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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가 너무 많아서 생긴 일

(사도행전 14장 8~18절)

 

 

여러분, 우리가 보통 SNS라고 하면,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등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좋아요’가 많아지면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의외의 문제들이 생깁니다. 예를 들면, 기대치가 계속 올라가지만, 다음에도 그만큼 받아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생깁니다. 그래서 더 받고자 경쟁이 됩니다. “좋아요”가 “나의 가치”처럼 느껴져서 이전보다 반응이 줄면 괜히 내가 덜 중요해진 느낌이 있고, 팔로워가 급격히 늘어나면, 원하지 않는 DM, 댓글, 스토킹 성 관심이 생겨 자신의 일상이 공개 콘텐츠가 되고 관계의 오해도 생깁니다. 그래서 자유는 줄어들고, 보이지 않는 부담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요즘으로 말하면 많은 팔로우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 여정을 가만히 따라가 보면요? 계획대로 흘러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늘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고, 대부분은 ‘쫓겨나는 일’이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그랬습니다. 말씀을 전했지만 결국 환영이 아니라 박해를 받았고, 도시 밖으로 내몰리듯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그들이 그곳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고니온으로 갈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반대를 사용하셔서 바울과 바나바를 동남쪽으로 약 백 마일이나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옮기셨습니다. 험한 산길을 넘고 또 넘어 도착한 그곳에서, 놀랍게도요? 많은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쫓겨남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은혜의 현장도 오래 가지는 않았습니다. 복음을 거부한 유대인들이 마음에 악의를 품기 시작했고, 그 악의는 이방인들을 선동하는 단계로, 나아가서는 관리들까지 끌어들이는 폭력의 위협으로 번져 갔습니다. 돌로 쳐 죽이려는 분위기 속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또다시 머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이고니온에서 남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진 루스드라로 갑니다. 하루 반나절을 꼬박 걸어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누가 보면요? 도망자의 길이고, 실패자의 길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길이 바로 다음 은혜의 현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요, 바로 그 루스드라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밀어낸 자리, 사람들이 돌을 들었던 자리에서 하나님은 또 다른 구원의 이야기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인간의 반대는 선교를 멈추게 하지 못했고, 오히려 복음을 더 멀리, 더 깊이 보내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루스드라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함께 보게 될 것입니다. 8절을 볼까요?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여기 한 사람이 등장하죠? 본문은 그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가 앉아 있었다.” 그가 어디에 앉아 있었을까요? 집 안? 조용한 곳? 아닙니다. 사람들 오가는 야외 광장이었습니다.

 

누가는요? 여기에서 ‘구걸했다’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만,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 걷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계를 꾸릴 방법이 거의 없었기에 그렇습니다. 누군가가 데려다주지 않으면 이동도 어려웠고, 결국 사람 많은 곳에 앉아 도움을 기대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앉아 있었다’는, 잠깐 쉬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리에 삶을 걸고 버티고 있었다가 됩니다. 희망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자리에서, 내 인생은 여기까지라는 포기에서 앉아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왜냐? 의사의 눈으로 보기에, 그는 분명히 치료 불가능한 사람, 의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인생의 가능성이 닫혀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을 합니까?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9절,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이 ‘들었다’라는 말은요, 단순히 소리를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이 그의 귀를 지나 가슴 깊은 곳까지 ‘내려갔음’을 말합니다. 포기와 체념이 켜켜이 쌓여 있던 장소인 마음 깊은 곳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닿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해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놀라운 장면입니다. 보세요? 그는 아직 일어서지도 않았고, 아직 걷지도 못하고 아직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먼저 생겼습니다. 처음으로 자신의 처지가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평생 자신을 바닥에 묶어 두었던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사실 바울과 바나바는요? 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회당에 먼저 들어가 복음을 전했다는 구절을 계속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루스드라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야외에서, 열린 공간에서, 누구든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바로 이 사람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 바뀌는 순간은요, 환경이 바뀔 때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질 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미 마음은요? 일어서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순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이 루스드라에 회당이 있었다면, 바울은 주저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고 그러면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는 생각을 말입니다. 왜냐하면?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더 나아가서는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낙인 때문에 회당 문턱 앞에서 멈춰 서야 했을 사람이었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에 회당이 없었기에 말씀이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왔고,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거리에서, 사람들 한가운데서,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자리에서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 그가 복음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서 들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의 인생을 바꾸시기 위해, 그 도시에서 일부러 문을 두지 않으셨던 것이 아닌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예배 순서 하나도, 시간을 채우는 종교 행위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며, 영원의 음성이 ‘오늘’이라는 자리에서 울리는 사건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이 들려졌다”라고 하지 않고, “말씀이 임하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스쳐 지나가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이 사람은 아직 일어서지도 않았고, 아직 걷지도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미 그의 인생을 향해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울이 그를 주목했다는 그 부분입니다. 바울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다”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원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약속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실제처럼 붙드는 마음, 그 마음이 선택으로 드러나고 태도로 드러날 때 믿음은 눈에 보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그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말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을 보았고, 체념 대신 기대를 포기 대신 말씀을 붙들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직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믿음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선포하죠? 10절,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바울이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그 사람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나님의 명령이 선포되었습니다. 일어나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던 그가, 걷는 감각을 기억해 본 적도 없었던 그가, 평생 한 번도 ‘서 본 인생’이 아니었던 그가 벌떡 일어나 걸은 것입니다.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재활의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 회복을 넘어선, 창조에 가까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명령하셨고, 믿음이 반응했기 때문에, 믿음이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움직였고, 하나님은 그의 다리를 일으키셨다는 말입니다. 이 광경을 본 루스드라 사람들이 가만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11~12절,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여러분, 루스드라 사람들이 이 사람을 한두 번만 봤겠습니까? 매일 같이 광장에 앉아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걸어가니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들의 방식으로 해석하죠? “신들이 내려왔다!” 바나바는 제우스라고, 말을 많이 하는 바울은 헤르메스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누가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하나 덧붙입니다.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렀다고”, 왜 굳이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의도적입니다. 복음은 들었지만, 해석은 옛 신화로 했다고, 말은 들었지만, 세계관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고 의도적으로 그들의 외침을 기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언어는 그들의 문화이고, 그들의 문화는 그들의 신화였기에 그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라, ‘신의 현현’, 즉 신들이 잠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일로 이해했기에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을 보면, 시외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성문 앞으로 무리와 함께 제사를 드리려고 옵니다. 그때까지도 바울과 바나바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상황을 파악한 순간, 14~15절에서 아주 격렬한 반응을 보이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소리 질러 외칩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영혼을 향한 절규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이 인간이다. 죄 가운데 태어났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라고요.

 

그리고 복음의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라고. 복음은 기적이 목적도 사람을 높이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에게 귀속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헛된 것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하나님은 그동안, 사람들이 자기 판단대로, 자기 신화대로, 자기 기준대로 사는 것을 참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라고, 왜냐? 복음이 왔기 때문에, 이제는 돌아오라고 부르시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이 무조건 다 봐주시고 무조건 용납하시고 무조건 허용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기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잠시 보류하셨다고 밝힙니다. 흥분한 군중은 이미 제사를 준비했고, 소와 화환까지 성문 앞에 도착했고,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고, 바울과 바나바의 외침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니 “우리가 신이 아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은 누구신가? 그 질문에 답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17~18절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자기를 숨기신 적이 없었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아직 전해지지 않았던 시대라 해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삶을 통해, 매일의 은혜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보여 오셨다, 아침마다 해가 떠오르는 것, 때를 따라 비가 내리는 것, 계절이 바뀌며 열매를 맺게 되는 것,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잠시라도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증언하신 방식이라고 전합니다. 바울은요? 그들이 매일 보고, 매일 경험하고, 매일 누려왔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설명하였습니다.

 

복음의 설득으로 이미 주어졌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초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겨우’, 그만큼 상황이 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열광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오해는 한 번에 풀리지 않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포기하지 않았고,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자리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오해하는 자리를 차라리 불편해하며 바로잡는 길을 택합니다. “기적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니라, 여러분이 이미 매일 만나고 있었던 그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라고요.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좋아요’가 너무 많아서 생긴 이 루스드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요, 단순한 기적 이야기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아주 분명한 질문 하나를 남깁니다. “기적을 보았을 때, 우리는 누구에게 영광을 돌리는가?”라고요. 날 때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더 주목하는 것은, 기적 그 자체보다, 그 기적 앞에서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았고, 은혜의 근원을 찾기보다, 눈앞에 있는 도구를 붙들었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가야 할 자리에 사람을 세워 버렸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어떻게 합니까? 기적을 즐기지 않았고, 칭찬을 누리지 않았고, 오히려 옷을 찢으며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다. 여러분이 돌아와야 할 분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삶에 은혜의 흔적을 남기십니다. 회복의 순간을 주시고, 다시 일어서게 하시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로 그때가 가장 조심해야 할 순간입니다. 사람의 박수가 커질수록, 하나님의 자리는 흐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드러나야 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이 기억되면 안 되고, 하나님이 기억되어야 합니다. 원하기는 우리가 기적을 원하되, 하나님을 잊지 않기를 원합니다. 은혜를 누리되, 사람을 높이지 않기를 원합니다. 믿음이 보이는 삶을 살되, 그 믿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가리키기를 원합니다. 기적보다 더 큰 은혜는요? 하나님의 영광을 놓치지 않는 믿음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을 통해 사람들이 우리를 보지 않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되기를, 그 은혜의 통로로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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