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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이 순교한 후”

(행 8:1-8)

 

여러분, 우리가 지난주에 나눈 내용은 스데반의 순교입니다. 오늘 본문은요, 스데반의 순교 이후의 이야기인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교인의 급증으로 구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 사이의 불만과 갈등이 일어났는데, 열두 사도들이 이 일을 맡을 일곱을 택하여 세우게 됩니다. 그 중에 스데반이 있었고, 성경은요, 스데반에 대해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가리켰고,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자라고 가리키면서 그가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게 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논쟁에서도 그를 당할 자가 없을 만큼 지혜가 충만하였는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도 많아졌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 기독교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 위협을 느낀 힘이 있는 무리들이 스데반을 잡아 공회에 세웠던 것이 우리가 3주에 걸친 스데반의 긴 설교이었고 스데반의 긴 설교의 핵심이 너희가 메시아인 예수를 죽였다는 강한 선포와 함께 스데반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후에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 박해가 시작되어 교회는 위기를 맞이했고, 사도들만 남기고 유대와 사마리아 땅 사방으로 흩어진 결과가 있었지만 그들은 흩어졌어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기까지 약 300년간 복음 전하는 열정이 식지 않았습니다. 이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이고,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인데, 이 말씀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저는 크게 두 가지만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스데반의 순교 후에 일어난 3가지입니다. 1절을 봅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무엇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까? 사울의 등장이고, 교회에 찾아온 큰 핍박이며, 흩어짐이라 하였습니다. 여러분, 사울의 등장을 다른 표현으로 말하면 예루살렘에서의 국한된 모습에서의 탈피입니다.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의 목표가 예루살렘이 아니라는 것이고, 제가 자주 인용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시선이 어느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온 인류이기 때문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라는 이 말씀대로 주를 믿는 백성들의 수가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이 가득했지만 흩어지게 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의 만의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온 유대가 복 받는 것이고 사마리아도 온 세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이 일의 시작이 바로 사울의 등장이라는 것, 그래서 핍박과 흩어짐이 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부터 사마리아 역사의 시작이 됩니다.

 

여하튼 사울은요, 1절을 보니까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죽음이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이들, 즉 예수쟁이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에는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택백성이고 율법으로도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교회에 큰 핍박을 가했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찾아가 끌어내어 감옥에 가두는 일을 적극적으로 하였습니다. 언제까지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교회에 큰 핍박을 가했는데, 사실 핍박은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듯이 하나님 당신의 교회를 확장하시는 역사이었습니다. 이렇게 스데반은 순교를 하였고 경건한 자들에 의해 장례가 치러지면서 그의 생애는 여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계기로 교회에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지 않습니까? 3절입니다.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행 8:3) 무슨 이야기입니까? 성도들은 결국 흩어질 수밖에 없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드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임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대개요, 이 어려움 때문에 상심에 빠집니다. 특히 사람에게 당한 것은 더욱 심합니다. 의욕 상실과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가운데, 이 어려움을 준 상대를 원망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이 기간은 길어집니다. 하나님이 일을 하시는 것을 바라봐야 하고 원망을 품는 것 대신에 주신 상황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리에 나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루살렘 교회에 찾아온 엄청난 핍박은요, 당연히 주눅 들게 만들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헤어짐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흩어짐을 받은 이들이 주눅 들어 좌절에 머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4-5절이에요. 볼까요?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행 8:4-5) 핍박 때문에 흩어졌지만 이곳저곳을 다녀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곳저곳 다니면서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대표로 성경은 빌립을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입니까? 이들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요, 먼저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섬깁니다. 즉 그리스도를 주로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주, 그러니까 ‘큐리어스’ 의미 안에는 어떤 권위의 표현으로 고용주 또는 노예를 부리는 상전, 그리고 주인 혹은 소유주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라고 부를 때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요 우리의 상전이시며 우리의 소유주가 되시는 분이라는 말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왜? 우리의 주가 되시는 것일까요? 우리가 그의 소유물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은혜 생활을 제대로 하려면요, 먼저 나라고 하는 이 존재의 소유자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주인이 되시고 나는 그의 소유물이란 사실을 올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전 6: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이에요? 나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기 위해 피로 값 주고 사신 나의 주인이신 그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새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섬기며 우리의 주인으로 받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하여 잘 알고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여러분,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이 은혜가 가득찬 빌립이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두 단어가 있는데, 하나가 복음이고 다른 하나가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무엇이냐면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빌립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빌립은 침묵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움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믿음의 선배들도 그렇게 하였고, 지금도 수많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세계 곳곳에 나가 침묵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국 기독교 지도자인 리에게 어느 미국사람이 이런 질문을 하였답니다. “중국에는 유교가 있는데 굳이 기독교를 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라고요. 그랬더니 리가 이렇게 답하였답니다. “공자는 선생입니다. 하지만 구세주가 아니지 않습니까?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공자는 죽었어요. 그는 죽은 것으로 끝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한다면 공자도 그리스도 앞에 나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요, 우리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하는 것이고 이 구원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라고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는 여러분이 가만히 있다면 모순 아닐까요? 이 질문에 여러분 스스로 답을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전해진 복음으로 인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6절을 볼까요?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행 8:6) 그들이 보인 반응 첫째가 빌립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에 들었다는 것은요, 그냥 들은 것 이상을 말합니다. 즉 신뢰가 담긴 들음이고 귀 귀울이고 들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귀 기울이고 들은 의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목수가요, 일하다 애지중지하던 손목시계를 톱밥 더미에 떨어뜨리고 말았답니다. 수북이 쌓인 톱밥을 헤쳐 보았지만 손목시계는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하는 수없이 동료 목수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들은 등불을 들고 톱밥 더미를 뒤졌지만 도통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는 것을 잠시 멈추고 밥을 먹으러 갔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목수의 손자가 작업장 안으로 들어가 손목시계를 찾아 작업대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목수가 손자에게 “얘야, 이 시계를 어떻게 찾았니?”라고 물었더니 손자는 “조용히 바닥에 앉아 있었을 뿐이고, 조금 있으니까 ‘째깍! 째깍!’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서 시계가 어디 있는지 알았어요”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들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의 사람들이 이렇게 복음을 들었는데, 우리는 어느 목사님의 말을 주의깊게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들어보세요. “부모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효자가 되고 자식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자애로운 부모가 되며, 아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은 남편이 되고 남편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좋은 아내가 된다. 백성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훌륭한 임금이 되고 자기 내면의 깊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영성가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요. 사랑하는 서도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을 듣습니까?

 

두 번째로는 들었더니 이들이 행하는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을 따랐다는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이에요? 성령이 충만해서 전하는 말을 들었더니 행하는 표적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복음의 현장이 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행하는 표적이 무엇일까요? 7절에 이렇게 기독하고 잇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행 8:7) 복음을 들은 후 일어난 첫 번째 변화가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요,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자기도 모르게 쇠사슬이 다 끊어져 버리는 역사를 경험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귀신은 정말 귀신입니다. 귀신이라는 의미는요, 파리가 많이 붙어 있는 ‘똥집’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더럽다는 의미이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이런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더러운 영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 더러운 귀신이 떠나간 것이고, 믿는 자의 특권인 예수의 이름으로 더러운 귀신이 떠나는 경험을 한 것 아닙니까? 아멘!

 

그러기에 우리도 예전에는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러운 귀신이 내쫓기고, 예수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격과 성령의 역사를 우리의 영혼 속에 임하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변함없는 치유의 기적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복음이 중풍 병자와 앉은뱅이가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샥이 왔는데, 근육이 마비된 사람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특히 40년 동안 앉아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일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복음이 선포되면 제일 첫 번째 반응이 숨어있는 악한 영이 떠나게 되고, 두 번째 반응이 병 고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아멘!

 

이제 마지막 두 번째로 큰 기쁨입니다. 8절을 볼까요?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8)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로 ㅇ니하여 기쁨이 가득한 것이고 주님께서 예고하신 일로 기쁨이 가득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기쁨은 자고 있는 곳에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도 됩니다. 무엇이 자는 것일까요? 어떤 어린아이가요, 자기 방에서 아버지가 옆에 온 줄도 모르고 열심히 장난감 벽돌을 쌓으면서 놀고 있었답니다. 아버지가 인기척을 하자 아이가 “쉿! 조용히 하세요. 지금 교회를 짓고 있는 중이에요”라고 대답하였답니다. 거기다 더욱 대견스럽게도 아이는 교회에서는 조용히 해야 한다고 말까지 하니까 그동안 예배 때마다 아이에게 조용히 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 것이 큰 교훈이 되었다고 생각한 아버지가 “왜 예배시간에는 조용히 해야 하지?”라고 물었더니, 아이의 대답, “아빠도 참, 사람들이 다 눈 감고 자고 있는데 시끄럽게 떠들면 안 되잖아요” 이것이 자는 것입니다. 자고 있는 곳이 아닌 살아있는 신앙의 현주소에서만 큰 기쁨이 일어나는데 그러면 무엇이 살아있는 신앙일까요? 바로 큰 기쁨이 넘치는 신앙이고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경험하는 자리,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기쁨의 현장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한 도시인 사마리아 성처럼 되었을 때 이루어지고, 빌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좇을 때 이루어집니다. 그때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가고, 중풍병이 치유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됨으로 기쁨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안에 이 기쁨이 가득하게 되기를 소망해봅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그대로 확신하고 따르는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요, 그 자체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곳에 말씀의 능력과 역사가 그대로 일어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바울이 머문 기간이 겨우 3주 아닙니까? 그러니까 3주 동안만 담임목사를 바울이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떠난 후 들리는 좋은 소문은 사도들이 전하는 말을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나중에 나누겠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사마리아로 보내지 않습니까? 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행 8:14)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이루어지는데,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박해를 받지만 복음을 더 널리 퍼뜨리시고 박해 아래 있는 교회를 더 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교회의 큰 손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코 헛되지 않게 하신 하나님이시고 무엇보다도 교회에 가장 큰 타격과 손실을 입히던 열혈파 박해자인 사울을 기독교 최대의 선교사요 신학자로 만드신 역사가 되게 하셔서 교회를 더욱 크고 견고하게 세워나가신 것 아닙니까? 이 역사를 잠시나마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의 말대로 사울이 바울이 된 것은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크고 통쾌한 복수인데, 솔직히 교회는 그 출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박해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위축되고 흩어졌지만 그만큼 더 많은 교회가 생기게 하였다는 사실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들에게 놀라운 권능을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되기를 원합니다. 솔직히 헬라 시대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조롱거리였습니다. 헬라철학자들이 복음을 논리적으로 형편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고전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라고 하였고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며 세상과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믿었고 그렇게 따랐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 왜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고 있는데, 왜 일까요?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것을 믿는 것이라고 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번 한주간 이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 자리로 나가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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