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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31 주일설교

 

 

“적을 형제로 부르다”

(행 9:10~19)

 

 

오늘 말씀 나눌 말씀의 제목은요? “적을 형제로 부르다” 입니다. 여러분, 적을 형제로 부르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적을 형제로 부르는 것’인데, 과연 이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그만큼 불가능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불가능한 자리에서 일하시고, 원수를 형제로 부르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야곱을 죽이려 했던 에서가 눈물로 야곱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 모습이고, 자신을 배신했던 베드로를 다시 ‘내 양을 먹이라’ 하며 세워 주신 모습이며, 십자가 위에서는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자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형제로 품으신 모습이 이 모습입니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잘 아시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정치 지도자입니다. 인종차별에 맞서 투쟁하다 1962년 체포되어 27년간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최초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되죠? 복수가 당연한데, 그는 “용서와 화해”를 기반으로, 보복보다는 용서를 강조하였고, 자신을 27년 동안 감옥에 가둔 백인 정권의 지도자들을 ‘형제’라 부르며 화해를 이끌었습니다. 현실은 힘든 일이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적이었던 사울을 형제라고 부르는 ‘아나니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자인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 아나니아라는 인물입니다. 10절을 볼까요?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을 변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사도행전에 보면요? 이 ‘아나니아’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세 명이나 나옵니다. 첫째 인물은, 헌금 문제로, 저주의 죽음을 맞은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이고, 둘째 인물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 변화되는 과정에서 안내자 역할을 한 ‘아나니아’이고, 셋째 인물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행 23장 2절에 나오죠?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두 번째에 해당이 되는 인물 ‘아나니아’를 나누는데 보세요? 사울을 변화시키는 일에 쓰임을 받는 이 ‘아나니아’가 어떻게 보면 큰 인물처럼 알려져야 하는데요? 희한하게? 기록이 고작 다메섹, 그러니까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사는 주님의 제자였다고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 22장 12절에 보면요?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 ‘아나니아’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고 언급합니다. 교회 내에서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도 칭찬을 들었다는 것, 율법에 따라 경건한 예수 믿는 크리스천이 바로 ‘아나니아’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요? 주님이 환상 중에 나타나셨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은 모습입니다. 10절을 다시 봅니다.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셨다는 것은요? 필요와 상황에 맞게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사명을 주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것이에요. 그의 이름을 불렀어요? 그런데 즉시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전혀 놀라지 않은 모습이고, 마치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모습을 보입니다. 왜냐하면, 놀랐거나, 무서워했다는 단어가 전혀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는 바로 “주님,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하였기에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가 만약 환상 가운데 주님을 만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아마 두렵고, 떨리고,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아무도 없는 자리에 기도하다가 부스럭 소리가 나면 깜짝 놀랍니다. 산 기도를 해보셨나요? 밤이면 더 무섭고, 낮인데도 기도하다가 부스럭 소리에 뱀이라고 생각하여 무섭게 느낍니다. 그렇죠? 그런데 ‘아나니아’는요? 주님이 자기 이름을 부르셨을 때, 담담하게 답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답합니다.

 

 

이렇게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삶 전체가요? 이미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안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의 경건한 삶이 있었다는 것이에요? 사울이 아나니아에 대하여 말한 것이 무엇이었어요? 아나니아는 다메섹 교회 안에서 경건한 제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단순히 “믿은 사람”이 아니라, 늘 기도와 말씀 안에 거하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에 낯설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임재를 일상으로 경험한 자였습니다. ‘환상’도 그에게 충격적인 이례적 사건이 아니라, 늘 이어지던 하나님과의 교제이었습니다. 장 사모님에게 전화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텔레파시와 같은 의미입니다. 늘 주님과 교제하며 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여기 있나이다”라는 의미는요? “주님, 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쓰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순간의 용기가 아니라, 평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쌓아 올린 응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이 자리에 머물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는요? 이 이름이 없는 제자에게 큰일을 맡기시는 하나님입니다. 11절을 볼까요?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여러분, 그는 사도도, 유명한 지도자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주님이요? 큰일, 즉 사울의 회심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가능케 한 이 사명을 맡기십니다. “‘직가’라는 거리에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직가는 straight street이에요. ‘똑바로 뻗은 길’입니다. 지금도 있거든요? 1마일 정도나 똑바로 뻗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명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너무나도 부담이 되는 인물인, 사울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사울은 누구예요? 바리새파 유대인의 핵심 인물이잖아요? 스데반의 순교에 핵심이었고, 교회 핍박의 핵심 행동대장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무려 200마일 정도 떨어진 이 다마스쿠스까지, 예수 믿는 자를 잡기 위해 쫓아왔던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그런 자를 찾으라는 것이에요. 심지어 사울에게도 이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12절입니다.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그가’는 사울을 말합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찾아올 것이고, 그가 안수하여 다시 보게 될 것을 들은 것입니다.

 

 

네 번째는 순종하는 아나니아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그는요? 사울에 대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충분히 이 말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 주님, 잠깐만요?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사울이요? 사울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잖아요? 이미 예루살렘 교회를 핍박하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요? 심지어 스데반의 죽음에 결정적이었던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그를 만나라고요?’라고 물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13절, 14절입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님의 이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뜻 동의할 수도 없었어요.

 

 

무엇보다도 교회를 잔멸하며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날뛰던 이 사울이, 앞을 못 보게 되었잖아요?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복음이잖아요? 안 그래요? 하나님의 역사요, 원수의 눈을 멀게 하셔서, 더 이상 우리를 핍박하지 못하게 막아주셨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요? 그 원수에게 가서 눈을 뜨게 하라고 하십니다. 절대 가까이 가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그의 눈에 띄면 안 되는 사람에게 가라고 하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지만, 아니 주님은 전혀 설명도 하지 않고 이 말씀을 하시잖아요? 15절과 16절입니다.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내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이방인들에게, 세상의 왕들에게,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주님의 증인이 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세요? 그는 이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거듭나고 회복된 사울을 17절이 보여줍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복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목적도요? 성령 충만이고,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눈이 회복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회의 원수였던 사울을 “형제”라고 받아들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공동체의 문을 열어주는 상징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고, 사울의 개인적 회심이 공동체적 수용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8~19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아시다시피 그는요? 시력을 잃었어요.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며, 식음 전폐, 즉 금식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이 아시고 계셨어요? 그래서 ‘아나니아’에게 ‘기도하고 있는 그를 찾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기도는, 주님께서 아나니아를 부르실 때까지 계속된 기도이었습니다. 즉 애초부터 작정한 금식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 일까요? 도저히 먹고 마실 수가 없었거든요. 지금까지 자기가 쌓아왔던 자신의 모든 신앙 체계가 우르르 무너졌기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울은요? 이렇게 주님께서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하시는 그릇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시작된 때로부터 4년이 지난, 주후 32년경 회심했습니다. 교회의 박해자였으며, 죄인 중의 괴수이던 그가 사도행전의 주역으로 나오는 이 일에 ‘아나니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결론으로 이 질문을 던져봅니다. 과연 ‘우리도 아나니아처럼 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적을 형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사실 아나니아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결박하고 죽이려던 박해자였고, 다메섹에 온 것도, 바로 그 목적이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 “형제여”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의 성격입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했죠? 그러나 주님의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무슨 이야기에요? 인간적인 감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고, 사울을 박해자로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신 새로운 사도로 바라봤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형제여”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이 호칭은요? 단순한 인사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인정하는 신앙적 선언입니다. 사울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지, 이제는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형제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요? 과거의 죄를 넘어서 예수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보여준 아름다운 모습을 그가 보여준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요? 예수님의 용서에 기초한 믿음입니다. ‘아나니아’가 스스로 용서하려고 애쓴 것이 아니었어요? 예수님께서 사울을 용서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에 “형제여”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 증거가 15절에 예수님이 이미 “그는 내 택한 그릇이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나니아의 자기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선언에 근거하여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울이 변한 것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사울을 용서하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솔직히 아나니아는 사울의 회심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 택한 그릇이다”라고 하셨기에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러기에 아나니아의 용서와 환대는 예수님의 용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형제여, 자매여”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그 사람이 완벽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미 그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쉽게 용서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과거 때문에, 여전히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상처 준 사람, 배신한 사람,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 늘어갑니다. 안 그래요? 그런데 우리의 시각이 아니라 주님의 시각으로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먼저 용서하셨기에 그렇습니다. 아나니아가 부른 “형제여”라는 말로 인해, 사울은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교회는 새로운 관계를 세우는 곳이고, 과거를 묻는 곳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새로운 출발이 선언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원수도 형제가 되고, 미움도 사랑으로 바뀝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님이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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