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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1-28)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아낌없이 주는 것과 희생하며 인내하고, 고통을 함께 나누는 한 사랑을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본문은, 귀신들린 사랑하는 자녀를 둔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수없이 들었던 이야기이고, 그래서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귀신이 들린 자신의 딸을 고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여인으로, 그가 이 사람, 저 사람, 이 의사, 저 의사를 다 만났지만 커다란 아픔을 안고 살았던 여인이 이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수님이 자신의 동네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 소식에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게 찾아와 자기 딸을 고쳐달라 간청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개 취급까지 하였지만, 포기하지 않은 그의 사랑과 호소가 하나님을 만나게 된 은혜, 자신의 딸도 고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소중한 은혜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 되는 믿음의 여인이라 칭찬까지 받은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장소입니다. 아시다시피 장소라고 하면 일정 구역을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보통 활동무대가 갈릴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의외의 장소로 들어가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곳은 이방지역이죠? 21~22절을 볼까요?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거기라고 하면 게네사렛입니다. 갈릴리 바다 서쪽 해안이에요. 모든 병자들이 예수님께로 나와 고침을 받았던 곳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다 나음을 받았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나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여기에 장소가 나오죠? ‘두로’와 ‘시돈’입니다. 이 지역은, 유다 지역 밖에 있는 국경 지역이고, 예수님이 이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이 여인이 온 것입니다. 여기 ‘두로’라는 의미는 ‘바위’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바위가 많은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시돈 남방 약 40㎞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에요. 그리고 시돈도 두로 북방 약 48㎞ 지점에 있는 무역과 상업의 중심지인데, 페니키아, 즉 베니게 사람들이 세운 대표적인 항구도시입니다.

 

이곳으로 예수님이 들어가셨던 것이고, 이방인이 거의 다 거주하는 이곳으로 예수님이 가신 것입니다. 주님이 왜? 들어가셨는지는 나중에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가나안 여인입니다. 그에 대한 이름은 없어요. 그냥 가나안 여인이라고 하고 있고,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여인’ 그리고 ‘수로보니게 족속’, 여러분, ‘수로’는, ‘수리아’의 준말입니다. ‘보니게’, ‘베니게’, 즉 ‘페니키아’의 준말이에요. 그러니까 수리아에 사는 페니키아 여자라는 말이고, 이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에게 나온 것입니다.

 

두 번째로 소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요,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찾아와 자신의 소원을 들고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볼까요?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사랑하는 자신의 딸이 귀신에 들어 이 병을 고쳐달라고,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 아이가 지금 귀신들렸어요. 이 아이는 사랑하는 내 딸입니다. 내 뱃속에서 10개월 동안 사랑을 먹고 태어난 아이입니다. 그런데 지금 귀신 들렸어요. 자주 넘어져요. 불에도 그냥 들어가고요, 그래서 많은 의사도 만났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진짜 의사는 당신입니다.” 라고 외친 것이요, 간절한 마음을 담은 부르짖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가 여기에 아주 중요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외쳤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생각해보세요? 유대인들도 힘든 이 용어를 이 이방 여인이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단어는, 메시아의 칭호입니다. 그것도 이방 여인이, 그리스도 밖의 사람이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가 이 메시아의 칭호를 자신의 소원을 위해 그냥 하는 말이었을까요? ‘다윗의 자손’이라는 이 고백 안에 “예수님 당신만이 구세주요 당신의 권능을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인생의 비극과 실망에서 면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예수님 당신은 소망 중에서 소망이기에, 모든 불공평을 깨고, 고통을 종식 시키실 분이십니다”라는 고백의 외침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셋째로 반응입니다. 주님의 반응은 너무나 의외의 반응 아닙니까? 23절을 볼까요?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심”아닙니까? 웬만하면 자신을 칭찬한 것인데, 그에 따른 반응이 나와야 하는 것이 정상인데, 예수님은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셨다는 것이에요. 오히려 침묵하셨습니다. 왜 한 대답도 하지 않으셨으며, 침묵만 하셨을까요? 많은 인파 때문에 이 가나안 여인의 소리를 전혀 못 들어서요? 사실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 말은 그냥 작은 소리가 아니에요. 온 동네가 떨어 나가듯이 부르짖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침묵하셨어요. 여러분, 침묵의 정의가 무엇이에요? 말하는 것을 억제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 당신이 말하는 것을 억제할 만큼 무엇이 있었기에 침묵을 했을까요? 지금 이 상황, 충분히 큰 오해를 살 수 있는 모습입니다. 안 그래요? 갈등에 대한 오해일 수도 있고, 이방인과 유대인에 대한 관계에서 오는 혼란의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그동안의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에게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응답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귀를 기울여주신 분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세 번째로 더욱 부르짖음입니다. 침묵하고 계신 주님의 반응에 여인은 머물지도 않았고, 더욱 간청하였습니다. 이 반응에 제자들이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제자들이요, 이 여인이 너무나 불쌍하니까, 이 여인의 요구를 들어달라고 하는 표현이 아니라 자신들의 편안함을 위한 말, 즉 시끄러우니까 “뒤에서 소리를 질러 성가시게 하는데, 목적이 방해되고 사실 창피합니다. 그러니 선생님, 저 여인의 딸을 빨리 고쳐주어서 저 여인이 떠나가게 해주세요” 병을 고치는 분은 주님인데 마치 자신들이 시키는 것처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는 거절입니다. 침묵으로 일관하신 주님은 거절하시는 이유까지 밝히면서 단칼에 거절합니다. 24절을 볼까요?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이 말씀은 침묵에 대한 이유입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하나의 이유를 들어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면요, 웬만하면 알았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알았다고, 그 말을 듣고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다섯 번째로 거절되어도 구함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부당하게 거절됨에도 구하였다는 말입니다. 25-27절입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여기에 여인은요, 믿음의 고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치 밀어내려고 하지만, 그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손을 뻗어 잡는 모습, 그래서 오히려 더 가까워지도록 하는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섯 번째로 칭찬입니다. 분명히 그녀는 이스라엘 밖의 사람이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진실한 이스라엘의 딸임을 입증함을 받았는데, 28절을 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무엇이에요? 이 여인의 믿음을 주님은 보신 것이고, 입에서 건성으로 흘러나오는 간구가 아니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간절한 기도의 바탕에는 믿음이 있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가 말씀하시니 그대로 되니라”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인에게 있어서 유대인이 지닌 떡과 비교하면 아주 작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상에 있는 부스러기는 귀함이라는 것을 그가 본 것이고, 예수님 당신이 계시는 곳은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 하나님과 함께함이 복임을 고백한 간구 이었던 것입니다. 왜냐? 주님에게 있는 지극히 적은 것이라도 귀한 것이기에, 바로 생명의 떡 부스러기이기에, 식탁은 주인의 식탁이고, 그 주인은 예수님이며, 자신은 개라 할지라도 주인인 그리스도의 개가 되겠다는 것, 즉 자신은 문지방에 거한다 해도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기에, 그것이 행복 그 자체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그리고 왜? 주님은 갈릴리가 아닌 이 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것일까요? 아울러 시련은 때때로 우리 영혼에 무엇일까요? 먼저 시련을 봅시다. 여러분, 시련은요, 우리 영혼에 유익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련이 있기에 주님께 부르짖게 되고, 시련을 통해 주님의 역사하심과 회복하심을 보게 하기 때문이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요, 우리의 부르짖음도, 때론 이 가나안 여인에 대한 반응처럼 침묵하시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험과 역경이 더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가장 먼저 와야 하는 것이 무엇이어야 할까요? 분노가 아니라 감사이어야 하고, 멈춤이 아니라 끝없는 간구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이 얼음장 같은 감옥 속에서 천로역정을 집필했습니다. 파스퇴르는 어떻고요? 반신불수 상태에서 질병에 대한 면역체를 개발했습니다. 에디슨이 청각장애자였던 것 아세요? 그런 그가 축음기를 발명했어요. 밀턴은요, 시각장애인이었어요. 하지만 영국 최고의 시인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어떻고요? 지체장애인이었잖아요? 그런 그가 이 미국의 대통령이 됐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역사는요, 고통과 시련에 용감하게 맞선 사람들에 의해 새로 쓰여지고, 태풍이 몰아치면 닭의 일반적인 행동은 자신의 날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잔뜩 움츠리지만, 독수리는요, 날개를 활짝 펴고 바람을 이용해 유유히 안전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바로 이 원리입니다. 시련은요, 주님에게 더 가까이 가게 하는 원동력이기에 여러분에게 찾아온 고통이요, 정말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할 수도 있지만 이 고통이 있었기에 한 번이라도 더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고, 한 번이라도 더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다는 것, 고통이 있었기에 한 번이라도 더 주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고통이 빚은 하나의 질그릇이 결국 매 순간 하나님이 빚어 주심을 경험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고통이 확성기가 되어 예수님을 귓가를 때렸듯이 여러분도 이 주인공이 되시를 원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면서.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침묵이라 해도 잠시뿐이고, 결국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믿고, 이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믿음 또한 드러내기 원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은 왜? 이 두로와 시돈으로 가신 것일까요? 이것이 이 가나안 여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이미 예수님은요, 마태복음 10장 5-6절에 보면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최우선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이방인에게로 가지 말라고 하셨던 주님이요, 이방인의 땅인 두로와 시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이 가나안 이 여인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저는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답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엡 2장 12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즉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 소망도 언약도 없는 외인이었지만, 은혜의 보따리를 풀어 놓으실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셨기에 들어가셨다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던 마태복음 10장 5-6절의 이 말씀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이었고, 어느 특정한 집단에 오셔야 했기에, 이 특정한 집단이 구원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언약 시선에서, 이제 온 세상으로 시선이 흘러넘치게 하는, 즉 예수님의 마음에는요,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계획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말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것이었고, ‘모든 민족’에는 이스라엘 사람은 물론이요, 사마리아 사람, 이방인 모두가 우리 또한 복음 전파의 대상임을 밝히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두로와 시돈 지방까지 가셔서 은총을 선포하길 원하신 주님이 우리에게도 흘러넘쳤다는 사실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 아닙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이 능력 많은 구원자임을 알고 있었을까요? 마가복음 7장 26절에 이 여인에 대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듯이 수리아에 사는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말 아닙니까? 외인이고, 그리스도 밖에 사람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요, 마태복음 4장 23-24절에 보면 여기까지 예수님의 소식이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소문을 이미 들어 알았던 것입니다. 어쩌면요,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딸을 데리고 예수님이 사역하고 계시는 갈릴리 지방으로 내려가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들의 땅에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고,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 아닙니까? 본문 24절에 예수님은 가급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셨는데, 숨길 수 없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요? 이 가나안 여인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심 그런 마음이 있었어도, 당신의 이름을 믿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은요,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지만,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당신이 지은 이 세상에 오셨지만 자기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어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은혜를 이 가나안 여인은 보았고요, 믿었습니다. 주님이 거절했어도, 일시적이었지 영원한 것이 아니었기에, 당신이 베푸신, 아니 당신이 베푸실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개는, 아니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고백을 이 여인이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는 사실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기에, 창세 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주시려고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 아세요? 이 여인과 만남이 있고 난 뒤에,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확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고백해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바로 이 가나안 여인과의 만남 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이 여인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은혜, 근심이요, 걱정이요, 아픔이었던 딸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간단해요? 이 말씀,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리 하십니까? 그러면 ‘네 소원대로 되리라’ 여러분은 여러분의 소원의 항구에 다 다르게 것입니다. 이런 찬송이 있죠?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나 두렴없네 두렴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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