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같은 복음인데 다른 반응을 보이네?”
(행 14:1~7)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요? “어라, 같은 복음인데 다른 반응을 보이네?”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서요? 햇빛이 내리비쳐도요? 어떤 땅에서는 꽃이 피고, 어떤 땅에서는 잡초만 무성합니다. 이유는 땅의 상태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복음도요? 같은 말씀이 선포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생명이 움트고, 어떤 사람은 분노와 거절이 커집니다. 복음을 듣는 순간에요? 마음을 드러내고 삶의 방향이 갈라진다는 것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14장이 바로 이 장면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 이고니온에 오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하였던 같은 복음을 이곳에서도 전합니다. 그런데 결과는요? 어떤 사람들은 믿어 구원을 얻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분노로 마음이 뒤틀리고, 끝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대적하고 완악해져서, 사도들을 해하려 했던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은 같은데, 반응은 이렇게 달랐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복음이 가지고 있는 특징 때문입니다. 즉 복음이 내면에 숨겨진 것을 드러나게 하고, 심지어 결단까지 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두 갈래 길이 생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생명이고, 저항하면 더 멀어져 결국, 사망의 길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도요? “그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나눌 때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 일행이 쫓겨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남동쪽 방향에 있는 도시로 갔습니다. 이곳은 약 100마일을 걸어 가야 나오는 도시로, 그 도시가 바로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곳으로 오려면 30여 개의 산과 험한 산길을 걸어야 나오는 도시입니다. 타우루스산맥과 술탄 산맥 사이에 놓여 있는 넓은 대지의 땅인 이 이고니온은, 매우 오래된 헬라 도시로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인데다가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이고니온’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한 도시이자, 소아시아 반도의 교통 중심지로서 군사적으로 비시디아 안디옥보다 훨씬 더 중요한 도시입니다. 이 이고니온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회당에 들어갔다고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로마제국의 지붕 아래에서 언어와 문화와 관습과 전통과 사고방식이 서로 다른 헬라 인과 유대인 허다한 무리 가요?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즉 특정 사람만을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는 하나님의 초청에 반응한 것입니다. 복음이 경계를 넘고, 민족의 벽도 넘고, 종교적 배경도 넘고, 과거의 실패와 현재의 연약함을 넘어 동일하게 선포된 복음을 듣고 믿은 것입니다.
즉 복음의 주인이, 바로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종이나 국적이나 출신 지역에 상관없이,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인종이 달라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있었던 일이 여기에서도 거부반응이 일어났습니다.
2절입니다. “그러나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무엇이에요? 100마일이나 걸어서 온 이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유대인과 헬라 인의 허다한 무리가 이 복음을 믿었지만, 모든 유대인과 모든 이방인이 다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이요? 그곳의 헬라 사람들까지 선동하여 복음을 영접한 이고니온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악감, 즉 나쁜 마음을 품게 하였다고, 믿는 것을 방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오늘 본문이 자세히 소개하지 않아 모르지만,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 믿은 어느 분이 계셨어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뜨겁고, 예배가 끝나면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것을 본 교회 오래 다닌 한 직분 자가 다가와서 “오늘 말씀 참 좋지요? 그러나 너무 깊이 빠지지 마세요. 교회는요? 다 비슷해요.” 이 말에 그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분의 말이 생각이 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들은 이 말씀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들고, 나중에는 의심이 자라나고, 결국, 믿음까지 자라지 못하도록 막아버리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바울과 바나바가 전한 복음은 결국 너희들을 통제하려고 한 것이니까 믿어서는 안 된다고 했을지도 몰라요?
여하튼 늘 “언젠가”의 이야기가 되어버리게 했습니다. 다 그냥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는데, 복음이 들어가니까 그 복음 앞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생겼지만, 반대로 불신의 사람도 생겼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냥 안 믿으면 안 믿는 것인데, 이고니온의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복음을 듣고 믿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악감을 품는 잘못을 범한 모습이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에게 무슨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나중에는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고, 이고니온에서 쫓아냅니다.
여러분, 스데반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로마 사회에 아무런 반란도, 폭력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한 복음은요? 기존 종교 권력과 질서를 흔들었고, 그것이 증오의 이유가 되어 거짓 증인들에 의해 “율법과 성전을 거슬렀다”라는 누명을 쓰죠? 실제로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지만, 군중은 선동되어 스데반은 결국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합니다. 이고니온과 정확히 같아요? 개인적 피해가 없잖아요? 그러나 집단 선동이 되어 결국 폭력으로 폭발하여, 그 불편함이 돌이 되어 날아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정직하게 일했을 뿐인데 “튀는 사람”이 되고, 신앙의 기준을 지켰을 뿐인데 “분위기 망치는 사람”이 되며, 침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집단의 미움을 받습니다. 직접적인 피해를 준 적은 없지만, 존재 자체가 불편해지는 순간, 사람들은 선동되고, 배제하고, 밀어냅니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 오래 머물면서 복음을 힘 있게 전합니다.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 “the message of his grace”을 증언하시니”
배척하는 무리의 선동하는 악행과 선동을 당하는 사람들의 무지가 반복되어도 기분 나빠하거나 개의치 않고, 이고니온에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주님을 위하여 견디며 담대히 복음을 전하였다고 말하죠?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로 당신이 그들과 함께하심을 친히 보여주셨다고 밝힙니다. 무엇이에요?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니까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하고 계시며 주님의 표적과 기사를 경험하게 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해 봅니다.
그래서 이러한 반응이 나타났다고 4절에 말합니다. “그 시내의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따르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따르는 자도 있는지라”
복음을 거부하고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는 유대인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와 반대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바울과 바나바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믿든지, 거부하든 지가 생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 10장 34절의 모습,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하신 결과가 생겼습니다. 결단 이전에 생기는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복음은요? 받아들이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이 있고 생명이 있지만, 반대하면요? 걸림돌이고 거침돌이 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자신들의 죄악과 치부가 드러나게 하고 어둠의 권세를 직접 건드리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엡 6장 12절에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라고 밝혔습니다. 복음이 사람을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둠은 가만히 있지 않고 복음이 전해질 때마다 항상 저항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거부한 이 유대인들이 어떤 수단까지 동원합니까?
5절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이고니온의 관리들까지 끌어 들었다는 것은 불법을 합법처럼 위장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여도 눈감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돌 맞아 죽을 일을 했나요? 아니거든요? 이들은 이고니온의 관리들까지 끌어들여 합법적으로 죽이려 하니까, 루가오니아 지방에 있는 루스드라와 더베 및 그 근방으로 피신합니다.
그 내용이 6~7절입니다.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이 루가오니아가 어떤 곳인가? 로마의 STAT 중 하나이고, 갈라디아 지방의 일부가 이곳입니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루가오니아, 브루기아, 비시디아가 있는데, 이 세 군데 중 하나가 바로 루가오니아, 이 루가오니아에 두 성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루스드라와 더베입니다. 급박하게 도망하여 피해 간 임시 피난처가 바로 이곳이고, 전혀 계획이 없던 곳으로 갔습니다. 그림이 그려지죠?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고니온에서 피해 갔지만 이것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누겠지만, 그곳에서 선천적으로 발을 쓰지 못하던 한 사람을 고치게 되고 자신의 영적 아들이라고 하며 크게 의지했던 디모데를 이 루스드라에서 만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과정 하나하나를 보게 되면, 먼저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풍토병에 걸려 목숨을 걸고 험한 산길인 타우루스산맥을 넘어 갈라디아 지방의 비시디아 안디옥을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쫓겨나요? 그래서요? 이고니온으로 갑니다. 이고니온에서도 쫓겨나죠? 그런데 이것으로 인하여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의 선포 말씀인 갈라디아서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기에 이고니온에서 떠난 그 발걸음은 도망도 실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길로 옮겨 가는 섭리의 이동이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쫓겨난 것처럼 보였고, 복음이 막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떤 박해도 말씀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문을 닫았지만, 하나님은 더 넓은 문을 여셨습니다. 돌을 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을 보존하신 것이었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거룩한 전환이었습니다. 이고니온에서 멈추지 않았기에 루스드라에서도 생명의 말씀이 전해졌고, 여러 도시가 구원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하나님은요?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않으시고, 방향을 바꾸십니다. 상처를 통해 후퇴시키는 것 같아도, 그 길은 더 큰 역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음의 사람은 압니다. 무엇을요? 쫓겨난 자리에도 하나님의 손이 있었고, 피해 간 길 위에도 하나님의 뜻이 흐르고 있었음을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걷는 인생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합니까?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이야기 속에 우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우리 인생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에 쓰임 받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본문은 놀라운 대비로 끝났습니다. 같은 복음, 같은 설교, 같은 사도들이 전했지만,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어 구원에 이르렀고,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여 마음이 악해졌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이에요? 그러기에 복음은 중립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생명 아니면 멸망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결단을 요구합니다. 받아들이면 생명이지만 거절하면 심판입니다. 복음을 오래 들었다고요?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교회 문화에 익숙하다고요? 이것도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는가가 아주 중요합니다.
계속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사실은 바울과 바나바가요? 반응이 갈라졌을 때, 복음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고, 메시지도 편한 것으로 낮추지도 않았으며, 다른 성읍으로 이동하면서도 계속 전했다는 것입니다. 왜냐? 복음은 거절당해도 멈출 수 없는 생명의 소식, 복된 소식, 구원의 소식,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생명의 소식은 말이 아니라 사건입니다. 복된 소식은 위로가 아니라 구원의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너진 인생을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죽어 있던 인생을 다시 살리러 오신 분이십니다. 상처를 덮어 주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죽음의 뿌리를 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가 돌아설 힘도 없을 때 그분은 이미 우리를 위해 길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다시 해 보라”는 말이 아니라 “이미 다 이루었다”라는 선언입니다. 절망의 끝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아니라, 절망을 끝내는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이름이 아니고, 과거는 더 이상 우리의 미래가 아닙니다. 죽음이 마지막 단어가 아니라, 부활이 마지막 문장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소식입니다. 이것이 복된 소식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며 부서진 마음을 다시 뛰게 하고, 멈춘 발걸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요? 젊은 시절, 한 친구와 함께 복음을 들었습니다. 같은 집회에 참석했고, 같은 설교를 들었고, 같은 초청의 말씀 앞에 섰습니다. 그날 외침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겠습니까?”이었습니다. 이 말에 빌리 그래함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했지만, 그 친구는 일어나지 않았고, “나중에, 오늘은 아니야.”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길로 흘러갔습니다. 한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인생이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복음과 점점 멀어지는 인생으로 끝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복음 앞에서의 ‘나중에’는요? 가장 위험한 거절입니다. 복음은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요, 초청입니다. 복음이 가는 곳에는요? 눈물이 생기고, 기쁨이 터지고, 저항이 일어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