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사실 굉장히 큰 고백입니다.
초대교회 역사에서 “그리스도인(Χριστιανοί)”이라는 이 이름은 그냥 신앙적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세상이 그들을 보며 붙여 준 이름이었고, 그것이 처음 일어난 곳이 바로 안디옥입니다.
스데반 사건으로 인해 시작된 그 박해 때문에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안디옥까지 가서 헬라 사람들(이방인들)에게도 주 예수에 관해 전하기 시작합니다.
매우 위험한 시도였습니다. 왜냐? 종교적·문화적 경계를 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주 간단하게, 그러나 엄청난 말을 붙입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프로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정식 파송된 전문 사역자들이 와서
기초를 닦은 교회도 아니라, 고향에서 밀려나 도망친, 이름도 기록 안 된 평신도들, .
그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도시 전체가 흔들렸던 이것입니다.
그들은 “나는 그냥 조용히 신앙생활만 할게요.” 라고 한 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그냥 사람들’을 통해 안디옥을 뒤집어졌습니다.
상처 난 채로도 복음을 전한 사람들인데, 눈물로 가득했는데, 뒤집어졌습니다.
안디옥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예루살렘까지 올라갑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바나바를 보냅니다.
그들을 돕고 세워주려고 가장 따뜻한 사람을 보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서 제일 먼저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치 캘리포니의 갈보리 교회 초창기의 모습, 히피들이 모여 생긴 교회와 같았습니다.
‘질서’, ‘형식’도, 아닌 그들의 삶과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봤습니다.
그리고 “굳게 붙들라, 이 길에서 떠나지 말라”고 격려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격려하는 바나바에 대하여 이렇게 감동적으로 말합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은혜를 본 사람은 사람을 살리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람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카리스마로 세워진 교회가 아니라 ‘착한 사람’을 통해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이 착한 바나바는 교회에 큰 부흥이 오자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려옵니다.
더 좋은 동역자를 세웁니다.
그리고 1년 동안 바나바와 사울은 말씀의 뿌리로 공동체를 길러냅니다.
왜냐하면, 은혜로 시작했다면 진리로 자라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바로 그 공동체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란, ‘예수 얘기를 입으로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은혜로 묶였고’
‘말씀으로 길들여지고’ 더 좋은 사람을 옆에 세우는 공동체’속에서 생겨난 이름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걸 보고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아, 저 사람들은 그냥 새로운 유대인 종파가 아니야. 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야.”
우리 시대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너무 가볍게 쓰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그 이름은, 교회의 성격을 세상이 인식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렸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그때도 싸구려가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아닙니다. 원하기는 진짜 그리스도인, 이 별명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 저 사람? 예수 쪽 사람이야. 예수 편에 서 있는 사람이야.”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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