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에 손대지 말라”
(사도행전 15장 1~11절)
여러분, 보통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요? 더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믿음이 깊어지면, 마음도 더 가벼워질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오래 할수록, 오히려 기준이 더 많아지고, 판단도 더 빨라지고, 재는 잣대도 더 까다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었을 때 아주 단순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나를 살리셨다는 이것 하나만 생각해도 눈물이 가득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요? 이 은혜 위에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하나씩 얹기 시작합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갖춰야 하고, 마무리는 우리의 책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은혜는요? 더하면 더할수록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손대는 순간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요? 이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교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질문 하나를 다루고 있는데, 이론에 아주 강한 사람들이, 현장에 충실했던 사람들을 비난하면서 논쟁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이 논쟁이요? 교회 역사상 첫 번째 공의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리게 된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입니다. 이때가 아마 주 후 50년경일 것이에요? 이방인들도 예수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된 지도 수년이 흐른 때입니다. 먼저 가이사랴의 로마 백부 장인 고넬료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복음을 듣고, 예수 믿게 된 것을 비롯하여, 수리아 안디옥의 헬라 인이 예수 믿게 되어 교회가 탄생하였고, 심지어 바울과 바나바의 첫 번째 선교여행에서, 로마 사람인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이 최초로 예수 믿게 되었던 일 등등,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요?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조금씩 나오더니, 나중에는 폭발적으로 쏟아졌고, 이들이 주를 믿게 됨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었지만,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로 들어오는 방법에 있어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할례와 율법을 지킴으로써 인정되었는데, 이방인 회심자들은 할례도 받지 않고, 그냥 세례만 받는 것만으로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들 고유의 전통과 고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들어오니까 불편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에요? 이해되시죠?
그래서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라” 여기 어떤 사람들이란 바리새파 출신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예수를 부정한 것이 아니에요? 예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아주 열심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죠?
그런데 손대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건 좋은데, 할례는 받아야지.” “은혜는 맞는데, 최소한 이것은 해야지.” 은혜의 자리에, 행위와 공로를 끼워 넣었습니다. 할례 없는 회심과 율법의 행위 없이 그냥 예수 믿고 들어오고 유대교로 바꾸지 않은 이 헌신이 허락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을 가지고 내려와 나름대로 교육을 시킨 것에 대하여 싸움이 생겼어요? 2절을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 엄청난 토론과 논쟁을 벌였습니다. 굉장히 흥분하며 논쟁했어요? 심한 말까지 했다고 봅니다. 할례 없이는 회심자들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을 이들은 굽히지 않았고, 바울과 바나바 또한 이것이 아니라고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던 것이에요?
물론 할례는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백성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유대주의자들은 그것을 강조했습니다.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자름으로 하나님의 백성 됨을 표시하는 이것이 구원의 조건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이예요?
그런데 여러분, 이 문제가요? 너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방인들은 먼저 다 유대인이 된 다음에 구원받을 수 있다?’라는 질문이 나오기에 그렇습니다.
이것을 매우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바울이 아주 격분했어요? 심지어 그들은요? 당시 안디옥에 있었던 그 유명한 사도 베드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이것에 바울의 분노는 극에 달했어요. 오늘 본문에는요? 이 내용이 없지만, 갈라디아서 2장을 보면, 이 내용이 나와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베드로가 안디옥에 먼저 와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믿고 회심했거든요? 성령을 받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고넬료의 일이 있었기에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과 자유롭게 교제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을 마음 편히 즐겁게 하고 있었어요? 그들을 주 안에서 형제자매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깊이 심취한 그 할례 파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 베드로에게 강력히 항의하였어요? ‘이 자리를 떠나 물러가라. 어떻게 이방인들과 같이 먹느냐?’라고 유대주의자들이 너무 강력하게 나오니까, 베드로는 평화를 위해서 잠시 물러나요? 바울은 이 장면을 보면서 ‘위선을 행했다’라고 강력하게 지적하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거기에 휩쓸렸습니다.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이 복음의 진리대로 똑바로 걷지 않고 있다는 것에 화가 나서, 예수님이 누구나 다 구원해 주셨는데, 아직도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를 따지면서 멀리하며 파를 가르고 있느냐고 갈 2장 16절에 성토하고 있어요?
쉬운 성경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즉 당신 베드로나 나나)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는, 아무도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이야기에요? 무슨 착한 일을 조금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체험했다면, 어떻게 이방인 신자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가? 더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그들도 믿음을 통해 받아들이셨다면, 어떻게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하나 된 형제자매들인데, 서로의 교제를 깰 수 있단 말인가? 아직도 우리는 유대인이고 너희는 이방인이라고 하며 파를 지을 수 있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먼저 있었어요? 그리고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인정한 베드로가 이 공의회 동안 계속 은혜의 복음 및 이방인과 유대인 간의 교제에 그것이 미친 결과를 신실하게 간증합니다.
그것이 바로 7~11절 말씀이에요?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베드로의 강조가 무엇이에요? 은혜는 시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처럼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선언합니다. 즉 유대인을 이방인이 따라오는 게 아니라, 유대인도 이방인과 같은 방식으로 구원받는다, 구원의 기준은 전통도, 연륜도, 경력도 아닌 오직 은혜라고, 그러기에 은혜에 손대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그가 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사건이 고넬료 사건이죠? 이것을 근거로 이야기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순종함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방인들이 그렇게 하기를 기대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 없다!’라고 하면서 결론이,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입니다. 바울이 안디옥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책망하면서 했던 복음의 선포를 그도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지 않나? 쉽게 말해서, 바울에게 막 야단을 맞은 내용과 베드로의 말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갈 2장 16절에요? “사람이,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임을 알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1절, “우리가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즉 “우리는 믿습니다.”라고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도 은혜로 된 것이요, 그들이 구원을 얻은 것도, 은혜로 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요? 오늘 본문의 전체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의 싸움은 단순히 “할례를 해야 하는가?”라는 의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순한 교회 회의 기록도 아닙니다.
복음이 복음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이었습니다. 만약에요? 이 논쟁이 타협으로 끝났다면, 복음은요? 그 순간부터 [조건부 구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분명하게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주 예수의 은혜로 된 줄을 믿노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이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로마 제국을 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요?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달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더해질 수도 없고요? 보완될 수도 없고요? 개선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무엇을 더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 예를 들어볼까요? 16세기, 마틴 루터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찾던 사람이었어요? 수도사가 되었고, 금식했고, 밤을 새워 기도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채찍질하며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두려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생각은 늘 “내가 충분히 거룩해야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하였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로마서 1장 17절을 읽고 뒤집어졌잖아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원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나중에 그가 이렇게 고백하죠? “그 말씀을 깨닫는 순간, 나는 마치 천국의 문이 열리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아들여진 사람으로 살기 시작했고 이 깨달음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믿는 복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더 잘해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다.” “내가 더 거룩해야 하나님이 나를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요? 하나님은 우리가 부족할 때 사랑하셨고, 우리가 죄인일 때 붙드셨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구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우리가 충분히 거룩해서요? 아니에요? 예수님이 충분히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오늘도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아직 부족하다.” “너는 아직 자격이 없다.” 그러나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합니다. 구원은요?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시작했고요? 은혜로 살아가며, 은혜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은혜가 여러분을 구원했습니다. 지금도 붙들고 있습니다. 끝까지 인도할 것입니다. 처음도 은혜였고 지금도 은혜이며 마지막도 은혜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요 10장 28절,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런데도 은혜에 손을 댄다는 것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거나, 은혜를 이용하거나, 은혜를 떠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붙들고 계신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빌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기에 우리가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라 하나님이 시작하신 작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꽉 붙잡았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꽉 붙잡고 계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사야 49장 16절,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잊지 마세요?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구원의 행위는 완전한 삶을 사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시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온전히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관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은혜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합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