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포기할 수 없는 존재 란다
(에스겔 37장 1~14절)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요? “너는 포기할 수 없는 존재란다” 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절망 속에서 받은 마른 뼈 환상이 오늘 본문입니다. 만약에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라고 말씀하신다면, 물련 이런 경우가 없지만, 만약입니다.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그 여인이, 아이 셋을 낳은 후, 바람이 나서, 다시 창녀가 되었을 때 “어서 가서 그녀를 데려오라.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더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신다면, 아무 말 없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호세아 선지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감히 흉내도 내기 힘든 순종을 보인 사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왜 그런 명령을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하실 때도 있고, 끝이 없어 보이는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 순간들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길을 여러분은 걸어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에스겔도 사람인지라 무척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이렇게 무너진 것이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남 유다는, 당시 전 세계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강대국 앗수르와 이집트, 그리고 신흥 강대국 바벨론의 사이에 끼어 있던, 작은 나라입니다. 막강한 제국들 사이에서 수없이 크고 작은 전쟁들을 만난 유다입니다. 마치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것과 같았습니다. 마침내 바벨론이 패권을 잡죠? 그리고 예루살렘은 초토화되었습니다. 수많은 왕족과 귀족과 종교 지도자들이, 포로로 끌고 갔어요? 세 번에 걸친 바벨론의 침공으로 유다 사람들은, 세 번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고, 당시 25세 청년 에스겔도 다른 포로들과 함께 이 제2차 침공 때 끌려갔습니다. 그때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제가 여러분에게 카톡으로 베르디 ‘나부코’ 즉 느부갓네살왕이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거의 다 보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포로가 된 그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요단강을 그리워하며 우는 모습을, 노래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제사장 가문이요,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마치 율곡 이이와 같은 자가 바로 에스겔 그였습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깊은 영성으로 가득했고, 지혜로운 처신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그는, 차세대 지도자로 장래가 보장되어 있던 엘리트였습니다. 항상 열정으로 가득했던 그였는데, 꿈도 이루기도 전에, 바벨론 제국의 무시무시한 침공으로, 예루살렘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고, 자신의 꿈마저 사그라져 버렸습니다. 포로로 끌려가, 머나먼 타국 땅, 이방 신들의 우상으로 가득 찬 바벨론에 머물면서,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꿈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3차 침공이 시작되었고, 결국, 예루살렘 성전까지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살육당하였고요? 심지어 시드기야 왕은 두 눈까지 뽑힌 채,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슬픔에 젖은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는 고백이, 겔 24장 15~18절인데 들어보세요?
“인자야, 내가 네 눈에 기뻐하는 것을 한 번 쳐서 빼앗으리니, 너는 슬퍼하거나 울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지 말며,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20대 청년 때 끌려와서 15년이 흘러 40대가 된 그입니다. 포로로 보낸 그에게 무슨 미래와 소망과 비전이 있겠습니까? 바벨론은 무너질 것 같지 않고요? 날마다 세워지는 엄청난 도시의 화려함과 세계 최강의 군사력, 거대한 우상 신상과 신전에 압도될 수밖에 없습니다. 복수요? 허공에다 외치는 소리가 되고 말았어요?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나타나, 에스겔뿐 아니라 유다 사람들 전체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놀라운 비전을 보여주시죠?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의 마른 뼈로 가득 찬 무덤의 골짜기로 하나님이 인도하였습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음산하고 기분이 나쁜 뼈다귀들만 가득 찬 장소로 데리고 갔어요? 마른 뼈라는 것은요? 매장되지도 못한 채,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뜨거운 햇볕 아래 노출되어, 살은 다 썩어 없어졌고, 뼈들끼리도 서로 분리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어요?
그런데 이 장소로 하나님은 에스겔을 데리고 갔어요? 왜? 이곳으로 데리고 갔을까요? 말씀을 묵상하다가 드는 생각은, 이것은 그가 느끼는 감정에, 절망과 끔찍함을 더하라고 데리고 갔다는 생각입니다. 즉 이것을 보면서 철저히 절망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 나오는 모습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너희들, 갈 수 없는 현실을 더 느껴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데요? 인간의 힘으로 돌이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절망은 차고 넘쳤을 그가 아닙니까? 나라는 망했죠? 언제 돌아갈지 암담하죠? 아내도 죽었죠? 그런데 더 절망하라고요? 납득이 안되는 것을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도 납득이 안 갔습니다. 그런데 묵상하다가 답을 찾았습니다.
여러분, 유다가 어떤 나라였어요? 그래도 한때는요? 중동지역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참하게 멸망 당했어요? 북이스라엘의 아합의 집과 남 유다의 므낫세의 집을, 하나님은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주변 국가인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을, 도구로 사용하여 멸망시켰어요? 북 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 당함으로,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남 유다도, 북이스라엘 사람들이 만든 관습을 행해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일을 자행함으로 멸망했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므낫세 때였잖아요? 왕하 21장에 나와요? 므낫세의 손자 요시야가요? 율법책을 발견하고, 회개하여 우상을 척결하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절기를 회복하여 유월절을, 사사 시대 이후로 가장 온전하게 드렸어도, 하나님의 진노를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요시야가 기원전 609년, 애굽의 바로, 느고에게 죽임을 당하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삼았지만, 3개월이 지났을 때, 애굽의 바로 느고가, 그를 폐위시키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엘리아김을 여호야김으로 개명시켜,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요?
북쪽의 바벨론과 남쪽의 애굽의 공격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여호야김은, 조상들이 행했던 대로, 악을 행함으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게 되고 맙니다. 이 심판 도구가 바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입니다. 기원전 605년, 갈그미스에서, 애굽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느부갓네살왕은, 다음 해에 남 유다를 향해 밀고 내려옵니다.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항복하지만, 애굽의 느고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 사이에 외줄 타기를 해요? 예레미야 선지자가요? 수없이 바벨론을 섬기라고 전하죠? 그런데 듣지 않았어요? 친이집트 정책을 펼치다가, 기원전 597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맙니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르죠? 하지만, 석 달만 다스리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갑니다. 그에 대하여 우리는 11월 첫째 주일에, 37년간 감옥에서 살던 이 여호야긴을 나누었습니다. 기억나시죠? 이 여호와긴이, 포로로 끌려갈 때, 에스겔도 끌려갔어요?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우지만, 그도 반역을 일으키니까,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왕에게, 남 유다는 완전히 멸망 당하고 맙니다.
성경은요? 요시야가 죽었을 때도, 여호야김 시대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당했을 때도, 거듭해서 그 심판이, 므낫세가 우상을 섬기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아무런 생명력도 힘도 없는 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패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회개하는 것이 정상인데,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는 가운데 겪는 고통과 믿음이 없는 가운데 겪는 고통은 차원이 다릅니다. 믿음이 없이 겪는 고통은요? 더 독하게 하지, 부드럽게 하지 못합니다. 남을 탓해요? 부모를 탓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마른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 가운데 두시면서 문제를 정확하게 보게 하십니다. 즉 마른 뼈가 가득한 이 골짜기로 이끈 이유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아, 보느냐? 지금의 상황은 불가능 그 자체지? 너희들의 힘으로 인생을 살려고 했을 때, 나라를 운영하려 했을 때, 결과는 이런 비참함뿐이다. 이 상황을 이렇게 만든 것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니라 너희들의 교만 때문이고, 너희들의 주인인 나를 버린 죄 때문이고, 너희가 나를 왕으로 모시지 않고 버렸기에, 나도 너희를 버린 것이다.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철저히 절망을 느껴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항복을 선언해라. 그리고 나에게 전심으로 나오라.”
무엇이에요? 결국, 더 비참하게 만드시려고 해골로 가득 찬 골짜기로 데려가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사는 길이 무엇인지, 생명을 주시려고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물어요? 3절,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상식에 어긋나는 말씀을 하시죠? 생각해 보세요? 바짝 말라 있고, 사방으로 흩어진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요? 살 수가 없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답을 이미 아시고 계신다고 에스겔은 답을 하고 있죠? 답을 알고 계신 하나님이시기에 묻고 계셨던 것이에요. 즉 당신의 마음은 그것들을 살리시겠다는 의지가 이미 들어 있었고 그래서 물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지가 세워지면요? 불가능은 없어요. 개인이든, 가정이든, 교회이든, 나라이든, 하나님의 의지가 세워지면요? 불가능은 없습니다. 현재 처한 상황이 너무 힘들면요? 무기력한 절망감에 빠지는 것이 정상이고, 일찌감치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지는요? 움직이기 시작하고, 살아서 역사하십니다.
마른 뼈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 미국은 도시마다, 때론 마을마다 무덤들이 있어요? 어떤 집은 창문을 열면 바로 무덤을 봅니다. 그만큼 흔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무덤과 뼈는 달라요. 무덤은 그런대로 볼 수가 있지만, 뼈는 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마른 뼈들에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향한 계획이 있으셨고, 다시 회복시키시고 살려주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어요? 그것이 무엇이에요? ‘다시 살아남’ Revival, ‘부흥’, 입니다. 그러기에 에스겔에게 이 마른 뼈를 보여준 것은,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고,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살아난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살아납니까? 본문은 두 가지 요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8절입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더라.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까, 사방에 흩어진 마른 뼈들이, 각자 제자리를 찾아서 붙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힘줄이 붙었다고, 살이 입혀졌고, 가죽이 덮이면서, 제 형태를 찾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비전은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무너진 인생과 절망스러운 현실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회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듣는 것이 같이 나타납니다. 롬 10장 17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죠.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 어디서 난다고요? 들음입니다. 요즘의 들음은 다양하죠? 카톡으로, 유튜브로, 그런데 이것이 믿음으로 나가게 합니까? 다시 살아나게 해요? 생기지도 않고 살아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의 세상은, 암흑과 혼돈뿐이었지만, 하나님 당신의 입에서 나오면서, 하늘과 땅이 나뉘었고, 태양과 달과 별들이 생겼고, 산과 바다가 생겼으며, 수백만 종에 달하는 동식물들이 생겨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절망적인 현실 또한 돌파하는 비결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마른 뼈 같이 절망적인 상황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하여 영혼의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살길입니다. 이것이 살게 합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에스겔이 본 환상에는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뼈들이 서로 들어맞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며, 다 사람의 형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없어요? 생기가 없었어요? 그냥 시체들일 뿐이었습니다. 9~10절을 볼까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생기’는요?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골짜기의 뼈들에게 들어가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 되어 벌떡 일어섰습니다. 이 사람들을 가리켜 뭐라고 했어요? “극히 큰 군대”입니다.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사람들이, 원래 이 모습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원래 이 모습이 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마른 뼈가 되고 말았어요? 하나님은요? 당신의 백성들이 강하고 힘 있는 군대로,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결코 마른 뼈들 같은 비참한 모습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11절을 보세요?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뼈들이 말랐고 소망이 다 없어져 멸절되기까지 했다고, 그래서 좌절이라는 밭에, 절망이라는 바다에 빠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멀리하고, 교만하여 자기 스스로를 주인으로 섬겼던 그들이라고 묻고 계신 것이에요. 말로만 하나님의 백성이었지, 실제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그들의 현실을 묻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제 살리겠다고,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 군대가 되게 하시겠다고, 다시 회복하신다고 묻고 있습니다. 각개전투가 아니라? “군대”로서 함께 싸우게 하시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군대로 함께 부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여러분 또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포기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친히 당신께서 피 값으로 사셨기에,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을 살리려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 앞에 나갑시다. 이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