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향해 선 사람”(A Man Who Stood for Heaven)
(사도행전 6장 8~15절)
크리스천 여성 엘렌은 실리콘밸리의 한 중소기업의 회계 책임자인데, 어느 날 회사 대표가 그를 불러 “이번 투자 유치 전까지 재무제표 좀 ‘예쁘게’ 보여주자고. 원래 다 그렇게 해.”라면서 은밀한 부탁을 했습니다. 재무제표 조작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엘렌은 그날 밤 교회에 나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였고, 다음 날 회사 대표를 찾아가 “저는 제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고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고 싶습니다.” 하면서 사직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몇 달 뒤, 회사는 회계 부정으로 고소를 당했습니다. 투자자들은 엘렌 덕분에 손해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른 기업으로부터 더 큰 신뢰를 얻어 채용까지 되었고, 하늘을 향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수치와 눈물의 선택 같아도, 하나님은 하늘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앞에 선,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고요한 신앙인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는 시대의 박수를 받으려 하지 않았고요? 오직 하늘의 인정을 사모했습니다. 그가 누구냐? 우리는 그를 ‘스데반’이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이 한 사람의 이야기자,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이 사람, 즉 스데반을 바라보며, “하늘을 향해 선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본문은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8절입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단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그의 전 존재를 지배하였다는 것, 즉 성령이 다스리는 사람으로, 내면의 은혜와 외면의 권능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통은 은혜와 권능 중 하나에만 치우치잖아요? 은혜는 있지만 능력이 없고, 능력은 있지만 인격이 모자랄 때가 많잖아요? 하나님은 온전한 사람을 원하세요? 무슨 이야기냐면요? “하나님은 단지 능력 있는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 안에 주님의 성품이 담긴 사람을 쓰십니다.” 스데반이요? 이렇게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동시에 소유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죠? 예를 들어, 삼손은 놀라운 육체적 능력을 가졌어요? 하지만, 성품의 결함으로 무너졌습니다. 사울도요?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큰 외적 조건을 가졌지만, 내면의 불순종으로 폐위되었어요. 반면에, 요셉은요? 억울한 상황에서도 성품을 지켜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고, 다윗은 죄를 범했지만, 회개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자로 남았습니다. 핵심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은 능력보다 그 능력 안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품이라는 ‘그릇’을 먼저 보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딤후 2장 20~21절에 말씀하잖아요? “큰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으나, 깨끗하여 주인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되라”라고, 하나님은 능력의 크기로 판단하지 않고, 늘 “그릇이 준비되었는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품이고, 곧 정직이고요? 인내이고, 사랑이며, 거룩이고, 온유입니다. 우리에게 이것이 담겨 있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담기지 않으면 능력은 위험해지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요? 사역보다 중요합니다. 왜냐?, 사역은 결과지만요? 사람은 통로이기에 그렇습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성령 충만한 삶이었고, 말씀에 뿌리내린 삶이었고, 하늘을 바라보는 내면의 평안이었고, 돌을 던지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용서의 성품이었습니다. 능력보다 성품이 빛나서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원하기는 우리도요? 능력을 주시기 전에, 주님의 성품을 닮은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성품으로 사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멘.
두 번째로 그는 지혜와 성령으로 무장된 사람이었습니다. 10절에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라고 나옵니다. 무엇이에요? 그의 탁월함이, 단지 기사와 표적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즉 지적 능력 또한 뛰어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헬라 문화권에서 온 유대인들로 구성된 회당 사람들과 논쟁했습니다. 이것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헬라식 수사학과 구약에 대한 깊은 이해가 깊었어요? 즉 유대 교육을 받았지만, 헬라 문화를 이해하는 이중 문화권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가요? 예루살렘에 120명이 기도하다 성령 받고 3천 명이 들어올 때 예수 믿은 자이었거든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초신자’입니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베드로가 2장과 3장에서 사람들에게 했던 설교보다, 또 성전에서 했던 설교보다도 더 월등했습니다.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거든요. 그가 이렇게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수준이 뛰어난 이유가 무엇이에요? 온 마음을 다해서 주의 종으로 살았기 때문이고, 그 지혜가 성령 안에서 나온 지혜이었기 때문입니다. 헬라 문화에 익숙한 디아스포라 유대인이었지만, 그 문화를 복음을 위해 사용했어요? 그가 택한 무기도요? 논쟁이 아닌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뛰어난 학자들이라 해도 스데반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요? 오늘의 시대를 이기려면, 세상의 논리보다 더 높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대는 혼란하고 기준은 무너졌잖아요? 그리고 감정, 여론, 문화 또한 진리의 대체물이 될 수 없잖아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이고, 유일한 분별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길이 되고 자신의 삶을 이끎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시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원하기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마음에 새기고, 삶으로 증명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세 번째로 모함과 거짓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11~14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스데반을 향한 모함이 시작되었는데, 먼저 사람들을 매수해서 거짓 증인을 세우고,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조작했습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요? 예수를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칠 정도로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반대로 가는 장사꾼입니다.
제가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갔을 때요? 예루살렘에 아주 유명한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신 ‘비아 돌로로사’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쓰러진 곳마다 순서의 번호가 붙어있습니다. 여러분, 거룩하고 경건한 길이 맞잖아요? 그런데 그 길이요? 시장길이 되어 버렸습니다. ‘비아 돌로로사’ 길옆으로 전부 가게들이 들어섰고요?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된 많은 유적지를 통해 장사합니다. 지금 스데반을 붙들어 놓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문제가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전역에 퍼져 사는 유대인 남자들은, 1년에 3번씩 의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으로 와서 제사를 드려야 했거든요. 매년 수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와 머물면서, 소나 양이나 새를 잡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하는 경비가 얼마일까요? 대단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그들 나라에서 어떻게 소와 양을 끌고 와요? 할 수가 없죠? 그래서 돈으로 짐승을 사 제물로 드려도 된다는 율법 화를 그들이 했고, 돈도 당시 사용되는 일반 로마 화폐가 아니라, 성전 돈, 즉 세겔이었기에 이것을 바꾸는데 엄청난 이익이 돈 바꿔주는 사람과 제사장들에게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흠 있는 것도, 들어오게 함으로 뇌물이 오고 가고 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수입 또한 만만치 않았어요? 그래서 당시 예루살렘 사람치고 성전 덕분에 먹고 살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즉 거짓 증인들의 모함에 백성들이 확 넘어간 이유가 그들의 돈줄이 끊기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나 무슨 경건함과 거룩함이나 성전을 지키겠다는 차원이 아니었어요. 여기에 중요한 진실 하나가 담겨 있죠? 무엇이에요? 진리를 말하는 자는 항상, 공격을 받는다는 것이고, 의롭게 살겠다는 결단은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침묵하였고, 반박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섰으며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네 번째로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15절입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여러분, 얼굴에 그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다 드러납니다. 특히 가장 솔직한 표정을 드러낼 때가, 위기 앞에 섰을 때입니다. 지금 스데반은 공회 앞에 섰어요? 온갖 거짓과 모함,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이것이 단지 밝고 환한 표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의미가 아닙니다. 결연한 믿음이고,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하나님의 뜻 앞에 절대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 얼굴은 그냥 나오는 얼굴이 아닙니다. 기도의 얼굴입니다. 용서의 얼굴이고, 성령께 온전히 지배받은 사람의 얼굴입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 모함으로 자기를 죽이려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라 하더라도, ‘나는 여호와를 찾겠다’라는, 예수 복음,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진리를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엄숙하고도 의지가 가득한 얼굴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얼굴을 가지신 분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계시죠? 저는 이들이 바로 이름도 없이 교회를 섬기는 평신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일 새벽 예배를 위해 난방과 조명을 켜는 이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환자 가정을 찾아가 말없이 반찬을 놓고 오는 이들입니다. 이들은요?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를 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서의 살아있는 고백의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얼굴이 바로 천사의 얼굴입니다. 스데반은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 존재가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스데반의 능력에 주목하죠. 그러나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난 이유는, 그가 준비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능력이 아니라 존재를 통해 일하십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내가 누구냐를 보십니다.
스데반은요? 현실을 이기려 하지 않았어요.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공회 앞에 섰지만,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입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되, 현실 너머를 보는 눈. 그는 세상에서 불리해지는 자리에 서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천사의 얼굴, 그것은 성령이 다스리는 존재의 얼굴입니다. 외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평안입니다. 성령께 붙들린 사람은요? 상황을 해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존재를 내어드립니다. 그러기에 신앙은요? 행동보다 방향입니다. 나중에 나누겠지만, 스데반은 돌을 맞아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패배가 아닙니다.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는 승리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조급하죠? 지금의 성공이, 지금의 인정이 우리의 신앙을 증명해 주기를 원합니다. 이것 아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시간에, 그분의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것, 믿음은요? 그 기다림을 견디는 인격입니다. 스데반은요? 우리보다 위대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눈을 바라본 사람입니다. 그는 돌을 맞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스데반의 얼굴에서 한 사람의 위대함을 보았어요. 중요한 것은, 그의 얼굴이 우리를 향한 부르심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스데반처럼, 하늘을 향해 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시선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자,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늘을 행해 선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하는 얼굴,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 말씀대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한 자는 ‘하늘을 향해 선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