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닫고 싶은데, 주님은 말씀하셨다”
(행 18:5~11절)
여러분, 우리는 보통 너무 피곤하든지, 아니면 아무리 말해도 변하지 않고 오해만 받을 때, “이제 그만하자. 난, 할 만큼 했다”라면서, 입을 닫게 됩니다. 바울도 아마 그랬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 것은, 아덴에서 철학자들과 논쟁했지만, 그리 큰 성과가 없이 고린도에 왔고, 그리고 고린도에 와서도 타락과 우상과 물질과 음란이 가득한 이 도시를 마주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지만,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대적과 심한 비방에 입을 닫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고 오히려 위로하며 사람의 반응으로 멈추지 말고, 주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린도는 다양한 상징의 도시입니다. 서쪽에는 로마 사람들이, 동쪽에는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그리고 시내 한복판에는 토박이 그리스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고 있는데, 도시 크기도 그리 크지 않아 양편의 바다를 직선으로 연결해도 5마일 정도도 안 되는 좁은 땅 사이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있는 에게해와 맞닿은 동쪽에 있는 겐그레아 항구와 그리스와 이탈리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해와 마주한 서쪽에 있는 레케움 항구 그 사이에 있어서 온갖 상품과 물자와 문화가 들어와 24시간도 모자를 정도로 바쁜 상업 도시가 고린도였고,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로 인하여 알아들을 수 없는 갖가지 언어로 왁자지껄한 모습, 그래서 통역을 세우고 물건을 팔았을 정도였습니다. 도시 분위가 어떠했을지 그림이 그려지죠?
그런데 바울은 이 도시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게 평생 동역자가 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함께 천막도 만들고 판매도 하고, 같이 지내고, 그리고 안식일에는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비량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게도냐에서 실라와 디모데가 다시 합류하는데, 오늘 본문은 이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누가는요?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라고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은 기본인데, 이 말을 적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고 그때 있었던 사실을 적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라고 기록한 이유는요? 첫째로, 바울의 사역은 감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이 말씀을 붙잡은 정도가 아니라 말씀이 바울을 사로잡았다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은 지친 바울에게 동역자와 위로를 보내셔서 다시 말씀 사역에 집중하게 하셨다는 것이며, 넷째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증언하게 된다는 것임을 누가가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말씀이 나를 붙잡고 있는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심장을 붙잡죠? 닫혔던 입이 열려고, 식었던 기도가 살아나고, 무너졌던 사명이 다시 일어나 포기했던 영혼을 다시 품게 됩니다. 바울이 위대한 이유는 말씀에 붙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우리를 붙잡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내려와 합류하였고, 심지어 그들은 그냥 온 게 아니라 마게도냐 교회들이 바울의 선교 사역에 쓰라고 선교헌금까지 보낸 것에 힘을 얻었습니다. 솔직히 마게도냐 교회들은 이제 금방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에 빚진 마음으로 보낸 선교헌금은 바울에게는 굉장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언했더니, 어떤 결과? 6절의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전하니까,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며 비방했는데, 단순히 “나는 동의하지 않다” 정도의 반응이 아니라 반대하고, 논박하고, 방해하고, 복음이 전해지는 길을 막으려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가 메시아라고? 아이구, 말도 안 돼.” “그런 말하지 마” “사람들을 미혹하지 마.” “우리가 믿어 온 신앙을 흔들지 말라.” “저 사람은 이단이고, 율법을 무너뜨리는 사람이고, 백성을 어지럽히는 사람이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하다니 말이 되는가?” 바울 개인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했고 모욕하고 헐뜯었습니다. 더 심각하게는 예수님의 이름 자체를 모독했을 가능성도 있어요?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핵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거부에서 예수님을 조롱했는데, 조직적으로 괴롭히며 집요하게 배척하니까, 바울이 그들 앞에서 옷을 털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이방 지역을 지나면서 그 지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옷과 발에 묻은 이방 지역의 먼지를 다 털어 낸 뒤에 자신들의 지역으로 들어갔던 행동, 즉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공개적인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 말을 전합니다.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무슨 말이에요? ‘내가 너희들에게 전한 생명의 복음을, 너희가 거부해서 결국 너희들이 복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선택한 너희들의 책임이지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나의 책임을 다했지만, 너희들이 거부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라고 그들에게 강하게 전하죠? 이제부터 유대인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기 원하고 갈급해하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집중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타난 새로운 열매들이 7절 이후부터 나타납니다.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여기 ‘거기서’는 유대인 회당입니다. 거기서 옮겼는데, 유대인 회당 바로 옆집에 사는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 자기 집으로 바울을 맞아들인 것입니다. ‘우리 집에 오셔서 가르쳐주시고 복음을 전해주세요’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8절,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회당장 그리스보가 자신의 온 가족 친지들과 함께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어 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고린도 사역이지만, 갑자기 주님은 9절의 말씀을 하십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주님은 왜? ‘두려워하지 말라’, ‘계속 말하라’, ‘침묵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일까?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해도 사실 바울은 유대인들의 조직적 괴롭힘과 집요한 배척을 받았습니다. 고린도를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을 정도로 부담이 엄청이나 컸습니다.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더 심한 공격에 지쳤고, 버티는 데도 한계가 왔지 않았을까?
그래서 ‘이제 고린도에서 떠나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밤에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 ‘계속 말하라’, ‘침묵하지 말라’라고 하신 것이고, 10절,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내가 너와 함께한다. 그리고 이 성중에는 내 백성이 많다, 고린도에는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앞으로도 구원해야 할 주님의 백성이 여전히 많다” 이 명령에 순종하고 11절,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 무려 1년 6개월 동안이나 고린도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제는 유대인들이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계속하여 바울을 악랄하게 괴롭히고 끈질기게 죽이려 하고 협박하더라도, 결코, 무너지지 않도록 ‘네가 무너지지 않도록 내가 너를 붙들어 주겠다.’라고 하신 약속의 말씀, ‘비록 지금 어려운 상황이지만, 모든 것을 통해, 너의 헌신을 통해, 상상할 수 없는 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하는 약속의 말씀에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였다고 하면서 오늘 본문이 끝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는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단순히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더 있었다”는 일정을 기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첫째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복음의 사역은 대적이 없어서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이 있기에 계속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세요? 고린도를 떠날까? 생각할 만큼 지쳤을 때, 주님은 바울에게 환경을 바꾸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비방을 없애 주겠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냐? “사명자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요? 위대한 사도, 맞지만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만약 바울에게 두려움이 전혀 없었다면,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실 필요가 없어요? 그리고 주님이 “침묵하지 말라”고 하셨다는 것도 결국, 바울 안에 침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하라”고 하셨다는 것도 그 안에 ‘이제, 그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죠? 누가는 이것을 숨기지 않았어요? 믿음의 사람도 흔들리고, 사명자도 지치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어느 날은 입을 닫고 싶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바울은 자기감정의 결론을 따르지 않았고, 주님의 말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결론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자리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 내 감정의 결론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이 말씀의 결론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함께하심은 고난의 면제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붙드시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주님은요? 바울에게 “아무도 너를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확히는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대적이 없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바로 다음 사건에서 유대인들은 바울을 법정으로 끌고 가요? 즉 대적은 계속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무엇이냐? “그들이 너를 흔들 수는 있어도,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너를 무너뜨릴 수는 없고, 그들이 너를 비방할 수는 있어도, 내가 맡긴 사명은 꺾지 못하며, 그들이 너를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내 손에서 빼앗아 갈 수는 없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요? 주님의 함께하심을 오해할 때가 많습니다. 주님이 함께하시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고,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며 길이 편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함께하심은 고난이 없는 길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길이고, 대적이 사라지는 은혜가 아니라, 대적 가운데서도 사명이 꺾이지 않는 은혜입니다. 주님 안에 있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눈에는 대적자가 많아 보여도, 주님의 눈에는 구원받을 백성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일까요? 시선을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눈에는요? 고린도는 죄가 많은 도시, 우상이 많은 도시, 음란이 많은 도시, 대적자와 비방하는 사람이 많은 도시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눈에는 “내 백성이 많다.”로 보셨습니다.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주님의 백성이 있고, 아직 회심하지 않았지만, 주님이 부르실 사람이 있으며, 아직 교회 밖에 있지만 주님의 은혜 안으로 들어올 영혼이 고, 아직 거칠고 완고하지만, 어느 날 복음 앞에 무릎 꿇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요? 누가 주님의 백성인지 몰랐고, 어느 누가, 복음을 듣고 변화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머물렀고, 말씀을 가르쳤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고린도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이 위대한 교회가 세워질 자리라고 어느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복음이 어울리지 않는 도시, 너무 타락했고, 너무 세속적이고, 너무 복잡했던 도시에 교회가 세워졌고, 바울은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머물며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훗날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라는 귀한 말씀의 배경이 되는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에게도 고린도 같은 자리가 있습니다. 떠나고 싶은 가정이 있고, 포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은 자녀가 있고, 복음을 전해도 돌아오지 않는 가족이 있으며, 애써도 열매가 보이지 않는 사명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주님,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습니까?” “이제 입을 닫아도 되지 않습니까?” “이제 여기서 떠나도 되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직 내 백성이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강해서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어서 부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두려워하는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침묵하고 싶어 하는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떠나고 싶어 하는 바울을 다시 붙드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상황이 아니라 말씀에 붙잡히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에 붙잡히기를 원합니다. 내 눈에 보이는 절망이 아니라, 주님 눈에 보이는 영혼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후에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낸 고린도후서 4장 8~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새번역으로 다시 들어보세요? “우리는 사방으로 죄어들어도 움츠러들지 않으며,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이 기간에 데살로니가전서와 데살로니가후서 모두를 고린도에서 기록하여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고, 신약성경의 1/4에 해당하는 바울서신에 의해 기독교 신학의 체계가 확립하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본 것이요? 현실이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들, 비방하는 사람들, 닫힌 마음들, 타락한 도시, 무너진 문화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현실 너머를 보셨습니다. 그 도시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을 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침묵하지 말라.”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직 내 백성이 많다.”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두려워서 침묵했던 우리의 입술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상처받기 싫어서, 거절당하기 싫어서,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했고, 복음을 전해야 할 때 물러섰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바울에게 말씀하셨던 그 음성이 오늘 우리의 심령에도 들리게 하옵소서. “두려워하지 말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우리의 가정 안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영혼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 안에 아직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포기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눈으로 영혼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