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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행 9:32-43)

 

여러분, 여성잡지의 제왕이라 부르는 에드워드 보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면 닥터를 만나기 전에 기다리면서 보는 것이 있고 약국에서 약을 타기 위해 기다리면서 보는 것이 있습니다. 심지어 미용실에서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기 전, 보는 것이 있는데, 대개 많은 여성들은 여성잡지를 보지 않습니까? 이 여성잡지의 최초 보급자가 바로 이 보크입니다. 6살 때 가난에 못 이겨 이 미국에 와, 신문팔이 등등 어렵게 고학으로 공부하여, 세계적인 언론인이 되었고,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일인 여성을 위한 잡지를 만들어 보급시킨 장본인입니다. 가난한 이민자에서 성공한 잡지 경영자로, 그리고 자선사업가가 될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자신의 할머니의 한마디이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그에게 “어디로 가든지 네가 그 곳에 있기 때문에 그곳이 무슨 모양으로라도 너로 하여금 네가 있는 곳을 달라지게 하라”고 하였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도 그의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었던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가 바로 베드로이고, 사도행전은 다시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본문부터 12장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본문의 내용은 베드로가 애니아를 치유하고, 그리고 다비다를 살린 이야기이고 사울과 고넬료에 관한 이야기로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나누면서 오늘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베드로가 이 애니아가 있는 곳으로 간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이곳에 간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려면 다시 사도행전 8:25절로 가야 합니다. 행 8:25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들어보세요? “두 사도가, 그러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이 두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언하여 말한 후, 어디서요?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새 바로 안 가고 사마리아인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니라”(행 8:25) 이 말씀대로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간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함을 듣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 사마리아에 먼저 누가 복음을 전하였습니까? 바로 빌립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하는 소식을 듣고 급히 사마리아로 갔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안수하였는데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능력과 기적이 그들에게 임하였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나눴던 말씀입니다. 기억나시죠? 그리고 이 두 사도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격려한 후, 사마리아 여러 촌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말씀이 사도행전 8장 25절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시작인 9장 32절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행전 8장 25절 이후의 말씀들은 오늘 본문의 말씀 시작인 9장 32절의 내용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8장 26절부터 9장 31절까지의 다른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내용이 바로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를 전도한 내용이고, 핍박을 받아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기록들이고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려고 다메섹까지 갔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과 함께 사울이 예수님을 위한 사도로 전환된 내용들이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빌립과 사울, 이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중간이 삽입하였는데, 누가는 왜? 이렇게 다른 내용들을 중간에 삽입한 것일까요? 누가의 글을 쓰는 법칙이라 그렇게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어떤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빌립의 이야기나 사울의 이야기나, 그리고 베드로의 이야기 모두 다 한 방향으로 향하도록 하는 의도이고, 성령께서 복음의 문을 이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그 안에 의도적으로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시의 솔직한 상황은 문화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볼 때 복음이 이방인을 향할 수가 없었지만 성령의 놀랍고 절묘한 역사를 통해 이방을 향한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빌립에게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만나라고 하였고, 심지어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과, 사울이나 베드로를 통해서도 성령께서 열고 있다는 사실이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게 되었다는 사실이기도 하고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사마리아도 복음을 들었다 하여 급히 사마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 후의 이동경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32절을 봅니다. “그 때에, 어느 때입니까?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입니다)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행 9:32) 베드로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 룻다에 사는 성도들을 만나러 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 말은 다른 표현으로 룻다에 믿는 이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그들을 격려하려고 심방을 간 것인데, 그곳에서 한 사건을 만난 것 아닙니까? 먼저 이 룻다는 어디에 있는 곳일까요? 룻다는 사마리아와 유다 땅의 중간 지점이 되는 해변에 가까운 지역입니다. 이 룻다로 성도들을 심방하려고 베드로가 간 것이라고 32절이 밝히고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이곳에 성도들이 있었을까요? 충분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이것도 빌립의 복음전파의 결과입니다. 사도행전 8장 40절에 보면, 빌립이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한 후,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가이사랴에 이르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아소도와 가이사랴를 잇는 길 가운데에 이 룻다가 있고, 빌립이 룻다에도 들려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 그래서 빌립의 전도결과로 이 룻다에도 예수를 믿는 성도가 생긴 것입니다.

 

이 룻다에 베드로가 믿는 성도들을 만나려고 갔던 것이고 아마도 믿는 성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여하튼 이 룻다에 갔는데, 그곳에서 한 중풍 병자를 만난 것 아닙니까? 33절을 볼까요?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행 9:33)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보는 것은 만남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룻다에 믿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심방을 한 베드로가, 8년 동안 자기 스스로 옷도 입을 수가 없고 화장실조차도 갈수가 없는 이 애니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만남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만남이란 대화적 관계를 세우게 하고, 서로의 상호성과 서로의 존재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게 합니다. 안 그래요? 그래서 만남이 우정으로 발전되고 사랑으로도 발전되는 것이 만남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아닙니까?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과 만날 수 없었던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만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우리를 사랑하신 당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먼저 이 만남을 계획하셨으며,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이 되도록 하셨다는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면서 주 앞으로 나오게 되었는데, 이 은혜를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만남을 생각하다가 모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여러분, 모세의 만남은 어떠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기 전에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태어날 당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던 모세입니다. 갈대로 바구니 안에 담겨져 나일강에 띄워 보내졌던 그가 바로의 딸을 만났고, 애굽의 궁에서 공주의 자식처럼 왕자로 자라 부러울 것이 없는 그가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머니 요게벳과의 만남이 되게 하심으로, 아들 모세를 비록 애굽의 왕자로 지냈지만 히브리인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택한 히브리 백성으로 자라게 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자란 그가 자신의 힘으로 조국 백성들을 구원하려 했지만 결국 살인자로 도망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에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없는 그는 실패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모세가 꿈도 사라진 가운데, 이름 없는 목동으로서의 40년의 광야생활을 지냈고, 주름이 잡힌 노년으로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걸어야 하는 황혼의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호렙산에서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나무는 하나도 타지 않는 현상을 보는 가운데, 어릴 때 말로만 듣던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와 그를 만났고, 그를 부른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당신의 백성인 히브리 백성을 건져내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내라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모세가 되었는데, 그만큼 만남은 중요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알고 모시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에는 진정한 마음의 휴식 또한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게 되는 이 베드로와 애니아의 만남은 목자와 한 성도와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어떻게 말하고 있나요? 34-35절,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행 9:34-35) 마치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하고 있는 베드로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38년 된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베드로가“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애니아에게 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이 베드로의 능력을 누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누가는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애니아에게 이 말을 했지만 누가의 강조는 베드로가 한 것이 아닌 주님께서 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고, 주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결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주의 명령에 애니아가 즉시 일어났다는 것이고 주님의 주권적인 승리의 역사를 보였다는 것이며, 낫게 하신 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결과가 되게 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8년 된 중풍 병자가 일어난 가능을 만들었을까요? 세 번째로 그대로 믿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주의 명령은 ‘너를 낫게 하시니 지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명령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순종은 믿음의 결과이고,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따른 것이 순종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없는데 행동하는 것은 내 생각대로 내 인간적인 신념이나 철학이나 지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진짜 참 믿음은 기록된 성경의 말씀에 근거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참 믿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따르는 것이 정상이고 그 믿음 안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실존이 현존이 되게 하는 것이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뛰어 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래서 기적을 경험하려면 이성적과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애니아는 자기의 생각이 많고 자기의 말이 많은 모습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 말씀에 따라 그대로 순종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네 번째로 또 하나의 사건입니다. 룻다로부터 10마일 떨어진 바로 가까운 욥바라는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36-37절을 볼까요?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 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행 9:36-37) 오늘 이 구절에서 이 다비다라는 여 제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그를 도르가라고도 부르는 여인이고, 이 여성이 선행과 구제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죽었다면 무덤으로 가져가야 하는데 오늘 구절에 보니까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게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다 죽습니다. 안 그래요? 아무리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해도 나이 들고 병들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워놓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의 죽은 이 사실을 1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알리려고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이어서 하고 있는데 38-39절을 봅니다.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행 9:38-39)

 

그러면 죽은 이 여인의 소식을 왜? 10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베드로에게 알린 것일까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책임자이니까, 와서 천국환송예배를 거행해달라고 알린 것일까요? 아니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누가는 이 도르가라는 여인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하나님의 마음, 어느 특정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시선이 이제 이방을 향하게 되는 그 결정적인 한 인물을 이 여인을 통해 꺼내고 있는 누가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즉 이 여인의 선행과 고넬료의 선행, 그리고 이 여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과 고넬료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은 같다는 것을 누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고, 이 도르가라는 여인에 대한 아주 짧은 설명 안에는 엄청난 내용이 담긴 선행과 구제는 예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다음 장의 고넬료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고넬료에 대해 “내가 네 기도와 구제를 보았느니라”라고 하였던 이것과 지금 이 도르가에 임한 것이 같은 문맥을 이어지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슬픔 가운데 그를 무덤으로 보내지 않고 시체를 곱게 씻어, 다락으로 가져갔고 룻다에 있는 곳으로 뛰어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8년 된 중풍 병자를 고친 베드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도착한 것이고, 다락으로 올라갔는데, 주변에 과부들이 베드로에게 한 옷가지를 보여주면서 도르가가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이라고 하며 자신들을 격려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손수 만들었던 속옷과 겉옷이라고, 예수님의 사랑이 깃들음을 말하면서 울고 있는 그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38-39절입니다.

 

그것을 들은 베드로가 40절을 행합니다. 40절입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 이 말씀에도 마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죽은 딸 앞에서의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베드로 또한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리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는 모르지만 이 여인을 살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이었을 것이고,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행하는 이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가난한 자를 도와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하였을 것인데, 하나님이 그를 살립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누가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가져 보았습니다. 그것이 상식적인 입장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상식은 베드로를 가리켜 미련한 자라고 비웃는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식의 결론은 죽은 자는 살아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앞에는 시체가 있고, 그도 또한 시체를 보면서 기도하고 있는 그를 향하여 상식은 미련한 자라고 비웃는 그의 비웃음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은 상식을 뛰어 넘는다는 것 아닙니까? 누가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비록 죽은 다비다의 시신을 보고 있었지만 다비다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품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다비다를 보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도 의심하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다비다야 다시 일어나라’라는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조국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조국 대한민국은 죽은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대통령 하야가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어느 교회 지도자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앞으로 나가 머리에 재 뿌리면서 회개하자고 하는 자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미스바로 모이자고 하지도 않고, 한 여인의 책임만 거론하면서 물려나야 한다고만 하지, 내 죄 때문이라고 하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고 죽은 다비다와 같은 현실 아닙니까? 이 절망감을, 이 무척이나 슬픈 이 현실을 어디로 끌고 가야합니까? 기도의 자리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 미국에 있다고 이 현실을 그리 직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나, 경제나, 심지어 다원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 교회나, 영적지도자들의 타락 등등은 너무나도 심각한데 어느 누구도 시체가 되어 버린 조국을 향하여 한국 영적지도자들을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조국의 회복은 하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주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직시하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 회복이 시작됩니다.

 

회복의 결과가 41-42절에 나오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1-42) 기적의 결과는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켰더니 그가 일어났고, 성도들을 불러 그의 산 것을 보여준 결과입니다. 그런데 온 욥바사람이 이 소문을 듣게 되었고 살아난 다비다를 보게 된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믿더라’가 아니라 ‘주를 믿더라’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돌아온 것이고, 하나님이 기억할 구제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사랑하는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치고 다비다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애니아를 고치시고 다비다를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죽어버린 조국의 아픔을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갈 때 다비다를 살린 것처럼 우리를 비롯하여 대한민국을 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봅니다. 혹시 여러분이 영적으로 자고 있지는 않는지, 영적으로 죽어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면서 살리시는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다시 살아나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고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는 역사’가 여러분에게 임하여 영적인 해방을 누리시는 여러분, 여러분을 통해 이루시는 승리의 역사가 나타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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