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행 5장 1~11절)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입니다. 여러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Tragedy)이라고 하면, 복수의 비극을 그린 [햄릿], 질투의 비극을 그린 [오셀로], 야심의 비극을 그린 [맥베스], 어리석음의 비극을 그린 [리어왕] 이것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도, 시작부터 비극이요, 그것도 세 시간 간격으로 부부가 죽어 나가는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이 비극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이 일이, 성령을 속인 일로 드러났고, 그래서 먼저 남편이, 이어서 아내가 세 시간 간격으로 죽어, 젊은 사람들이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를 지냈습니다. 천국 환송 예배, 입관 예배가 어디 있었겠어요? 정상적인 장례도 치르지 못한 가운데 땅에 묻혔습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헌금을 드리다가 이 일이 일어났으니, 두렵고 떨려서 헌금을 제대로 나 하겠어요? 그러나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했다고 하면서 오늘 본문은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즉 초대교회에 찾아온 엄청난 위기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은 독립적인 사건(Independent events)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나눈 4장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나누었던 4장 마지막 부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공동체, 천국의 모습인 초대교회 공동체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마무리를, 바나바 소개를 하였는데,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이다, 본명은 요셉이다, 별명은 바나바, 위로의 아들이다’, ‘그에게 밭이 있었는데, 그가 그것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는 이렇게 헌금을 하였다’를 나눴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밀접할까요?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는요?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특히 밭과 집 있는 자들이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헌금을 했어요.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습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이 없었던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바나바의 헌금에 이 부부가요?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더불어, 즉, [무엇과 함께하여. 무엇과 같이하여], 소유를 팔아’가 되었습니다. 분위기에 따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양을 만들었어요.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이 말씀이 1~2절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왜?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생각해 보세요? 일단 드리기 전까지는 자기 돈이잖아요? 헌금을 드리려다가 쓸 일이 생겨, 드리는 헌금을 조정할 수도 있잖아요? 이야기를 안 하면, 모르고 넘어가는 문제입니다. 안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 드리고 하는 전부 중 얼마를 감추었다는 것이고, 전부를 드린 것처럼 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꾸짖어요? 3절입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베드로의 말이 무엇이에요? ‘와우, 이렇게 큰 헌금을 드렸네요.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실 것입니다’가 아니라,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였다고, 성령을 속였다’라고 말합니다. 즉 ‘두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였다’라는 말을 한 것이에요. 왜요? 오늘 본문은 4장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했잖아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헌금을 자기 형편에 맞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드려진 헌금은 한마음과 한뜻으로 나누었고, 가난한 자들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사역에 동기가 바나바가 받는 칭찬을 자기들도 받고 싶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참여했지만,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을 흐려 놓은 결과로 칭찬이 아닌 하나님과 교회를 속인 결과가 되어, ‘두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속였다’라는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 즉 자원함과 의무와 규칙과 준비된 마음과 은혜의 응답이 아닌 헌금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이러한 마음으로 드리잖아요? 그런데 이 부부는 그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막 12장 41~4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뜰에 있는 헌금함에 헌금하는 사람들을 주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41절,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예수님이 보시는 것은요? 액수가 아니라, 헌신이죠. 그러면서 두 렙돈을 드린 한 가난한 과부 여인을 이야기해요. 42~44절입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렙돈과 고드란트는 성경에서 말하는 화폐 단위입니다. ‘렙돈’은요? ‘적은’이라는 뜻이에요.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입니다. 가치는 고드란트의 2분의 1정도, 고드란트가 1달러도 안 되는데, 1달러로 생각할 때, 렙돈은 50센트, 쿼러 두 개를 이 여인이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이 최선을 다해 헌신을 담은 헌금을 드렸다고 말씀하셨어요.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이라고, 그녀의 헌신에 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 부부는 이것이 아니라 드리고, 생색을 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찾아온 위기이었어요.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공동체가 무너져 버리는 상황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가장 완벽한 공동체를 에덴동산에다 만들었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예루살렘교회에서 나타나고 있었는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를 한 것입니다. 바나바로 인하여 교회 전체가 큰 감동과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던 것이, 질투와 칭찬을 받고 싶은 것이 같이 어울려, ‘우리의 땅을 팔아 헌금하자고, 무엇인가를 보여주자고’ 하였고, 부랴부랴 땅을 판 나름의 귀한 일을 했겠지만, 일부를 감추고, 전부를 드린 것처럼, 위장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동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보,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거야?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거야? 바나바보다 좀 많이 내서, 이번 기회에 사도들에게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자, 분위기가 안 하면 눈치가 보이잖아? 솔직히 아들이 이번에 대학원에 들어가 돈이 좀 필요하잖아. 그리고 가을에 시집가는 큰딸을 그냥 보낼 수 없잖아? 일부만 내자’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충분히 할 수 있는 결론이죠. 안 그래요? 그런데 문제는요?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아니라, 즉 하나님에게 관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은 사탄의 속삭임에 자기들이 똑똑한 합리적 결론(Reasonable conclusion)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야, 역시, 아나니아와 삽비라야. 대단해! 그들만이 낼 수 있는 액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성도가 우리 교회에 꼭 필요하다, 교회 성장에 큰 힘이 되는 분이다’라는 소리가 아니라 결과는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이 보고 계셨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렇습니다. 4절입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무엇이에요? ‘순수하지 않은 헌금,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거짓된 헌금’이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은 감동하고 손뼉을 치겠지만,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는 이야기이고, ‘하나님은 모르실 거야?’라며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와 같은 이야기가 바로 [아간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전투, 즉 여리고 성에서 얻은 것들은 다 바치라고 하셨고, ‘그다음부터는 너희가 다 가져라’라고 하셨는데, 이 명령을 어기죠. 물건을 몰래 훔쳐, 자기 장막 바닥에 깊이 감춥니다. 사람들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리라고 생각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한 것이다” 이었습니다. 어떻게 성령을 속일 생각을 했냐?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런 거짓을 할 수가 있느냐는 ‘꾸짖음(scold)’이었죠? 이 꾸중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죠? 5~6절,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즉각적인 심판(Instant judgment)이 임하였습니다. 엎드려져 혼이 떠난 죽음이었고,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과 들은 사람들이 큰 충격과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하나님도 몰라, 죽음까지 가지고 가자.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 정말로 죽음이었습니다. 여러분, 필요한 것이 꼭 있어서 일부만 드렸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있겠어요? 없죠? 그런데 문제는 다 드리는 것처럼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이며,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이어서 아내도 죽어요? 7절입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남편이 죽은 것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이 말은 삽비라도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즉 몰라서는 안 될 생명의 법칙에 대해 무지(Don't know)했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법칙은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삽비라에게 살리려는 생명의 법칙이 등장합니다. 8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무엇입니까? 너희 부부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다는 이것, 일부는 감추고 전체를 드린 것처럼, 한 이것이 전부냐고, 물었죠? 왜요?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남편이 죽었기에 너도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라(Repent and return)’라는 마지막 기회, 살리는 은혜를 준 것이죠. 아간도 마찬가지였었어요? 그가 범죄가 하나님의 진노였고, 아이 성 전투의 패배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기도하죠. 원인을 하나님이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요? 이것은 범인을 잡는 목적도 되지만, 회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열두 지파의 대표가 나와 제비를 뽑아요? 그랬더니 아간이 속한 유다 지파가 뽑힙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족장들이 다 나와 뽑으니, 세라 족속이 뽑혀요. 세라 족속 가문의 대표들이 나와 뽑으니까, 아간이 속한 삽디 가문이 뽑힙니다. 즉 아간에게 회개 기회를 끝까지 주고 있는 것이에요. 좁혀올 때, ‘범인이 바로 접니다. 잘못했습니다. 죗값을 받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어쩌면 성경은? 다른 기록으로 남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하나님도 모르겠지’ 하죠? 가족들과 돌로 쳐 죽어요. 그곳의 이름이 ‘아골 골짜기’, ‘괴로움의 골짜기’라고 부르잖아요?
베드로가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고 했을 때 삽비라가 ‘잘못했습니다. 일부는 감췄고, 전부를 드린 것처럼 하였습니다’가 되었다면, 오늘 본문은 다르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아닌 주어진 마지막 생명의 기회마저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라고 거짓 답을 합니다. 마지막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버렸습니다. 지금 가장 정결해야 할 초대교회를 위해 하나님은, 베드로를 통해 이 결론을 내립니다. 9~10절,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 가리라 하니,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그래서 11절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로 오늘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첫째로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온 위협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초대교회 성도들은요? 종교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였을 때,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기도로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내부로부터 온 위협이었고, 교회의 큰 위험으로 다가왔습니다. 이들은 헌신 된 일꾼이라고 들었던 자일 것입니다. 어쩌면 남편과 아내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과 상관없이 사탄에게 마음을 주었고,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속임으로, 이제 더욱 앞으로 복음을 들고 나아가야 하는 초대교회의 정결할 필요가 있어서, 즉 앞으로 복음 전파를 위하여, 순결하고 정결한 공동체가 되어야만 했기에 이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괜찮아, 하나님도 몰라. 까짓것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야’는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남에게 보여주고자 한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세 번째로 시작도 끝도 하나님이 주체라는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자를 하나님은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지?’라고 알아보며 나아오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기도 전에, 먼저 나를 아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평생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