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복음은 피고석에도 전진한다

사도행전 18:12~17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요? “복음은 피고석에도 전진한다”입니다. 우리는 보통 전진이라는 말을 들으면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환영하고,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길이 넓어지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의 전진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감옥에서도 전진했고, 매 맞는 자리에서도 전진했으며, 쇠사슬에 묶여 찬송하던 빌립보 감옥에서도 전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법정 한가운데, 곧 피고석에서도 복음이 전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말씀은 Father’s Day를 맞은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데, 이유는 아버지의 삶도 언제나 박수받는 길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늘 넓은 길만 걷지 않아요? 때로는 말없이 책임의 자리에 서야 하고, 억울해도 가정을 지켜야 하며, 힘들어도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 때로는 피고석처럼 외롭고 무거운 자리에서도 아버지는 가정을 위해, 믿음을 위해, 자녀를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합니다. 그래서 진짜 아버지의 위대함은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길이 막히고 마음이 무너지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데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피고석에 서 있었지만 복음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의 아버지도 때로는 피곤하고 외롭고 말할 힘조차 없을 때도, 그 자리에서 가정을 위해 기도하고, 자녀를 위해 눈물 흘리고, 교회를 위해 헌신하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전진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에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아가야 지방의 중심 도시요, 상업과 문화와 종교가 뒤섞인 거대한 도시로, 돈이 모이고요? 사람들이 몰리고요? 우상이 가득하며, 음란과 욕망이 도시 전체를 흔들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우리가 지난주에 나눴듯이 주님은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씀을 붙들고 고린도에 머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법정에 끌려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했는데도, 법정에 서게 되었고, 주님이 지켜 주신다고 했는데도, 고소를 당하였으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두려울 만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석에 섰던 바울이지만, 복음은요? 피고석에 갇히지 않았고, 고소를 당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고소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복음의 길을 열고 계신 하나님, 그 법정을 복음의 전진로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사도행전을 우리가 계속 나누고 있잖아요? 여러분, 신약의 역사서가 사도행전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역사서를 읽을 때는요? 특별히 역사적인 배경을 함께 알고 읽어야 도움이 됩니다. 배경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읽으면요? 감이 안 잡혀요. 지금 바울은 고소당했습니다. 바울을 법정에 세웠습니다. 누가요? 유대인들이, 이것은 바울을 법정에 세웠다기보다는 복음을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지금 이 이야기는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해 복음을 전한 지 8~9개월 정도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이 지방에 중요한 변화가 생겼는데, 리더십 교체이었고, 새 리더로 오는 자가 바로 갈리오입니다. 그가 아가야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것입니다. 그는 주후 51년에서 52년까지 짧게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이유는 건강이었어요? 하지만 진짜는 이유는 이 집안입니다. 갈리오의 본명은 마르쿠스 안네우스 노바투스, 길죠? 그는 스토아 철학의 대가인 세네카의 친동생입니다. 세네카는 누구냐? 당시 아주 유명한 철학자이면서, 폭군 중의 폭군이었던 네로 황제의 스승입니다. 노바투스의 아버지는 로마 원로원의 의원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집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랐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요? 더 큰 꿈을 위해 로마제국 수사학의 대가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갈리오라는 사람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냅니다. 그래서 노바투스가요? 갈리오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노바투스도 대단한 집안이지만, 자신보다 더 대단한 자에게 아들을 양자로 보내 그가 아주 좋은 것들만 배우고 자라 이제 총독으로 아가야 지방에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AD 51~52년에 짧게 총독으로 지낸 이유가 AD 65년 네로 황제 축출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은 형 세네카와 함께, 그는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여하튼 그의 인생에서 권력의 최고 정점인 아가야 지방 총독으로 부임하였을 때도, 바울은 고린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마다 유대인들은 속이 끓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그 지방의 리더 교체로 총독 갈리오가 부임하니까 그 계기로 신임 아가야 총독 갈리오에게 바울을 고소한 것입니다. 총독이 바뀌니까 고소했습니다. 왜냐? 새로 부임하면 민심을 얻기 위해 여러 민원과 고발을 적극적으로 들으려는 경우가 많기에 열심히 생각해서 “일제히 일어나”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의도적으로 바울을 법정으로 끌고 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13절,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유대인들이 고소한 내용이 이것이죠? “이 사람이 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다.” 그들은 고소할 때 유대인의 율법만이 아니라, 로마의 법까지 포함한 법이라는 이 단어를 사용하여 신앙 논쟁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냐? 아시다시피 로마는요? 여러 나라와 민족을 정복하면서 식민지가 된 그 나라 국가 백성들이 섬기는 종교의 내용을 검토하여, 이것이 로마 행정 당국의 질서와 사회질서의 상식선에서 크게 혼란을 일으키는 종교만 아니라면, 다 허락해 주었습니다. 즉 로마가 허용한 종교만 포교할 수가 있다, 그 이야기입니다. 유대교도 당시 보호받는 종교였기에, 포교가 가능하였습니다. 이 근거를 가지고 유대인들은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유대교가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이고,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아주 이상한 것을 퍼뜨리고, 혼란을 일으키는 이들이라고 치밀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고소했습니다. 이유는 복음이 두려웠기 때문에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바로 메시아다”를 참을 수가 없었기에, 즉 예수님이 불편했던 것이고, 십자가가 그들의 마음을 찔려 고소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유일한 “죄목”은요? 복음이에요?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피고석에 세운 것이고, 복음을 묶으려고 법정으로 끌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 법정을 복음이 더 멀리 나아가는 자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도 그렇잖아요? 형들에 의하여 애굽에 팔렸지만, 그 길은 하나님이 애굽으로 인도하신 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만은요?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장대를 세웠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대를 악인의 심판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길로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설입니다. 유대인들이요? 바울을 매장하고 죽이려고 법정으로 끌고 갔지만, 하나님은 그 법정을 복음의 전진로로 바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사람이 악하게 만든 자리라도 하나님 손에 들어가면요? 선한 도구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보세요? 14절입니다.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오늘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어쩌면 바울은 이 상황을 변호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안 그래요? 솔직히 억울하잖아요? “총독님, 저는 로마법을 어긴 적도 없고, 이들이 말하는 선동한 것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을 뿐이다.”라고 변호하려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신임 총독 갈리오가요? 바울의 변호를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울의 말을 가로막고 자기의 말을 한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고소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까 황당한 얘기들이고, 여기 끌려온 이 사람, 즉 바울이 무슨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다거나, 윤리나 상식이나 도덕적인 면에서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든지, 아니면 로마법상 문제라면 자신이 재판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금방 간파하여 알아차리고,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을 저질렀다면 ‘너희’들의 고발은 마땅하지만, ‘바울의 행동은 로마법과는 무관하다, 너희들의 고발? 받아 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이에요? 바울이 먼저 말하기 전에 일하신 것이고, 바울이 설명하기 전에 막아주신 것이며, 바울이 억울함을 풀기도 전에 다른 사람의 입, 즉 갈리오의 입을 사용하셨습니다. “바울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내가 재판한다. 그가 사회질서를 어지럽혔냐? 악한 일을 했냐? 그러면 내가 처리하겠지만, 너희 고발은 로마법으로 다룰 문제 아니다.”입니다.

 

 

즉 갈리오는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본 것입니다. 냉정하고 합리적으로 분별했고요?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것도 아니고 로마법을 어긴 것도 아니라고 유대인들이 신앙 문제를 정치 문제로 둔갑시키려 했다는 것을 알아, 그들의 고소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똑똑한 갈리오죠? 많은 배우고 익힌 솜씨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15절을 보세요? 그의 똑똑함이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놀랍게도요? 그는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것이 무슨 내용이냐?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가에 대한 것은, 유대교 내부의 해석 문제다, 로마법을 어긴 범죄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16절,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해버렸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유대인들을요? 법정에서 쫓아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요? 이것이 하나의 판례가 되어 앞으로 남은 2차 선교여행과 그 후에 또 펼쳐질 3차 선교여행에 굉장히 중요한 근거, 즉 기독교가 불법이 아니고, 계속해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요? 그래서 복음은 더 넓은 길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판결 하나로요? 모든 박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에요? 바울은 이후에도 계속 고난을 만납니다. 감옥에도 갇히고, 매도 맞고, 또 다시 고소당하지만, 오늘 이 사건은요? 적어도 고린도에서 복음이 계속 전파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린도는 복음이 뿌리내리기 어려운 도시였기에 그렇습니다. 돈이 많았고, 우상이 많았고, 음란이 많았으며, 자기 자랑이 많은 인간의 욕망이 흘러넘치는 도시였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주님은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무엇이에요? 사람들이 보기에는 타락한 도시였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이 많은 도시이고, 복음의 씨앗을 뿌려야 할 밭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울을 고린도에 머물게 한 힘이었고, 법정에 섰어도 무너지지 않은 이유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의 피고석은 복음이 전진하는 자리였고, 하나님께는 열은 길,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가게 되는 길입니다.

 

 

네 번째로 소스데네의 무너짐과 은혜의 가능성입니다. 17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 갈리오가 유대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때리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소스데네가 누구냐? 고소한 유대인들의 대표요, 가장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갈리오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뒤집히니까 항소하며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립니다. 즉 공개 수치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도 갈리오는 상관하지 않았다고, 개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말해요? 악한 계략은 결국 자기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요? 무너진 사람에게도 닫히지 않고 열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바울은 “형제 소스데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회당장 소스데네가 바울이 말하는 그였다면 놀라운 은혜입니다. 바울을 고소하던 사람이 바울의 형제가 된 것이고, 복음을 막으려던 사람이 복음의 동역자가 된 것이며, 법정에서 바울을 무너뜨리려던 사람이 이제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은요? 사람을 뒤집어 놓고, 원수를 형제로 만들며, 핍박자를 전도자로 만들고, 무너진 사람을 다시 세웁니다. 바울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던 사람이었고, 교회를 잔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 죽음을 마땅히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를 찾아오셨고요? 복음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런 바울이기에 소스데네가 정말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누구보다 뜨겁게 품었을 것입니다. “형제님, 나도 그랬어요?” “나도 주님을 대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은혜 아니면 설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 함께 주님의 은혜로 삽시다.”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안 그래요? 교회는요? 완벽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은혜 입은 죄인들이 모인 곳이고, 다시 세움을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며, 주님께 붙잡혀 인생이 뒤집힌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소스데네, 처음에는 바울을 고소하는 자리, 복음을 대적하는 자리, 법정의 소동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 형제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소스데네가요? 내일의 형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이 내일 복음의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내일 함께 울며 기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소스데네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요? 완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말해야 할 때 침묵하기도 하고, 안아 주어야 할 때 등을 돌리기도 하고, 믿음으로 이끌어야 할 때 세상의 염려에 붙든 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소스데네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실패한 아버지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족한 아버지도 버리지 않으시며, 뒤늦게 눈물 흘리는 아버지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아닙니까? 안 그래요? 하나님의 은혜는요? 자격 있는 사람에게만 임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사람에게도 찾아가고, 부끄러운 사람에게도 찾아가며 “나는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찾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을 과거에 묶어 두지 않고, 사람을 다시 일으키며, 대적자를 형제로 바꾸고, 실패자를 증인으로 바꾸고, 무너진 사람을 다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으로 세웁니다.

 

 

Father’s Day는요? 단지 훌륭한 아버지들만 칭찬하는 날이 아닙니다. 은혜가 필요한 모든 아버지들을 다시 복음 앞에 세우는 날입니다. 잘해 온 아버지는 감사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가며 부족했던 아버지는 눈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 날입니다. 아버지도 은혜를 받아야 아버지답게 설 수 있습니다. 아버지도 복음이 붙들어 주셔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은 피고석에도 전진함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법정에서도 일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위해 길을 여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옵시고, 억울함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때문에 다시 일어나게 하옵소서. 아버지인 우리가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부어주옵소서. 우리의 눈물이 복음의 씨앗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듣기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37 [사도행전강해] 2026년 7월 12일 주일설교/아볼로, 아직 끝나지 않은 설교자 사도행전 18:24~28   admin 2026.07.12 0
236 [맥추감사주일 및 미 독립기념감사주일] 자유의 여신상이 아니라 자유의 예수님이다 (요한복음 8:31~36)   admin 2026.07.12 0
» [사도행전 강해] 복음은 피고석에도 전진한다 사도행전 18:12~17 / 2026-6-21 주일설교   admin 2026.06.21 35
234 [사도행전 강해] “입은 닫고 싶은데, 주님은 말씀하셨다” (행 18:5~11절) 2026년 6월 14일 주일설교   admin 2026.06.14 40
233 [사도행전 강해] 생업은 천막, 본업은 복음 (행 18:1–4) 2026년 6월 7일 주일설교   admin 2026.06.07 81
232 [사도행전 강해] 2026년 5월 31일 주일설교/혹시 몰라 만든 제단, 드디어 정답이 오다( 사도행전 17:22–34)   admin 2026.05.31 206
231 [사도행전 강해] 새로운 것에 목마른 도시, 영원한 복음을 만나다 (행 17:16~21) 2026년 5월 24일 주일설교   admin 2026.05.24 184
230 [사도행전 강해] “베뢰아는 왜? 달랐는가?” (사도행전 17장 10~15절) 2026 5월 3일 주일설교     file admin 2026.05.03 225
229 [사도행전 강헤] 2026년 4월 26일 주일설교 이 사람들 때문에 난리 났다 (행 17:1–9절)   admin 2026.04.26 263
228 [사도행전 강해] 2026년 4월 19일 주일설교 “조용히 나가지 않는다” (사도행전 16장 35~40절)   admin 2026.04.26 195
227 [사도행전 강해] “갇혔는데 예배가 시작되었다” (사도행전 16장 25~34절) 2026. 4. 12 주일설교   admin 2026.04.26 184
226 [부활주일] 2026-4-5 부활주일설교/“무덤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마태복음 28:1–10)     file admin 2026.04.05 213
225 [사도행전 강해] 2026 3월 22일 주일설교/하나님의 뜻대로 하였는데, 왜? 잡혀가죠? (사도행전 16:11-24)     file admin 2026.04.05 192
224 [사도행전강해] 2026-3-15 주일설교/성령의 내비게이션, 갑자기 경로를 변경하다 (행 16:1~10)     admin 2026.03.15 217
223 2026-3-1 주일설교/구원에는 작은 글씨가 없습니다(행 15:12-29)     file admin 2026.03.01 239
222 2026-2-22 주일설교/“은혜에 손대지 말라” (사도행전 15장 1~11절)   admin 2026.02.22 247
221 2026-2-8 주일설교/이 정도면 그만둘 만도 한데 (사도행전 14장 19~28절)   admin 2026.02.22 244
220 2026-2-1 주일설교/‘좋아요’가 너무 많아서 생긴 일 (사도행전 14장 8~18절)   admin 2026.02.22 250
219 2026-1-22 주일설교/어라, 같은 복음인데 다른 반응을 보이네? (행 14:1~7)   admin 2026.02.22 245
218 2026-1-18 주일설교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사도행전 13장 44~52절)   admin 2026.01.18 28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2 Nex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