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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기회를 잃지 말라”

(행 7장 37~53절)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돌이킬 기회를 잃지 말라”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요? 후회를 많이 합니다. 후회는, 신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리고 인간적으로, “지난 일의 잘못이나 부족함을 깨닫고, 마음 아파하거나 괴로워하는 것.” 이것이 후회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며 아파하는 마음이에요. 예를 들어, ‘그때 그렇게 하지 말 걸…’ ‘그 말을 하지 말 걸…’ ‘그 선택이 아니었어야 했는데…’ ‘아휴, 내가 결혼을 이 사람하고 하지 않았으면 되었는데’,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의사가 말했을 때 바로 검사를 받았더라면, 큰 병으로 번지지 않았는데’라는 등등, 살면서 경험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한 말, 하지 않은 행동, 지나쳐 버린 기회, 선택했던 길, 놓쳐버린 사람에 대한, 살면서 많은 돌이킬 수 있었던 기회들을 놓친 이것을 가리켜 후회라고 하는데, 후회는 다른 말로 기회이기도 합니다.

 

스데반은 오늘 본문, 그러니까 그의 마지막 열정을 쏟아내고 있는 최정점의 설교에서, ‘유대 민족 전체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거절해 온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고, 이제 후회하는 인생이 되지 말고, 돌이킬 기회를 잃지 말라고 쏟아내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냐? 거절당한 하나님입니다. 37~41절을 제가 다시 읽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 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살아 있는 말씀을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그 때에 그들이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스데반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반역의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그들의 죄 또한, 단지 실수가 아닌 오래된 패턴이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요? 이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식이요? 예수님과 모세를 나란히 두는 형식, ‘병행’ 또는, ‘평행(parallel)’이죠. 그 증거가 바로 “내 뒤에 너희 가운데서 한 선지자가 일어날 것”이라 했던 신명기 18장 15절의 말씀 인용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이 무엇이냐면? 한마디로 “모세를 거절한 것이나, 예수를 거절한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죄”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실수가 아니었다는 것을,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까지 꺼냈습니다. 조상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이유가, ‘모세가 늦어졌다는 이유로 금송아지를 만들었지만, 결국 우상숭배를 하였다’, 그러니까 ‘하나님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고, 하나님보다 자기 전통과 권위와 시스템을 지키는 데 만 힘썼다’라는 이야기이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복종 대신에 거절을 선택했고, 믿음 대신에 반역을 선택했다’입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방식 자체를 거부한 것이고,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는 신앙의 왜곡을 한 것이다”라고,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이들이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바꾸려고 시도하였다”라고 스데반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그러기에 광야에서, 그리고 약속의 땅, 어디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서조차,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는 분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지만, 지키지도 않았고, 선지자를 보냈어도 거절했고,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끝내 거절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메시아는 하인이 아니라 주인인데, 너희들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과거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였으며, 이제는 약속된 의인,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죽였다고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죠? 신앙의 본질은? 내가 하나님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것인데, 기도도?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인데, 예배도? 하나님보다 내 감정, 내 편안함이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조작당하실 수 없는 분, 사람의 의도나 행동에 의해 조종되지 않으시기에 그렇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하나님은 사람의 감정, 종교적 열심, 또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따라 반응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만큼 기도했으니 응답하시겠지.”, “내가 헌신했으니 당연히 복 주실 것이야.” 여러분, 하나님은 기계적 반응을 하시는 우상이 아닙니다. 거룩하고 자존적인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민수기 23장 19절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람과 같이 아니하시니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과 같이 아니하시니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입니다. 조작하려는 마음의 뿌리는요? ‘우상숭배’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주인 되고 하나님은 수단이 되길 바라는 태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속성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도구 삼아 자기를 위해 존재시키고 싶어 한다.”가 아닙니까? 그러기에 진짜 신앙은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항상 그분의 주권 앞에 엎드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고 고백했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드리기를 원합니다.

 

 

두 번째는 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대체했다, 즉 대체한 우상들입니다. 42~43절입니다. “하나님이 외면하사, 그들을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 두셨으니,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너희가 광야에서 사십 년간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들을 ‘하늘의 군상’ 즉 우상에게 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찾은 하늘의 군상이 무엇이라 하였어요? ‘몰록’이었고 ‘르판’이었다고 합니다. 몰록은 아몬 족속의 우상으로 아기들을 제물로 바치게 합니다. 르판, 혹은 레판은, 몰록과 함께 언급되었던 별의 신으로, 당시 암몬과 바벨론과 앗수르, 이집트 등에서 토성을 신격화하고 숭배했던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화가 나서 벌주셨다”가 아니라 “우상숭배를 강제로 막지 않으셨다, 내버려 두셨다”이었고, ‘그들이 택한 죄의 결과를 그대로 맛보게 하셨다’를 하셨다는 것, 쉽게 말하면, “그래? 네가 그렇게 원했어?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대로 살아봐” 그 결과가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바벨론 포로라는 역사적 심판으로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성전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입니다. 44~50절입니다.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 하시 나니, 선지자가 말한바,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무슨 이야기일까요? 역사 서술이 아니라, ‘하나님 임재’ 이야기입니다. 그곳이 증거의 장막, 성막입니다. ‘광야에서의 하나님 임재’,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라고 말하죠? 그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만들었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라는 눈에 보이는 증거의 장소이었다고 전합니다.

 

 

즉 예배가 시작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받아...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이것이 광야뿐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도, 함께했다고 전합니다. 무엇이에요? 하나님은 ‘장소에 제한되지 않으신 분’이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과 함께 이동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이동식’이 정착된 성전의 시작이 다윗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처소를 준비하게 하여 달라고 하더니….” 그는 성전을 직접 짓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처소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고, 그 뜻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셨다는 것, 솔로몬 때 완공, 즉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가 되게 하심으로, 이동식에서 고정된 ‘성전’이 세워졌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임재가요? ‘성전’에 머무는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스데반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말하느냐?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지만, ‘하나님의 실제 거처’는 성전 그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주권 아래 있는 모든 창조 세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라고, 하나님은 어디에도 계시며, 어디에도 제한되지 않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스데반은 무엇을 말하려고 한 것일까요? “형식은 중요하지만, 형식은 본질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막도, 성전도 지으라고 명령하셨지만, 하나님 당신은 그 너머에 계신 분이다. 하나님은 이동하는 백성들과 함께 이동하셨고, 오늘도 우리 삶의 여정 속에 함께 동행하신다” 이것입니다. 성전 중심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 중심,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기를 소원하는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데반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건물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막과 성전을 자랑하였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도 예수님 앞에서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반대의 질문은? “내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 거하겠느냐”입니다. 무엇이에요?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예배당도 무덤이다’ 입니다.

 

 

 

마지막은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입니다. 51~53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는 천사가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조상들처럼 오늘 너희들도 “의인을 죽였다”라고 전하죠? 스데반은 지금 죽음을 무릅쓰고 가장 뜨겁고 비통한 절규이자, 돌이킬 마지막 기회를 잃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죽였다”, 이 말이 청중을 격분시킬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실제로 이 말로 그들을 격동시켜 돌에 맞아 죽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잖아요? 하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침묵하는 것은 그들을 더욱 파멸로 내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의 이 외침은 “너희가 잘못했다!”라는 비난이 아니거든요? “너희가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라는 회개 촉구입니다. 하나님의 애통을 품고 전한 것입니다. “너희 조상도, 너희도, 똑같다”, 설교 전반에서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등을 통해 이스라엘의 반복된 영적 패턴을 드러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처음에는 거절하고, 끝내는 그들을 죽이기까지 했으며, 역사가 흐른 뒤에야 그들이 보낸 자임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이 패턴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너희도 그 의인을 죽였다!”라는 말로 역사의 반복을 멈추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선지자요, 구원자이십니다. 그를 거부한 것은 곧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요, 그를 죽인 것은 곧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짓밟은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요? 단순히 과거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요? 하나님의 보내심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고 있지는 않는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말씀을 듣고도 따르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다시 무너뜨리는 삶’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 태도라면, ‘성령을 거스르는 자’입니다. 교회의 전통과 형식이 중요하여, 복음의 본질을 외면하는 삶이라면, 이 시대의 ‘바리새인’입니다.

 

 

스데반은 이렇게 긴 설교를 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죽어도 전해야 할 진리”였습니다. 그의 외침은 “마지막 경고이자 사랑의 호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설교는 분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도 진리를 전하였습니다. 즉 그들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준 것입니다.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까지도,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용서를 구하죠? 원하기는 이제 스데반이 전한 그 ‘의인’을 따라가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따라갑니까? 그 의인을 알아가기를 원합니다. 특히 우리 마음이요? 하나님을 밖에 세워두는 일이 없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요? 늘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그 기회를 다시 마주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실패는? ‘하나님이 내게 침묵하신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분의 말씀을 외면한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통해, 양심을 통해, 사건을 통해, 공동체를 통해, 주일예배를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원하기는 시편 119편 105절 말씀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를 붙잡고, 10장 27절 말씀대로,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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