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걸으라”
(사도행전 3장 1~10절)
제가 오래전 한국에 있었을 때, 오리지널 미국 T-BONE STAKE를 먹으려고 미군 오산 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어느 영관급 장교의 안내로, 미군 부대에 들어가면서 느끼는 첫인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데리고 가는 그분과 쉽게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계급과 이름이 통하는구나’ 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름이 통합니다. 무엇보다도 돈이 많은 사람의 이름이나, 유명한 학자의 이름은 권위까지 따라옵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만 이 위력이 있지, 죽은 후에는 상징적인 가치만 남습니다. 그 자리에 물러나면, 바로 약화가 됩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에서 가장 권세 있는, 가장 높은 이름,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죽음 후에 더욱 위력을 나타내었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나고, 가장 존귀한 이름이 되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항상 통하는 이름이 되어, 지금도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이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중요한 핵심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베드로와 요한이 만난 한 사람에게 이렇게 임함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여기 구 시는요? 오후 3시를 말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가 기도했습니다. 제 구 시는 마지막 시간, 그러니까 해가 지기 전 그날의 마지막 기도 시간입니다. 변함없이 늘 기도하던 습관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으로 이들이 올라가고 있었어요? 예루살렘 성전은요? 동쪽 문으로 솔로몬의 행각이 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이방인의 뜰이 나오고, 이 이방인의 뜰을 지나면, 바로 “아름다운 입구”라는 뜻의 ‘미문’이 나옵니다. ‘미문’은 이름 그대로 ‘The Beautiful Gate’ 또는 ‘golden gate’라고 부르는 입구로, 일반 평민들이 사용하는 문이기에, 항상 많은 사람으로 붐빕니다. 미문이 어떻게 생겼나? 사진을 보여주세요? 지금은 다 막아 버렸죠? 팔레스타인이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자기 민족들의 무덤으로 만들었습니다.
여하튼 이 미문을 지나면, 실제 성전 영역에 들어갑니다. 두 사도가 이 미문에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적인 사건을 만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과 만난 것이에요? 2절을 볼까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이 문 앞에, 다리 못 쓰는 사람을 사람들이 날마다 메어 와서 두었다고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메고 온 것으로 보아, 본인이 늘 땅에 깔고 앉던 방석 같은 들것에 메고 왔을 것이고, 오자마자 곧바로 구걸을 시작합니다. 3절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무엇이에요? “한 푼 주세요?”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해서, 돈을 얻는 일을 하는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도 ‘한푼 줍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인생 최대의 사건이 되었고, 놀라운 축복과 기적의 사건이 된 만남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름도 없고, 성도 없는 이 당사자 누굴까요? 자기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자, 본문을 자세히 보면 느끼는, 자기 백성만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종교적 허영심과 교만을 이용하여 먹고사는 인생입니다. 4장 22절에 보니까, 그의 나이가 40세가 넘었다고 했어요? 무엇이에요? 40년 이상 앉은뱅이이고, 매일 구걸을 반복하는 불쌍한 자, 비참한 자, 항상 절망감으로 사는, 그래서 꿈도 미래도 내일도 없는 자가 바로 그인데, 그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늘 하듯이 ‘한푼 줍쇼’라고 했지만, 이 만남은 우연한 만남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하신 섭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남이 되었고, 인생 최대의 사건이자, 놀라운 축복과 기적의 사건이 된 만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 미문을 드나들면서 이 앉아 있는 이 거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무시하고 지날 때가 거의 다였겠죠? 하지만, 이날은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4절의 말을 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먼저 “우리들을 보라”라고 했어요? 이것은, 날마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도, 복음도, 예수그리스도의 능력도 알지 못하던, 그저 하루 동냥을 얻어 살던 가련한 그를 주목하고 건넨 말입니다.
그가 5절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다 이 두 사도들의 눈과 부딪혔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던 돈 이상의 훨씬 더 좋은 것을 얻는 놀라운 순간이 되었어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사건이 임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전혀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던 말을 들었습니다. 솔직히 베드로가 말한 이 말은요? ‘나, 돈 없다. 그런데 내게 있는 이것, 즉 예수를 주겠다.’ 이것이거든요? 그가 구하는 은과 금이 아닌, 가장 필요한 것을 주겠다는 것이고, 이때까지 ‘생각을 해본 적도 없는 것, 일어나는 것을 주겠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100% 불가능한 일이죠? 안 그래요? 일어나서 걷는다는 개념조차 없습니다. 걷는 느낌도 몰라,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에게 “일어나 걸으라!” 하였고, 그 근거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어요?
은과 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은과 금보다 더 중요할까요? 구약을 빼고요? 신약에서 예수님의 호칭은요? 신적인 권위와 능력, 그의 신성과 인성의 강조점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인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하나님의 형상’ 등등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사건 이후, 처음으로 나타나는 기적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이름입니다. ‘나사렛 예수’라는 의미는, 태어난 곳은 베들레헴이지만, 주로 고향처럼 지내면서 핵심 사역을 시작한 곳이 나사렛과 갈릴리 지역이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 ‘메시아’ ‘Anointed’,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며, 삼위일체 되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신적 대리자, 하나님 나라의 대리자로서 구속사적 언약의 성취를 완성한 자라는 것이에요?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성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고, 십자가에서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며,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분, 영광을 받으시고,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와 함께하신 이 이름의 뜻과 능력의 이름이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러기에 이 이름으로 그를 일으켰다는 것은, 은과 금으로 해결할 수 없던 이 앉은뱅이의 죄와 인생의 문제가 오직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말을 보면요? ‘나는 여기 은과 금이 있는데 이것도 받고 예수도 받고’라고 한 게 아니라, “나는 은과 금이 없다. 그런데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7~8절입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발과 발목에 곧바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일어섰어요? 일어선 그는 걷고 뛰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때 그 현장에 있던 수많은 백성이 모두 그 앉은뱅이가 걷는 것과 뛰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랐다고, 늘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그 걸인 앉은뱅이가 걸으며 뛰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다고 9~10절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그러면 이제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을까요? 첫째로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과 친밀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의 뜻을 순간마다 알려고 애썼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아닌 가운데 이 상황이라면 난처했을 것입니다. 행여 손을 잡아 일으켰더라도 곧바로 주저앉았다면, 베드로든 그 앉은뱅이든, 이 상황을 보던 사람들에 의해 큰 비참을 느꼈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었죠? 지금 은퇴하신 장충교회 남창우 목사님이 한창 신앙이 뜨거웠던 강도사 시절에, 남대문 육교 위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에게 베드로처럼 똑같이 “나는 은과 금이 없다. 그런데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준다.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라고 세 번이나 외쳤지만 일어나지 않자, 부끄러워 도망간 적이 있었다고 직접 목사님에게 들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활의 능력을 그 앉은뱅이에게 나타낼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그 앉은뱅이를 성령의 능력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따라 일으켜 걷게 하실 것을 알았을까요? 답은 성령으로 충만함,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과 친밀하다는 것입니다. 남 목사님은, 성령 충만함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도 물론 성령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요한도 대단히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남대문의 앉은뱅이가 가진 믿음입니다. 먼저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의 지시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어쩌면 남 목사님도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일어난다는 믿음에 근거해서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 뜻대로 순종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영적인 앉은뱅이들도 일어나 서서 달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성령 충만을 구하고 또 구하기를 원합니다. 어제 구럈을니까, 오늘은 쉰다는 것은 없습니다. 날마다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르믕로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는요? 주 예수의 지시에 따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외칠 때, 베드로의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어디서 온 것이고,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는 행동은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 담대한 행위일까요? 믿음에 나온 순종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대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성령 하나님 마음인 이 앉은뱅이의 마음 깊은 곳을 베드로와 요한도 읽었습니다. 그 증거가 “우리를 보라”라 할 때, 앉은뱅이의 눈을 통해 그 깊은 마음에 담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니 그에게 믿음이 있었다고요? 있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16절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앉은뱅이를 치료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성령을 통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료해 주심을 믿었으며,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 나라의 왕이자,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고,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그가 낫게 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사실이고, 그는 이것을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며, 구원자임을 분명히 알아, 그날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으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6절로 다시 돌아가 봅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첫째로,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도만이 아니라 우리도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앉은뱅이의 치료는요?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순절 날에 성령을 보내신 사건과 연결되는 사건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셔서, 주의 백성의 죄를 위해 속량하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만유의 주와 하나님 나라의 왕이 되셨다는 사실을 알리는 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에서 돌이켜 거룩함에 이르도록 하는 생명의 능력이 되었고,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과 연결됨은 당연하고 그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사도의 권세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권세이고, 사도의 능력으로 어떤 기적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권세가 주어져, 그 이름을 부를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 권세가요?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해졌고 전해질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게 된 자들에게, 그러니까 요 1장 12~13절의 말씀대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들에게 전해졌고, 전해질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라고 부릅니까? 벧전 2장 9~10절의 사람들이라고 부르죠?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그러기에 “내게 있는 이것”은요?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님이시고, 또한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며, 나아가 베드로 안에 거하시는 예수그리스도 그분이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그리스도 그분입니다. 아멘!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주었어요. 이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모든 일과 그분의 지극히 높은 지위에서 허락하시는 혜택이 자연스럽게 그 앉은뱅이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그 이름을 부르라고 말씀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요 14장 12~1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아멘.
마지막 두 번째는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침을 받은 그가요? 8절에 보면, “성전으로 들어가면서”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그의 발은 죽었어요? 그것만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었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하였을 때, 고침을 받았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었던 그였어요? 스스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예루살렘 성전의 미문을 건너 그 안으로 들어가 예배자의 삶으로 나아갔습니다. 낮기 전에는 들어간 적이 없었죠? 들어갈 수도 없었어요? 하나님과 교통한 적도 없었습니다. 왜요? 일단 법적으로도 들어갈 수 없기에 지성소로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사치라고 스스로 합리화시켰을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뛰어 서서 걸으며,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고, 미문의 문지방을 넘어,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다리만이 아니라 죽은 영혼도 살아났습니다. 누구 때문에요? 베드로 때문에요? 아니죠?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려 지성소로 들어갔습니다. 선한 능력으로 일어났습니다.
주만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요? 믿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전부터 있었던 괴로운 자리에서, 이제 고난의 길을 걷는다 해도, 주님께 모두 맡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아마 주님이 마신 고난의 쓴잔을 자신도 마시리라고, 예수와 복음을 위해 살리라고 굳게 다짐했을지도 몰라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앉은뱅이가 아니었습니까? 그런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예수, 그 이름을 드러내고 주께로 돌아와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인한 놀라운 역사를 써가는 우리가 되기를 우리 주님은 원하십니다. 습관적인 예배의 자리에서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의 모습이, 아니 이 주인공이 바로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