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5-18 주일설교
“세상의 관점과 영원한 관점”
(사도행전 5장 33~42절)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세상의 관점과 영원한 관점”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께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강림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이전의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숨어 지내던 그들은, 성령을 받고 거리로 나가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말이 달라졌고, 삶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사도행전 5장 33절부터 42절은,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매를 맞고도 “예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며” 돌아가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억압하고 협박해도 멈추지 않고, 두려움 속에서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한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성령의 도전과 위로를 함께 발견하길 원합니다.
매트릭스, 즉 가상현실이라는 영화를 보면 빨간 약(Red Pill)과 파란 약(Blue Pill)을 보여주며 무슨 약을 선택하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현실을 직면할 것인지, 아니면 안락한 거짓 속에 머물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으로, 파란 약(Blue Pill)을 먹으면 다시 매트릭스(가상현실) 안으로 돌아가, 현실을 모른 채, 익숙한 삶으로, 아픔, 고통, 진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한 자기기만의 세계에서, 안주하고, 영적 무지에 머무르지만, 빨간 약(Red Pill)을 먹으면, 매트릭스의 실체를 알아, 진짜 세상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직면합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면, 진리의 길, 십자가의 길, 마 16장 24절대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의 길을 갑니다. 왜냐하면, 중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잡혔는데, 이들은 잡아 가둔 종교 지도자들의 반응으로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33절입니다. “그들이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새” 심히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이단적인 가르침을 한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는데, 이들이 격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강팍한 마음(hardness of heart), 마치 바로 왕과 같은 마음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의로워서 회개할 것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도 필요 없다고 여긴 이유이고, 무엇보다도 이들 뒤에 마귀가 있어서 예수님의 일을 대적하고 싫어한 것입니다. 심히 분노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한 이런 분위기에서 ‘바리새인’이요, ‘율법 교사’로, 어릴 때부터 구약성경 연구에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바친 율법 선생 가말리엘이 가라앉히고, 이 말을 합니다. 34~35절입니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지 조심하라” 원래 공 회원이라 그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던 가말리엘이 격앙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조언을 남긴 것입니다.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사람’, 즉 자기 학파인 힐렐 학파만이 아니라 사두개파, 모두에게도 다 존경받는 그가 사도들에게 밖으로 잠시 나가게 하고, 이어서 1세기 초반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꺼낸 것입니다. 36~37절, “이 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선전하매 사람이 약 사백 명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드다는 자기를 위대한 지도자, 메시아로 자처했던 인물로, 약 400명 정도가 따랐어도, 로마에 의해 죽었다, 그 운동도 흩어졌다, 갈릴리 유다다 AD 6년경, 로마의 인구조사, 호적 등록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그도 로마에 의하여 죽고 운동도 사라졌다, 사람을 따르게 했어도 결국 죽고 흩어졌다, 그러니 ‘지금 한창 기세가 올라가고 있는 예수 운동인데, 괜히 사도들을 죽이면 자극하게 된다. 벌집을 괜히 쑤시는 꼴이 된다. 왜 이 일을 그냥 놔두면 되는데 더 큰 문제로 만드느냐? 그냥 두면 자연히 사그라질 것이다.’라고 전합니다.
그러면서 38~39절의 말을 합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무슨 이야기에요? ‘그냥 놔두면 된다. 이것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면 무너질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뜨릴 수 없을 뿐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게 된다. 그것은 무서운 일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셨지만, 부활하셨고, 따르는 자들은 흩어지지 않고 오히려 전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말리엘의 말이 굉장히 설득력 있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욕심에서 난 일이라고 해도, 단시간에 다 망하는 게 아님을 또한 현실이 보여주고 있기에 가말리엘의 말에는 100%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악한 사람이 더 오래 살고, 몸에 안 좋다는 것을 다 먹어도 병에 안 걸리고, 나쁜 짓과 못된 짓을 하며 남을 괴롭히는 사람이 부자가 되고, 착하게 살면 어렵게 되고, 망해야 할 이단들인데, 돈도 많고, 신도들도 많고, 망하지도 않고, 이것이 현실입니다. 안 그래요?
그러기에 가말리엘의 주장은요? 드다와 갈릴리 유다와 예수님을 반란의 주동자나 핵심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고, 세상의 관점으로 말한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나 사도들이나 다 실패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을 기준으로 보시며, 그분의 뜻과 영광은 ‘순간적인 성공과 고난’으로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차원이 다릅니다. 세상의 관점은? 결과 중심, 즉각적 평가, 즉시 성공, 힘, 영향력, 생존을 기준으로 삼기에 사도들은 ‘실패’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영원 중심, 목적 중심이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삶, 이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최고의 영광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영원의 관점’,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지금이 아니라 끝을 보고 판단하시고, 순간이 아니라 전체 역사와 영원을 기준으로 말씀하시는 영원한 관점, 처음과 끝을 아시는 하나님의 관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사야 44장 6절에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 22장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끝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가말리엘이 ‘그냥 놔두어서 망하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고, 성공하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하니까, 가말리엘의 말을 들은 이들이 40절로 마무리하죠? 그것이 무엇이에요? “채찍질”입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가말리엘의 조언에 공감하고 받아들이면서 율법에 기록된 형벌인 40에서 한 대 감한 39대의 채찍질을 사도들에게 가한 것으로 마무리한 것입니다. 본문은 간단하게 채찍질이라고 나오지만, 이 채찍질은 무자비한 채찍질로, 끝에 짐승의 뼛조각과 쇳조각이 달린 채찍입니다. 한 대를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쏟아져 나오는 채찍질입니다. 이것은 39대나 때리고 놓아주었으니 제대로 걸어갈 수 있었겠어요? 등이 다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는 상황인데, 놀랍게도 사도들은 기뻐했습니다. 41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들을 때리면서 오히려 ‘키득 키득’ 하고 웃는 종교 지도자들을 위한 기뻐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산상설교, 마 5장 11~12절,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가 생각이 났을 것이고, 그래서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벧전 4장 11~12절에서 이렇게 전하잖아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멈추지 않았습니다. 42절,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나오자마자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이다, 구원자이심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자기들만 알던 아주 이기적인 이들이,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하시는 동안에도 누가 크냐고 싸웠던 자들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다 도망갔던 비겁한 이들이, 이제 언제 어디서나 ‘예수는 그리스도다!’를 선포하며 가르치기에 힘썼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바로 그 그리스도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기다렸던 그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그 일에 증인이다. 한마디로 예수가 그 그리스도다. 우리는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영원한 관점, 하나님의 관점을 선포한 이들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성령 받은 사도들은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하고, 매 맞고 나서도 기뻐하며, 금지당해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라”는 진리를 쉬지 않고 가르치고 전하였습니다. 성령은 단지 감정의 충만함이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진리의 용기를 불어넣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열어주시며,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결코 멈출 수 없게 하십니다. 오늘 이 성령 강림 주일에 우리가 다시 붙들어야 할 고백이 있다면, “나는 성령 받은 자로, 이 시대 속에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조롱하고, 우리를 작게 보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럽게 여기시며, 성령으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받은 사람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복음은 멈출 수 없기에, 그리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의 심령이 다시 성령의 불로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관점이 아니라 영원한 관점, 하나님의 관점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