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모음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는 죽었고, 교회는 흩어졌다”

(사도행전 7장 54절~8장 3절)

 

 

여러분, 1956년, 에콰도르의 ‘와우라니족’, 당시에는 ‘아우카족’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짐 엘리엇과 4명의 미국 선교사는요? 복음도 전하지 못하고 창에 찔려 다 순교 당합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20대 초반, 시카고의 휘튼 대학교 출신들입니다. 이 소식에 당시 전 세계 교회는요?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이렇게 귀한 젊은 선교사들을 죽게 하셨는가”라는 질문들을 쏟아냈습니다.

 

오늘 본문도요?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돌로 맞아 죽었어요?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고, 은혜와 권능으로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30대 초반,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고요? 마지막 순간에도 용서를 구했던 그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피 냄새가 가시지 않은 그 시간에 교회는 흩어졌습니다. 짐 엘리엇도 그렇고, 스데반도 그렇고,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하나님, 왜? 그렇게 귀한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복음을 전한 것이잖아요? 나쁜 사람이 죽는다면야? 이해된다고 하지만, 이 귀한 사람들을 왜? 죽도록 내버려 주셨으며, 그리고 왜 교회는 보호하지 않고 흩어지게 만들었나요?”.

 

 

이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크고 깊은 계획’, ‘하나님의 큰 그림, 빅 피처’라는 사실 밖에 없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요? 하나님의 큰 그림은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는 것이고, ‘흩어짐’ 또한 ‘실패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짐 엘리엇이든 스데반이든, 이들의 죽음이 우리 눈에는 비극으로 비추어지지만, ‘복음의 물결이 시작된 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이 “그는 죽었고, 교회는 흩어졌다”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시작은 아주 어두운 장면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었고, 진리를 외쳤다는 이유로, 군중에게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곧이어 교회도 큰 핍박으로 교인들이 흩어지는 어두운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장면은 결국 끝이 아니라 시작인데, 그러면 무엇에 대한 시작일까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인간의 감정과 계산을 초월한다는 사실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복음 확장 계획, 하나님의 거대한 보내심의 역사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날, 그 죽음, 그 흩어짐의 현장 안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몇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무엇이냐? 스데반을 향한 이들의 반응입니다. 54절과 57절, 58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거짓 증인들에 의해 모함받아 71명으로 구성된 공회에서, 아브라함, 요셉 모세 이야기를 하였고,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는 게 아니라,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분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라고 전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반복된 하나님의 거절 역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도다”라고 하니까, “마음에 찔려 이를 갈 거늘”, 마음이 찔렀지만, 이를 갈았습니다.

 

솔직히 스데반의 설교는요? 단순한 논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였거든요? 그들의 역사, 조상들의 불순종, 성령을 거스르는 현실을 직면하게 만든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를 갈았어요? 빛이 어둠에 있던 모든 더러움을 드러내니까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었습니다. 즉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냐?’가 되었고, ‘사도도 아닌 니가, 일곱 집사 중 한 명인 니가, 본토도 아닌 헬라파인 니가, 다른 데서 온 니가’ 신성모독 죄로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두 번째는 그런데 스데반의 반응입니다. 55~56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성령 충만’한 스데반은 돌을 들어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도 스데반의 편에 서 계심을 봅니다.”

 

무엇입니까? 하늘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그를 인정하고 환영하고 계셨다는 것, 즉 하나님이 일어서셨어요? 세상의 법정에서는 고립되었지만, 하늘 법정에서는 외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편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고, 그의 편에 예수님께서 서 계셨기에, 스데반을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셨습니다. 아니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질 때 앉아 계실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법정은요? 그를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법정은 그가 옳다 하셨습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억울함을 겪고, 진리를 말하다 외면해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우리 편에 서 계심을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세 번째로는 사울의 등장입니다. 사울이라는 청년, 후에는 바울이죠? 그가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이야기입니다. 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군중들은 짐승처럼 이를 갈고, 짐승처럼 큰소리로 울부짖으면서 일제히 달려들어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성 밖으로 내쳤어요? 율법에 따른 일반적인 사형 집행 방식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럽고 부정한 것”은, 성 밖에서 처리하는 것이 이들의 율법이었기, 이것이 예루살렘 성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라 믿었기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스데반이 정말로 “더럽고 부정한 것”입니까? 성령 충만한 하나님의 종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잔인한 사형 방식, 아니 불법적 린치를 가합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겼어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매수한 거짓 증인들이 스데반의 옷을 벗겼습니다. 왜? 벗겨요? 돌을 던질 때 더 힘을 실리도록 벗겼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옷을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직접 돌을 던지진 않았고, 그 죽음을 지지하고 동의한 그에게, 그곳을 진두지휘하면서 조종하는 실제 리더이었던 그에게 던졌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요? 8장 1절에 나오듯이, “사울은 그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이었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을 바라보며, 절대 잊을 수 없는 성령의 얼굴과 기도를 보았을 그가요? 후일에 증오의 자리에서 은혜의 자리로 옮긴 자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죠?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성 밖’에서 일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 밖은 외면당하고, 고난받는 자리이고, 세상에서 밀려난 그 자리 아닙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자리도, 안전한 자리도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우리는 대부분 성안에서 살고 싶어 하잖아요?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편안하고, 보호받는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 밖에 계셨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13장 12절에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라고 밝히죠? 사람들이 손뼉 치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외면하는 그 길에서 시작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무엇을요? 구원을, 세상이 버린 자리를 하나님은 구원의 출발점으로 삼으셨고, 고난의 자리를 영광이 시작되는 자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 그 자리가 비록 성 밖이라 할지라도, 먼저 그 자리는 영광의 자리이고, 하나님은 서 계시는 자리이며, 예수님이 기다리시는 자리이고, 복음은 시작되는 자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스데반의 기도입니다. 59~60절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들이 던진 돌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다른 하나는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면서, 머리가 깨지고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피가 흐르고, 뼈가 부서지고, 몸이 무너지고 있어요?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살려 달라” 하잖아요?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요? 고통을 벗어나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기도가 흘러나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드린 기도와 비슷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해요? 예수님을 신뢰하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은요? 죽음의 순간에까지 신뢰하는 것이고, 진짜 믿음은요? 평안할 때가 아니라, 무너질 때 드러납니다.

.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이 기도가 이해되십니까? 이 기도가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을, 아니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가 가능하다고요? 이론은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경험해 보셔서 잘 알잖아요? 실제로는요? 가능하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이고, 거짓으로 고소했고, 조롱했고, 죽이고 있는 자들인데.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믿었기에, 그 복음은 용서로 시작되는 복음이기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중심은요? 용서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요? 용서도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 없이는 복음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눅 23장 34절,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의 삶을 자기 삶으로 살아낸 스데반의 기도가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입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장면을 누가 지켜보고 있었다고요? “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더라.” 그 청년 사울, 훗날 바울인 그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의 이 기도가 사울의 심장을 찔렀죠? 그래서 훗날 그는 이렇게 고백하잖아요? “내가 전에 사울이었으나,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으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라고요? 무엇이에요? 성 밖에서 스데반이 드린 기도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변화시켰고요? 복음을 세계로 확장시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사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세상을 바꿉니다. 성 밖에서의 스데반은, 죽음을 주님께 맡기고, 자신을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 이렇게 중보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그의 죽음을, 누가는 ‘잔다’라고 7장을 마무리합니다. 의도적인 표현을 담았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11장 11절에 예수님께서 쓰셨던 이 단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를 담았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을 담았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의 죽음은, 패배나 절망이 아닌, 부활을 기다리는 잠이기에 담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다시 깨어날 것을 믿는 것을 담았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은요? 쉼입니다. 그리고 부활은요? 새벽에 옵니다. .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큰 그림, 하나님의 빅 핏쳐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이렇게 하나님의 큰 그림으로 그려나갑니다. 8장 1절 하반 절입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유대교를 철저히 따르던 바리새인이자, 기독교, 그러니까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던 중심인물 중 하나였던 사울은, 성령 충만하고, 지혜가 뛰어난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여겼고, 예수를 믿는 이들은, 율법 중심의 신앙에서 벗어났고, 공공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로 인식하여, 제거만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길이라 확신하여 스데반의 죽음의 계기로 박해의 기폭제가 되게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스데반을 그렇게 끝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비참하게 돌에 맞아 죽은 그날, 피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았을 그날에 교회에는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이 몰려왔지만, 그를 위해 장사를 지내죠? 2절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여기 “경건한 사람들”은, 단순히 슬퍼하는 무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진리를 따르려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스데반이 말한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원들입니다. 그들이 크게 울었어요. 단순한 슬픔, 그 이상, 억제할 수 없는 통곡을 하였고, 단순한 이별이 아닌, 의인의 억울한 죽음,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희생당한 울음, 공의가 무너진 현실에 대한 슬픔, 하나님의 영광이 짓밟힌 현실을 애통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돌 맞아 죽은 자는 죄인으로 간주하여, 장례조차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들은 스데반을 의인으로 보았고, 존귀하게 장례를 가집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사람이며, 죽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라는 부활 신앙을 나타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거리 한복판에서 스데반을 위하여 울었고,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거룩을 향한 저항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었지만, 그들의 울음은 복음의 씨앗이 되어 다른 이들의 심장을 울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즘 시대는요? 울지 않습니다. 아니, 거룩한 것 앞에, 울 줄도 모릅니다. 의인이 짓밟혀도 침묵하고요? 진리가 사라져도 무관심합니다.

 

 

하지만 경건한 사람은 울 줄 압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스데반을 향한 이 눈물이요? 스데반의 피와 함께 복음의 씨앗이 되어 흩어진 땅에 뿌려졌습니다. 뿌려진 그 땅마다 교회가 세워졌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스데반의 피가 헛되지 않게 하신 큰 그림이고, 그의 피가 복음의 씨앗이 되어 온 땅에 흩어지게 하신 큰 그림입니다. 그때가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타이밍, 우연을 가장한 하나님의 작정이었고, 스데반이 죽은 날, 동시에 교회가 깨진 날, 그날에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즉 사도행전 1장 8절, 주님께서 하신 말씀하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의 현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큰 그림입니다. 복음은 언제나 눈물 위에 세워졌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경건한 사람들의 눈물로 자라났습니다. 우리도 진리를 위해, 사람을 위해,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 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그 눈물을 흘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짐 엘리엇과 4명의 미국 선교사도 죽었고, 오늘 본문의 한 사람도 죽었습니다. 그리고 짐 엘리엇과 4명의 미국 선교사도, 스데반의 죽음 그 속에서 복음이 심어졌습니다. 다음 주에 나누겠지만, 교회는 흩어집니다. 하지만, 흩어진 곳에서, 복음은 계속 증거되었고, 교회는 계속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요?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병, 우리의 고정 관념이라는 우리의 예루살렘, 우리의 사마리아, 우리의 유대 땅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눈물만 흘리고 있는 우리를 흩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머물고 싶어 하는 우리를 흩어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었어요? 그리고 교회도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었습니다. 지금도요? 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서 복음을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잔멸 당하는 것 같아도, 역사를 지휘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야 할 목적이 무엇일까요?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고,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부름에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듣기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1 2025-3-2 주일설교 “능력의 이름 예수” (행 3장 11~26절)     file admin 2025.03.02 385
30 2025-3-9 주일설교/“고난이 시작되었어도” (사도행전 4장 1~12절)   admin 2025.03.08 368
29 2025-3-16 주일설교/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행 4:13-22)     file admin 2025.03.19 370
28 2025-3-23 주일설교 “성령으로 드린 기도의 능력” (사도행전 4장 23~31절)   admin 2025.03.23 399
27 2025-3-30 주일설교/“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사도행전 4장 32~37절)   admin 2025.03.30 403
26 2025-4-6 주일설교-“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충격적인 죽음” (행 5장 1~11절)     admin 2025.04.06 370
25 2025-4-13 종려주일설교(호산나/막 11:1-11)     file admin 2025.04.13 360
24 2025-5-4 주일설교(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들/행 5:12-16)     file admin 2025.05.04 365
23 2025-5-18 주일설교   “세상의 관점과 영원한 관점” (사도행전 5장 33~42절)   admin 2025.05.18 339
22 2025-6-1 주일설교 “하늘을 향해 선 사람”(A Man Who Stood for Heaven) (사도행전 6장 8~15절)   admin 2025.06.01 327
21 2025-6-8 야외예배   admin 2025.06.17 268
20 2025-6-15 아버지주일 설교/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아버지/(에베소서 6:4)     file admin 2025.06.17 291
19 2025-6-22 주일설교/“약속을 향해 믿음의 발걸음을 걸어라” /(행 7장 1~16절)     file admin 2025.06.22 343
18 2025-6-29(주일)   “하나님은 광야에서 준비하신다” (사도행전 7장 17~36절)   admin 2025.06.29 278
17 2025-7-6 주일설교/“돌이킬 기회를 잃지 말라” (행 7장 37~53절)   admin 2025.07.13 252
» 2025-7-13 주일설교(사도행전 강해)/“그는 죽었고, 교회는 흩어졌다” (사도행전 7장 54절~8장 3절)   admin 2025.07.13 267
15 202507-20 주일설교/사도행전 강해/흩어짐이 곧 파송입니다/행 8:4-13   admin 2025.07.20 261
14 2025-7-27 주일설교/“성령은 쇼핑 목록에 없습니다” (행 8:14~25)   admin 2025.07.27 260
13 2025-8-3 주일설교/“하나님의 GPS: 성령” (사도행전 8장 26~40절)     admin 2025.08.03 265
12 2025-8-24 주일설교/빛이 멈춘 그 길에서 (행 9:1~9)   admin 2025.08.27 182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11 Nex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