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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받은 은혜와 앞으로 주실 은혜

(신 34:1∼8, 빌 3:12~14)

 

오늘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시간입니다. 벌써 금 년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고, 이제 새해를 기다리는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새해를 맞는 분수령에 서서 각자가 느끼는 것도 다양하고, 많은 차이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특별한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성경의 인물 중 모세와 사도 바울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먼저 모세입니다. 신명기 34장 1절에 보면요?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렀다고 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모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마도 지나온 시간, 즉 애굽에서 이끌고 나온 근 200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나왔을 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게 하셨던 사건을 생각했을 것이고,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과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거친 땅에 하얗게 덮인 만나, 그리고 그 위에 쏟아져 내린 메추라기 떼들, 시내광야에서 있었던 금송아지사건과 고라의 반역 등등이 만감으로 교차했을 것입니다.

 

이 교차가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희망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신 그 땅, 가나안을 보면서 그토록 사모하던 목적지에 도달한 그에게 큰 감동이 물밑 듯 밀려왔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같이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했었죠? 4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정작 본인은 주시겠다는 그 땅을 보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그 땅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났고, 5절에 밝히듯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습니다. 올라가서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그 땅을 볼 때, 그리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서운한 마음이 있었을까요? 성경은 밝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인간이기에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지만, 그는 믿음의 눈으로 곧 들어가게 될 하늘의 가나안 복지를 바라봤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그를 이 자리에 있게 했을까요?

 

첫째가 하나님을 대면함입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10절을 보면, “그 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는 자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듯이 아주 가깝고 친밀하게 살았다는 것이고,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는 것이에요. 즉 사 40장 31절 말씀 그대로,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의 삶, 여호와를 앙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명에 신실했습니다. 11~12절에?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라고, 호렙산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 받은 그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신실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2023년에 이렇게 하지 못했다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다시 한번 결심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빌립보서를 읽었는데, 빌립보서는 바울이 순교하기 한 5, 6년 전쯤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대에 접어들었을 나이, 그리고 로마 감옥에 수감 되어 있는 신세이었습니다. 30여 년 동안, 예수를 처음 믿은 이후로, 복음의 열정에 사로잡혀 소아시아를 누비며 많은 사람을 구원했고, 중요한 도시마다 교회를 세웠으며,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였습니다.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발을 들여놓음으로, 기독교가 세계 역사가 되도록 자리매김하는데 영웅적인 업적을 남겼던 바울은 13절과 14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쉽게 말하면 “나는 목표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뒤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푯대를 향해서 갈려간다는 합니다. 어떤 푯대일까요?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예수 그리스도에게 내가 잡힌 한 가지 일, 이것이 그가 푯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혹독하게 핍박했던 자죠? 예수를 믿는 사람을 살려 두고 싶지 않아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를 사로잡았잖아요?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 “자기가 예수님에게 잡혔다. 이제는 주인이 예수님이 되셨다.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비참하다고 느꼈을지 모르죠?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이 왜 자기를 갑자기 붙들고, 자기를 손에 꽉 쥐시었는가를 안 후부터,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 솟구쳤을 것이고, 예수를 핍박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이 영광스러운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할 수 있는 사도로 불러 주셨다는 이 사실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찬양의 가사처럼, [죄악에 썩은 내 육신을 주님이 쓰시려 했네.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몸, 주님이 쓰시려 했네. 먹물로 칠한 내 육신을 주님이 희게 하셨네. 십자가 보혈 증거하라고 주님이 살리셨네. 평생 갚아도 빚진 자 되어 주님의 빚진 자 되어 주님 가신 길 택하였건만 눈물만 솟구치네, 생명 주신 이 주님이시라. 능력 주신 이 주님이시라. 말씀 전하여 복음 전하여 주님의 빚을 갚으리]

 

그의 푯대는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삶,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더 알기를 심히 원했어요? 빌 3장 10절과 11절을 보면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러 하나니”라고 고백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예수처럼 욕먹고 예수처럼 매맞고 예수처럼 굶주리고 예수처럼 멸시받고 하는 일을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예수님처럼 되고 싶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 싶기에,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에 자기도 죽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능력을 자기도 체험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간절한 소원, 기대가 20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다시 한번,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만이 그에게 있어서 인생의 유일한 목표다, 이 일을 향해 그가 인생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인생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있는지 우리 모두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에게 붙잡힌 자, 예수님의 은혜에 빚진 자, 그래서 사나 죽으나 우리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존귀케 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소박한 꿈, 즉 이것을 놓고 나는 인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는 목표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목표는요?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입니다. 목표를 정할 바에는 사도 바울과 같은 목표를 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종말에 마지막으로 남게 될 질문이 무엇입니까? ‘역사가 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우리 후손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입니까?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까?’ 이것입니다. ‘과연 내가 예수님 앞에 예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이것이에요? 왜 그렇습니까? 역사의 승리자는 예수님이기에, 이 세상은 다 심판받아 없어지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그분이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을 통일하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 흠과 티가 없는 거룩한 백성들이 사는 하늘의 나라를 완성하시고 그분이 영원토록 다스리게 되기에 마지막으로 남는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만날 분도 예수님입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우리의 인생을 바로 살았느냐 바로 살지 못했느냐를 평가하는 기준이 돼요? 그러므로 마지막에 가서 큰소리를 칠 수 있는 예수님이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세운 이 목표, 푯대를 향해서 좇아간다는 말, 달려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형편은 감옥에 수감 되어 있고, 언제 풀려 나올지도 모르고, 이미 불길한 죽음을 예감하고 있고, 나이도 지금 60에 접어들고 있으며, 몸에는 여전히 괴롭히는 가시가 있어서 늘 어떤 통증을 달고 살고, 불편을 느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서 달려가는 신앙생활을 하겠다’라고 말하고 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은요? 달려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요?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는 작은 예수의 꿈을 이루는 것입니다. 바울은요? 이것을 위해 두 가지를 포기했습니다. 첫째가 12~13,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 무엇이에요? 현재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앞만 쳐다본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현재에 안주하면 영적으로 비만증에 걸리기에 바라고 원하기는 이제 2023년은 2023년으로 접어 두고 2024년은 앞을 내다보고 뛰뒤기를 원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즉 뒤에 있는 것, 지나간 것, 과거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과거는 아름답지 못한 경력이 있습니다. 핍박자, 훼방자, 포행자, 용서받을 수 없는 과거의 경력, 전과가 있어요. 그것을 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이미 다 용서하셨기 때문에, 이제 오직 앞만 내다 보고 달려가기를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실패하고 상처 입고 원한을 갖고 한때의 잘못된 판단 때문에 지금까지 고생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집니까? 아픕니까? 고통스럽습니까? 원망스럽습니까? 과거는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에 현재를 무력화시키고 앞으로 달려가는 일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돌아보지 말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버리되 예수 안에서 다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그래서 오직 주님만을 나의 생애 최고의 기쁨으로 놓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달려가는 선수들처럼 해보고 싶다고 마음에 결정하셨습니까?

 

그런 우리를 주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요한복음 14장 21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임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무엇이에요? 독특한 은혜를 주님이 주신다는 것, 항상 주목하실 것이고, 주목한 다음에 자기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주실 것입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은 그를 꺾지 못했고, 나이도 꺾지 못했고, 그 몸에 있는 병도 꺾지 못했으며, 다가오는 죽음의 불길한 예감도 그를 기죽지 못하게 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힘이 솟았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라도 지고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이 솟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우리 앞에 무언가 밝은 미래를 점칠 수가 없는 답답한 환경만이 놓여 있다 해도 우리를 절대 꺾지 못할 줄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푯대를 향해 바로 달려가기만 하면 주님이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새 힘을 날마다 주실 것입니다. 롬 8장 35~39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내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내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아무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할렐루야! 모세처럼 하나님을 대면하는 우리가 되고, 바울처럼 푯대를 향해 달려감으로 바울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하는 2024년 새해가 되리라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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