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도면 그만둘 만도 한데
(사도행전 14장 19~28절)
여러분, 살면서요? 이런 말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그만둘 만도 하지 않나?”라고요. 한 예를 들면? 새해에는 마음먹고 운동을 시작하기로 하여 헬스장에 1년 치를 끊으면 싸다고 해서 끊었지만, 딱 사흘 나갑니다. 첫날 무리하게 운동해서 몸은 여기저기 쑤시고, 계단 오르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고, 그래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 나이에 왜 이런 고생 하나, 이 정도면 건강 챙긴 걸로 치자’라고 합리화하죠? 경험해 본 사람은 압니다. 무슨 이야기에요? 우리 인생에는 그만둬도 충분히 이해받을 만한 순간들이 참으로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몸도 힘들고, 마음도 지치고, 사람에게 상처받고, 상황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을 때 누가 이런 말을 해줍니다. “여보게, 너 진짜 괜찮은 놈이야!” “이쯤이면 포기해도 누가 아무도 뭐라 안 해.” 충분히 할 만큼 했잖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에게는 ‘그만둘 명분’이 차고도 넘쳤어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았어요? 사람들이 “죽었다”라고 생각하여 시체처럼 성 밖에 끌어 다 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이고 이제 다음 사람을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말고 능력 있는 다른 사람 많잖아요?” 이렇게 말해도 나쁘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놀라운 것은요? 당사자인 바울은 일어나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행동, 돌로 친 그들이 있는 그곳, 그 성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포기했을 그 자리에서 왜 바울은 멈추지 않았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정도면 그만둘 만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를 함께 그 현장으로 가보고자 합니다.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 시작은요? 선동당하여 바울을 돌로 친 루스드라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9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이 무리는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믿어 제사 지내려던 그 루스드라 사람들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 ‘무리’를 충동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라고 바나바는 제우스, 바울은 헤르메스라며 소와 화환을 들고 성문 앞으로 몰려왔던 그들이 손으로 돌을 집어 바울을 향해 던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이 루스드라 사람들을 어떻게 선동했기에, 바울을 죽이려고 돌로 친 것일까요? “저 사람들은 신이 아니다.” “저 사람들은 위험하다.” “저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킨다.”라고 했기에 그랬을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돌을 집을 정도는 아닌데, 존경은 분노로, 환호는 폭력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돈 문제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요? 바울이 편지를 쓰던 시대까지는 황제숭배를 별로 요구하지 않았기에 박해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1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황제를 위한 신전을 세우고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 이유가 돈이었어요? 이것이 루스드라도 똑같았습니다. 제우스 신당 외에도 나머지 열한 신들을 위한 열한 개의 신당에 있는 제사장 사제들, 그 신전들에 제물과 제물을 담당하는 사업가들, 신당을 짓고 보수하는 건축업자들, 신상을 파는 장사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들은 루스드라의 경제의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았던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바울이 전한 것이 무엇이었어요? ‘사람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것, 눈에 보이는 것, 이것을 숭배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런 일을 버려라.’이었습니다. 바울의 말을 그대로 지키면 경제적 큰 손해는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루스드라 사람들의 이득 문제와 해석, 바울은 너희 삶을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파괴하려고 온 흉악 자라고 모함하고 매도한 이 선동에 넘어가 자신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들과 함께 바울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돌아 맞아 죽었다고 여겼던 바울이요? 다시 일어나요? 20절,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온통 깨지고 피가 막 흐르며 보기에도 너무 처참한 상처투성이의 바울인데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그 몸을 이끌고 조금 전에 돌을 맞아 시체로 끌려 나온 그 끔찍한 루스드라 성으로 다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상적이라면, 쉬어야 하고,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라고 밝힙니다.
왜? 일까요? 바로 부르심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사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돌이 사명을 끝내지 못했던 것이고, 폭력이 부르심을 취소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롬 8장 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 때문에, 과거의 모든 유익, 무엇이에요? [혈통, 율법적 의, 성취], 이것을 해로 여기고, 심지어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빌 3장 7~8절에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 찬양처럼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가지려 했던 세상 일들, 이젠 모두 다 해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다 버리네.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주님을 앎이라. 모든것 되시며, 의와 기쁨 되신 주, 사랑합니다” 그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사랑이 가득한 바울은 그 성을 미워하지도 않았고요? 그 성은 여전히 복음이 필요한 자리로 보아 그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더베로 가죠? 쓰러졌던 자리에서 다시 길을 이어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요?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삶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길 위에 서는 삶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오던 길로 되돌아가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21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돌에 맞아 죽은 줄로 끌려 나갔던 곳, 루스드라, 돌로 치려는 음모가 있었던 이고니온, 공식적으로 쫓겨났던 도시, 비시디아 안디옥, 그곳들로 다시 돌아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합니다.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교회를 크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 “이 정도면 됐다”에서 멈추지 않고 ‘이제 너희도 이 길을 걸어야 한다’라는 지점까지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복음은요? 사람을 살리고 떠나는 메시지가 아닌 사람과 함께 머무는 길입니다.
이렇게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새로 믿은 제자들의 믿음을 북돋아 주고 위로해 주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그곳으로 되돌아갑니다. 더베는 루스드라 동쪽 90마일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90마일이라면 걸어서 5일 정도나 걸리는 길을 가는 상처투성이인 바울에게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지만, 더베에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복음을 전합니다. 덕분에 더베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감사한 것은, 바울을 죽이려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으로부터 와서 루스드라를 습격했던 유대인들이 더베로는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험한 산길인 타우루스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를 거쳐 더베에 이르기까지, 바울이 더베에서는 유일하게 유대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약 120마일 정도, 일주일 정도만 더 걸어가면 자기 고향 다소가 있는데, 그곳으로 가지 않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자신을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을 다시 만나 박해가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믿음을 북돋아 줄 필요를 느꼈기에 그곳으로 가죠?
22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여러분, 비시디아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선동당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의 박해 속에 쫓겨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고니온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돌로 쳐 죽이려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본 사람들입니다.
특히 루스드라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진짜로 돌에 맞아 죽어서 시체가 되어 질질 끌려 나가는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바울이 다시 일어난 것을 보았어도 그다음 날 바로 떠났기 때문에 루스드라의 제자들은 그 이후에 바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언제 만날지 기약도 없이 떠났던 바울이 다시 금방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서, 자기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바울이 자기들을 다시 찾아와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하고 권했습니다. 이어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라고 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정말 믿는다면, 그 결과로 이 세상에서 받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고, 예수님을 정말 믿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면 고난은 반드시 온다는 뜻입니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장로들을 택하여 세우고 함께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님께 그들을 위탁하고 떠납니다.
23~25절,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여기 “각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 교회들입니다. 가는 곳마다 교인들 가운데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면서 그들이 믿는 하나님께 그들을 위탁합니다. 즉 택한 장로들로 하여금 기도하면서 자신을 주님께 위탁하게 함으로써, 나머지 교인들도 그들을 본받아서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함으로 그렇게 합니다. 이렇게 영적 지도자들을 세우고 타우루스산맥을 다시 넘어 처음 도착했던 버가로 되돌아갑니다. 이 버가는 풍토병에 걸렸기 때문에 복음을 하나도 전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떠나야만 했던 그곳입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하나님의 말씀을 어김없이 전했습니다.
버가에서 앗달리아로 내려갔죠? 버가에서 약간 서쪽으로 떨어진 버가의 외항입니다. 이곳에서 배를 타지 않고 앗달리아까지 가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향하는 배를 탐으로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최소 1년 이상에서 최대 2년이 걸렸습니다.
여러분, 그리고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했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전합니다. 26절,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아주 중요한 부분을 전하고 있습니다.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했다’,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할 때 그들을 하나님께 다 맡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되돌아간 바울과 바나바는. 27~28절,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특별 선교 보고 가졌고,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함께 오래 머물렀다고 오늘 본문은 끝을 맺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교회이고, 교회의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14장의 마지막은 화려한 승리의 장면이 아닙니다. 기적의 박수도, 군중의 환호도 없었고, 돌에 맞은 몸, 지친 발걸음, 그리고 다시 걷는 순종이 있었습니다. 돌에 맞고 쓰러졌고, 사람들은 그를 죽은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요? 쓰러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방향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요? 상처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셨다.”라고 보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보고 하였습니다. 살다 보면 이 정도면 그만둘 만한 순간을 만납니다. 관계에서, 사역에서, 신앙에서 만나요? 이것 때문에 상하고, 더 이상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래, 그만둘 이유, 충분하지, 충분했지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사람을 통해 믿음의 문을 여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문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에요? 은혜가 여전히 살아 있기에 열립니다. 이 정도면 그만둘 만도 한데가 아니라 지쳤지만, 주님의 은혜는 지치지 않았음을 붙잡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