은 멀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찬송은 부르지만, 감격이 사라지고, 말씀을 듣지만 순종하지 않으며, 기도는 하지만 주님의 음성을 기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인가요? 아닙니다. 처음 사랑의 뜨거움이 약해져 오래된 신앙의 습관 속에서 잠들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에도 업데이트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고, 십자가 앞에서 울었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죄를 아파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업데이트는 지식을 조금 더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다시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삶을 다시 다스리시도록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Danny Boy’의 정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멀리 떠났을 때에도 기다리셨고, 기도를 멈추었을 때에도 기다리셨으며,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겼을 때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오래된 상처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익숙한 형식적인 신앙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라는 영적 교만에서 나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믿음의 업데이트는 완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질 때마다 주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고, 길을 잃을 때마다 말씀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마음이 식을 때마다 성령의 불을 구하는 것입니다. 메마름을 인정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순간, 성령께서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오늘 다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멀리 떠난 우리를 기다려 주시고 다시 돌아오라고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낡아진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식어 버린 마음에 성령의 불을 붙여 주시고, 메마른 영혼에 생수를 부어 주옵소서. 과거의 은혜만 추억하지 말게 하시고 오늘도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다시 우리 삶의 중심에 모시게 하시며,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믿음을 새롭게 하옵소서.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게 하시고, 멀어졌을 때 주님의 음성을 듣고 돌아오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믿음의 길을 포기하지 않게 하시며, 마침내 주님의 품에 안겨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우리를 기다리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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