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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 말씀 제 10일 씨 뿌리는 비유(마 13:1-9)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 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사순절 기간이기에 오늘은 사도행전을 잠시 접고 사순절 기간에 묵상하는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보통 자신이 듣는 소리와 내는 소리를 연결시키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그것을 가리켜 음치라고 합니다. 음치하면 부르는 사람도 괴롭고 듣는 사람은 더 괴로운 것으로, 이것은 평소 말할 때 목소리의 높낮이는 구분하지만, 음악에서만 구분하지 못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는 뇌의 특정 영역 사이에서 소통이 원활히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라 하는데, 치료는 끊임없는 연습과 전기적인 에너지가 뇌에 가하면 탈피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비유는 자신이 음치라는 것이 가려져 있는 것처럼 사실적인 것이 가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비유를 사전은 무엇이라 정의하고 있을까요? 설명하고자 하는 사물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이라 하고 있습니다. 비유는 그래서 믿음으로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명료성과 심오성을 더해주고, 불신하고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는 특징이 있어 누군가 풀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기에, 본문은 아니지만 10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비유를 듣고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0절)라고 질문을 하니까 18절에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너희가 그 비유를 들었으니 그 비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라고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풀어주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에요? 예수님께서 어려운 진리를 일상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들과 비교하여 쉽게 가르치시고 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한두 번 이상 들은 말씀이 오늘 본문일 것입니다. 그래도 다시 듣겠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해봅니다. 본문에 등장되는 장소는 밭입니다. 즉 본문은 네 개의 밭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의 농사법과 다른 팔레스타인의 농사법을 엿보게 됩니다. 먼저 우리 농사법은 어떻습니까? 밭을 갈고 그 다음 씨를 심지만 팔레스타인 농사법은 먼저 씨를 뿌리고 밭은 가는 특징이 있습니다. 농부가 씨를 한 움큼 잡아 씨를 뿌리니까 어떤 씨들은 자갈밭으로 떨어지고 어떤 씨들은 길가로 떨어지고 어떤 씨들은 가시덤불에 어떤 씨들은 옥토에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제 생각이지만 본문에는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예수님이 이 말씀을 전하실 때에 그 주위에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이 말씀을 전하였다고 생각이 드는데, 예수님은 이 뿌려진 씨에 대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뿌려진 씨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천국 말씀’입니다. 그리고 뿌려진 곳은 네 종류의 밭이지만 이 밭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보면 생명이 없고 말라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많은 결실이 맺어지게 하는 것이 씨로 이 씨가 네 곳으로 뿌려졌습니다. 그 네 장소가 어디입니까?

첫째가 길가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길가의 특징은 단단함입니다. 단단함은 물이 흐르지 않는 한 씨가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새들이 날아와 주워 먹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은 우리와 아주 밀접한 존재 아닙니까? 도시발전의 필수요 문명의 원동력이 길인데, 이 길은 단단할 뿐이지 정작 생명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안 그래요?

 

그러면 이 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세상의 교훈이고 장로들의 유전이며, 철학입니다. 세상에서 고품 있는 사람으로 칭호를 받게 하지만 정작 복음이 전해졌을 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길이고, 지킬만한 마음의 바탕이 없어 들었을 땐 좋은 것이구나 하여도 받아들이지 않고 바로 거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새들, 즉 사단이 씨를 먹고 만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과 가나안을 따르지 말라고 한지 아세요? 다신교이고 물질적 풍요를 상징하는 종교와 정치를 결합시킨 이 이데올로기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을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신을 조작합니다. 무당이 푸닥거리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길은 이런 결과를 만듭니다. 좋은 것 같지만 생명과는 거리가 먼 것이 바로 길입니다. 길은 천국도 세상의 탁월하거나 지식이나 이성적 사유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수용되지 않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길입니다. 요 1:12절 말씀인,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를 듣지만 들은 것에 기울이지 않고 믿음이 없기에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 길의 회복은 갈아엎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갈아엎기 위해 주님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당신이 친히 찾아오신 것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친히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이 현실에 친히 찾아오신 것인데, 정작 이 현실은 알지도 않는 현실입니다. 무엇이에요? 요 1:15절과 1:11절 말씀처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가 되었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 1:11)이었습니다. 그래서 친히 우리가 알아보고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고 친히 죽으심으로 우리가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길이 생명이 없는 가운데 영원한 죽음의 자리에로 가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 3:16절 말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라고 이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길은 돌밭입니다.

돌밭은 보기는 좋지만 길가보다 더 힘든 곳이 돌밭입니다. 돌밭에 대해 본문은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라 했듯이 별로 영양가가 없는 곳으로, 말씀을 듣고 좋은 인상을 받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하니까 결국 햇볕이 말라 죽게 마는 것, 복음을 들어 잠시 기쁘게 받아들었지만 환난이나 핍박이 생기면 믿음의 뿌리가 없어 쉽게 버리고 마는 특징이 있어 익숙한 단어가 “곧” “즉시” “잠시” “잠깐”이라는 단어를 양산합니다. 이런 사람의 다른 표현이 감정적인 사람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순간적인 충동, 감정적으로 감동을 받아 믿음이나 변화나 헌신을 결심했지만 그것을 지키지 못해 한 순간의 감정에 그치고 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기쁨으로 받지만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환난이나 박해가 오면 곧 넘어지고 배반하는 것일까요? 복음을 전체적으로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좋은 것에만 귀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죄 사함과 같이 수반되는 것은 회개인데, 회개까지 못 가는 것이고, 칭의 또한 믿음에 이르는 의로운 삶이 요구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순종이 따르지만 환난이 오면 이것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으로 진리를 받아드리는 주관적이다 보니 자신이 선호하는 것만 따르는 모순을 만듭니다. 이 돌밭의 치명적인 약점은 비록 반쪽이라도 진리를 어느 정도는 깨닫지만 스스로 속이고 맙니다. 마치 발람처럼 내가 원하는 말씀을 듣고자합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까? 사무엘같이 “주여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가 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의 밭이 가시떨기입니다.

본문에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공동번역에서는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지만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혔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에 대한 해석을 2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마가는 ‘기타 욕심’을 덧붙여서 적고 있습니다. 막 4:18-19절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리우는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요”(막 4:18-19) 누가는 ‘일락’이라는 단어를 넣었습니다. 눅 8:14절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리와 일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요”(눅 8:14) 그러면 이것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가시밭은 토양이 좋아 씨가 뿌리까지 내리도록 하지만 그 땅에는 이미 가시나무의 뿌리가 있기에 씨가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기도 전에 훨씬 더 빨리, 크게 자라버린 이 가시떨기가 열매 맺는 것을 막아 버립니다. 즉 어떻게 보면 돌밭과 달리 뿌리가 생겨 나름대로 자라나지만 햇빛을 받지 못하기에 결국 열매를 손상시키고 말아 열매가 없는 모습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가시 떨기’를 본문은 무엇이라 합니까? 믿음의 손상을 가져오는 ‘세상의 염려’이고 ‘재리의 유혹’이고, ‘세상적인 욕심’이며 ‘일락’, 즉 순간적인 쾌락을 말합니다. 본문은 가시나무가 열매를 맺으려하는 ‘기운을 막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여기 ‘기운’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문는 ‘프뉴마’라고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결국 ‘성령’을 가리키는 말로 세상적인 그러한 가시나무의 마음들이 성령의 역사를 막아 버렸다는 의미를 말합니다. 싹만 나오게 할 뿐 계속해서 자랄 환경이 제공되지 못하도록 만들어 복음을 들어 일단 수긍은 하되 열매 맺기까지 자라지 못하는 자리, 세상의 것에 넘어져 중도에 복음을 포기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엡 4: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 4:13)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합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미암아 신앙의 지구력을 있게 하고 결실을 위한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땅입니다. 본문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라 했습니다. 지금까지 뿌려진 씨는 다 좋은 씨입니다. 아무런 손실이 없는 길은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씀을 듣고 깨달은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주님은 좋은 땅에는 아무런 돌멩이나 가시떨기도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좋은 땅에도 돌멩이와 가시떨기가 있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가 우리의 속에 남아 있는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다행히 죄의 권세로부터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옥토일 때 가능하게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옥토가 될 수 있습니까? 개간이 되도록 내어 드리는 순종이 옥토가 되게 합니다. 이제 봄이 다가오는데 봄이 되면 농부는 밭은 개간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땅은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하고 또 그 땅에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개간이 되지 않는 다면 결실이 없게 된다는 말이고 기대한 것만큼의 좋은 결실을 맺지 못해 포기하지만 좋은 땅은 반드시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누가 좋은 땅이냐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요 순종으로 자리로 나가는 자입니다. 여러분, 들은 말씀을 깨닫는 자가 많은 결실을 맺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결실들은 말씀을 잘 깨달았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실천은 결국 무엇을 요구합니까? 순종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실천해야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는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옥토는 영양소를 풍부히 담고 있어 한번 떨어진 씨가 싹을 내면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게 해줍니다. 그곳은 험한 바람이 온다하더라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고백과 찬양을 하게 되어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되 끝가지 받아들여 의와 생명의 열매를 맺는 신실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과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요, 순수하고 선한 마음이 되어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내적 사역을 방해하지 않고 말씀의 성장을 위해 내어 줄 때 옥토가 됩니다. 이 일을 누가 도우십니까?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말씀이 잘 성장하여 결실 하도록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과 돌밭과 같은 장애 요소를 제거해 주고 가시떨기와 같은 세속적 염려와 물질적 탐욕을 정화시킵니다. 그러면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2-23)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성령의 감동은 말씀이 결실 하도록 하시고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갖게 하고 항상 끊임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게 만듭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883년, 진화론을 생각해낸 영국의 다윈은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 상태를 찾아 나섰습니다. 남양군도에 간 다윈은 대단히 미개한 식인종 무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거의 짐승에 가까울 정도로 원시적이었습니다. 다윈은 이러한 인종은 결단코 개화되거나 발전될 수 없는 부류의 인종으로 확신하였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자기의 진화론의 이론을 뒷받침한다고 믿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후, 다윈은 다시 그 남양군도의 섬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은 섬 여기저기에 교회가 들어서 있고 학교가 있고 짐승 같던 야만스럽던 식인종들이 집을 짓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30여 년 전의 식인종들이 옷을 입고 모여 함께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다윈에게는 너무나 충격이었습니다. 어떻게 있을 수 있나 알아보니 ‘패톤’이라는 선교사가 그 섬에 하나님의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희생하고 헌신한 결과였습니다. 옥토는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길가이지만 그 길을 쟁기로 갈아엎고 자갈들을 제거하고 가시덤불을 제거할 때 옥토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게 되도록 내어드림이라는 순종이 따릅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내어드림이라는 순종을 하기 원합니다. 사순절기간입니다. 우리가 옥토에 뿌려진 씨가 자라 많은 열매가 맺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죽으러 가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주님을 바라보고 옥토에 뿌려져 많은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하시는 주님,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사실을 이번 한주간도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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