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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아, 사울아”

(행 9:1-9)

 

오늘부터는 우리가 사도행전 9장을 나누게 됩니다. 여러분, 기독교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선교사요 저술가요 신학자를 꼽은 다면 사도 바울이라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의 절반인 13권의 성경을 저술한 저술가요, 오늘 날의 모든 신학의 대부분이 다 바울 서신에서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온 내용이고, 주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말미암아 회심하는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의 기록이 오늘 본문인데, 그 이유는 한 개인의 구원문제가 아닌, 이 복음이 이스라엘로 들어가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 세계로의 확장으로 이루어지는 길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 사울은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에서 자라났고, 나면서부터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대전통과 히브리 율법에 아주 정통한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 사울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헬라문화와 철학에 익숙했다는 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고 당대의 석학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업을 한, 완벽한 지성인의 자격을 갖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직자 일만 한 것이 아닌 자비량 목사, 즉 직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한 목회자이고,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던 자가 바로 사울입니다. 그의 신앙적인 확신을 보면 역사철학을 가진 배경의 지성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앞 뒤 가리지 않는 행동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해 아주 나쁜 선입견이 있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잡아 드리는 일을 하였는데, 오늘 본문도 그가 이 일을 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살기 등등입니다. 살기 등등이라는 말은 바늘을 찌르면 바로 폭발할 것 같은 의미인데, 1-2절을 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행 9:1-2) 그는 예수쟁이라면 다 잡아 넣을 계획으로 자기가 옳은 것에 대한 적극적 행동을 옮겼습니다. 그가 이런 적극성을 보인 이유는? 이 일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강한 자부심과 영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쳤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를 영접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행 22:3절과 빌 3:4-6절을 통에 간증하고 있는데, 들어보세요. 먼저 행 22:3절입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행 22:3) 그리고 빌 3:5-6절입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 3:4-6) 무엇을 말 하냐면? 그만큼 집안 내력이나, 법적 신분이나, 학문적 지식이나, 종교적 경건과 열심에도, 하나 뒤질 것이 없다는 자신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를 영접하기 전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이라는 스데반이나, 보잘 것도 없고 내 세울 것도 하나 없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어부출신이 율법에 대해서와 성전 희생 제사로는 구원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가르침에 대한 분노와,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 유대지도층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를 죽인 천하의 죄인이라고 떠드는 것, 이것이 용납이 안 되어 이들을 잡기 위한 살기 등등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과는 거리가 먼 세리나, 죄인, 그리고 창녀, 문둥병자들을 옹호하는 모습은 더욱 역겨웠고, 이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하늘나라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이 올라간다는 말 또한 안 되는 어불성설이라 여기고 있는데, 문제는 이 가르침에 많은 유대인들이 열광하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분명히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인데, 그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황당무계한 거짓말을 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종교적 지식과 여호와의 신앙으로 두고 볼 수 없어, 이들을 잡아 드려 질서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살기 등등은 그가 다메섹으로 가져갈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는 적극성을 보였고, 갈릴리에서 온 이 무식한 시골 어부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 핵심 인물 몇 사람만 잡아 없애면 이 바람은 끝이 날 줄로 기대하는 살기 등등의 행동을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자꾸만 되살아나 알 수 없는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이 “살기가 등등”은 ‘씩씩거릴 정도의 화가 난 모습’이 되어 버린 것 아닙니까?

 

그런 그에게 주님이 찾아왔는데, 두 번째로 홀연히입니다. 3절을 볼까요?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행 9:3) 혈기 당당한 사울에게 하늘로부터 빛이 ‘뜻하지 아니하게 갑자기’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홀연하게 내려쪼였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한 그가 예수쟁이들을 잡아들이는 것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하나님의 개입이 갑자기 뜻하지 아니하게 임한 것을 말한 것이고 또한 ‘미리 예정했던 일이 때가 되어 나타난 것’을 말합니다. 즉 사울을 향한 하나님의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는 결과란 것이며, 천국보좌에 계셔야 하지만 직접 사울을 만나러 다시 강림하신 드라마틱한 역사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주관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만남이 되게 했고, 가시적으로 직접 현현하신 단 둘이서의 일대일 대면이 되게 한 것 아닙니까? 왜요? 그만큼 주님은 바울을 이렇게 한 치의 어김없는 준비하심의 결과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좀 역설적 표현이지만 이렇게 까지 하지 않으면 회심이 안될 만큼 예수에 대한 반발이 가장 완악한 자이었기에 직접 나타나셨다는 것이고 그의 안에 가득 차 있는 강한 지성과 학식, 교양과, 자존심, 체면, 권세, 지위, 신분, 재물 등등의 견고한 진을 이 방법을 통해 부서뜨렸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모파심이 들었습니다. 구원 받은 사건들이 이렇게 극적이어야 진짜인가 하는 생각, 사람에 따라 극적인 만남이 있겠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에 따른 많은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예로 어느 모 목사님은 그 당시에 집사였는데, 주일에 골프 치러 갔다가 엄청난 교통사고를 당하였고 결국 얼굴에 수백 개의 유리 파편이 박힌 가운데 깨어났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주님을 만났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과정이 없이 주님을 영접한 것이 정말로 큰 은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날 때 바울과 같은 극적인 상봉은 역사상 단 한번 있는 아주 특별한 경우라는 것입니다. 이 ‘홀연히’ 임한 빛 때문에 눈을 뜰 수도 없고 타고 갔던 말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엎드려 벌벌 기는 상황이 된 것 아닙니까?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행 9:4) 살기등등하여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가는 그 다메섹 길에서 홀연히 임한 빛으로 인하여 앞이 안 보인 상태가 되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 부름을 받은 당사자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여주님의 어떤 목적을 드러내신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즉 ‘나는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는 부름이고, ‘나는 분명히 살아계신다’라는 부름입니다. 이것은 시 공관을 초월한 임재이었고 영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면서 그가 사울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 아닙니까? 이에 사울이 묻기를 ‘주여 누구시오니까?’라고 묻습니다. 5절을 볼까요?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5) 사울의 질문은 참으로 독특합니다. 여러분, 보통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정상입니다 안 그래요?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보통 “후아유?”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것이 아니라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왜? 사울이 이렇게 물었을까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자기에게 오는 순간 마음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하나님의 임재를 보게 되면서 그가 ‘주여 뉘십니까?’라고 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마치 이사야 선지자가 웃시야 왕이 죽고 난 후 하늘의 예배 장면을 목도할 때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스랍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서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하늘을 날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하며 서로 창화하며 날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장면을 이사야 선지가가 봅니다. 그 이전에 주님은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한 모습을 보았을 때 그는 하나님의 강한 임재로 말미암아 ‘화로다 나는 망하였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울 또한 하나님의 강한 임재로 말미암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돌아본 것이고 거부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을 느낀 나머지 주님의 이름을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사울은 소외된 채 진행되었다는 것 아닙니까? 즉 사울 자신의 의식이나, 의지, 능력 등등,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토록 자랑했던 학문적 지식이나, 신앙적 열심 등등이 첨부된 것이 아니라 한마디도 대꾸도 하지 못한 상태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고, 그의 유일한 질문인 “주여 뉘시오니이까?”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누구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 또한 일방적이어서 우리의 행위로나, 우리가 잘나서가 아닌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인데, 이 일방적인 것은 죄의 값이 사망인 이 값을 지시기 위해 죄 없는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베풀었던 것 아닙니까? 이 사실을 이사야 선지자는 사 53장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에 직접개입하신 주님이 자신을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밝히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이 밝힘 안에 무엇이 담겨져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에 처형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도 아니고 바울이 핍박한 것은 당연히 예수 믿는 자들인데 주님은 당신을 핍박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네가 말살하려는 그 나사렛 이단이라는 자고, 네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우긴 그 부활한 예수이며,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죽은 대상이 바로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을 회개시킨 메시아이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이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는 즉 구원 받을 길이 없다는 주인공이 바로 나, 그 예수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라는 대답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울로 하여금 예수님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그 정체성에 대한 답을 줌으로 말미암아 이 대답을 들은 사울은 예수님을 실제로 만난 곳이 다메섹 도상이었지만 캄캄해진 영혼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력도 잃어버렸고 심지어 땅에 꼬꾸라져 누구의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상황, 이렇게 혼란을 겪는 자리, 캄캄해진 영혼 속이 되고 만 것입니다. 왜요? 의기양양하게 열정과 패기를 가지고 살기등등하게 예수 믿는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다 끌고 와야 한다는 신앙적인 열정의 개선장군이었지만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따랐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함께 스데반의 긴 설교가 사실이었고 베드로와 빌립과 수많은 자들이 예수를 전파하는 이 복음이 사실이라는 이것 앞에 꼬꾸라져 결국 다른 사람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신세, 너무나 다른 인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 사실을 8-9절에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행 9:8-9) 여러분,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한 상황이 되고 만 사울, 하루아침에 이런 모습이 된 사울은 이 사미일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듯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자신이 믿고 추구하였던 모든 것들을 돌아보았던 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주님은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만남을 예비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누군가에 대해 주님은 6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6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행 9:6) ‘성에가면 너를 만날 사람이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이 너에게 안수할 것이며 그 사람이 네가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울은 이렇데 주님을 만났고 주님이 이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제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고요. 하나님께서 왜? 여러분을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는 분명히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것은요,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주권적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왜? 여러분을 불렀을까요? 이것 깊이 생각해보셨나요? 사울은요,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여 복음을 전하도록 하신 것이고 반면에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도록 하시는 목적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하심이고 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인데,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이상으로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였고 자신이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붙잡았다고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서지 않았지만,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주님을 배척하였던 자들이 우리입니다. 우리도요, 살기등등하여 예루살렘에서 그 먼 길인 다메섹까지 당국으로부터 받은 합법적인 체포명령서를 가지고 간 사울은 아니지만 주님이 마음을 아프게 한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 우리를 예수님께서 개인적으로 불러 주신 이유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이고, 단 이 한 가지가 이유라는 사실 앞에 ‘사울아, 사울아’하면서 부르신 주님 또한 오늘 여러분의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여러분을 부르신 목적을 묻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바라기는 바울의 고전 15:10절의 고백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던 그가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먹지 않는 가운데 자신을 인도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었다는 고백을 한 사울이 된 것 아닙니까? 우리 또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을 성령으로 살려주셨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아주셨던 이것과,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권속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늘 감사하며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 이유,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주신 말씀을 생각하며 이 찬양 같이 불러봅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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