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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9-14 주일설교

 

 

“애니아가 벌떡, 다비다가 벌떡”

(사도행전 9장 32~43절)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요? “애니아가 벌떡, 다비다가 벌떡”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벌떡 일어나 본 적이 있나요? 아침에 알람을 듣고 벌떡 일어나 보셨을 것이고, 아니면 갑자기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자다가 벌떡 일어나 보셨나요? 유머입니다. 어떤 환자가요? 의사에게 ‘선생님, 저 아직 살 수 있나요?’라고 물었더니 의사가요? ‘물론입니다. 다만 카드로 결제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답니다. 지금의 현실을 비꼬는 유머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애니아와 다비다는 예수님의 이름, 그 한마디에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바울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최선을 다해 감당하는 한 사람,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잔멸하며 복음을 대적하던 사울이 주님의 은혜로 회심하고, 복음의 일꾼이 되기 시작할 때쯤의 이야기이고,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수가 더 많아지는 부흥이 일어나던 그때, 다른 한편에서 아름답게 펼쳐진 베드로의 사역, 심방을 통해 일어난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32절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사방을 두루 다닌 것은 그가 심방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중 한 곳이 바로 ‘룻다’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의 중심부, 그러니까 사론 평야 남쪽에 있는 도로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약 40km 정도이고, 욥바 근처 도시로 당시에는 디오스 폴리스, 그러니까 ‘신들의 도시’라고 불렸던 다문화 도시, 지금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국제공항이 있습니다. 이곳에 교회가 자연스럽게 세워졌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룻다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없는데 믿는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행 8장 40절을 보면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그러니까 빌립이 ‘가이사랴’에서 정착하기까지 아소도에 나타났는데, 이 아소도는 지중해 연안, 지금의 가자지구와 욥바, 현재의 야포 사이에 있는 도시로 오늘날 이스라엘 남부 해안 도시로 구약에 등장하는 블레셋의 5대 주요 도시 중 하나입니다. 사무엘상 5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언약궤를 빼앗아 아스돗의 다곤 신전에 두었을 때, 다곤 우상이 쓰러지고, 아스돗 사람들에게 종기가 생겼다는 그곳입니다.

 

 

이곳에 나타나 남쪽 광야 길로부터 해안을 따라 중부지역인 이 ‘가이사랴’까지 가면서 복음을 전했고, 가는 도중에 룻다와 욥바에서도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 제자들이 생겨 자연스럽게 교회가 생긴 것으로 봅니다.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순회하다가 룻다라는 성읍에 갔을 때 애니아를 만납니다. 그는 중풍 병자였습니다. 무려 8년 동안 침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33절입니다.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는 중풍 병으로 침상 위에 누운 지 여덟 해라” 여러분, “중풍 병자”는 당시에는 치료 방법이 거의 없는 병입니다. 뇌졸중이나 신경질환으로 인한 전신 마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8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다”라는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수년간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가족이나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상태였을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소외되고, 경제적으로는 의존적이고, 영적으로도 희망을 잃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에는 운동을 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시 일어나야지.” “조금만 움직이면 나을 거야.” 주변 사람들도 약을 써보고, 민간요법이나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 2년, 그리고 8년이 되자, “이제 일어날 수 없다”라는 마음에 갇혀 버렸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8년이라는 기간은 이제 죽음을 준비하는 긴 기간으로 가는 것입니다. 안 그렇겠어요? 나아질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심방을 받아요? 애니아를 본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34~35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어떻게 되었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는 이 한마디에, 즉시 일어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곧장 일어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오니라” 애니아에 임한 주님의 치유로 룻다 도시와 사론 평야 지역 모든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치유의 주체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몸이 낫는 사건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는 시작이 되었고, 과거의 무기력과 절망을 뒤로하고, 다시 삶의 책임을 지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이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를 찬양하여라. 할렐루야, 자유케 하셨도다. 죄의 저주 끊으신 주께 구원 있도다. 주 예수, 나의 산 소망] 개인의 치유가 공동체의 부흥으로 이어졌고, 단지 한 사람의 기적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의 이름은 지금도 치유와 회복의 능력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니” 행 3장 6절 말씀은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중풍 병자 애니아도 예수의 이름으로 벌떡 일어났던 것처럼, 지금도 이 일은 역사됩니다. 예수의 이름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적 능력입니다. 우리의 병든 몸과 상처 입은 마음, 무너진 관계, 깨어진 공동체를 치유하고 회복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될 때,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침상’, 나의 인생의 ‘침상’은 무엇일까요? 무기력입니까? 절망입니까? 반복된 실패입니까? 병입니까? 오늘 주님이 여러분에게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곧바로 순종하여 일어나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포합니다. 중풍에 걸린 후, 스스로 자기 자리를 펴본 적이 없었고, 거동할 수조차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해서만 살 수 있었으며, 깔고 누운 자리도 다른 사람들이 펴준 자리, 무너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네가 아니라, 내가 너를 일으킨다.” 주님의 은총으로 삶의 정돈이 가능해진 애니아처럼 우리도 여러분도, 자기 자리를 스스로 펼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두 번째 심방 소식은 아름다운 삶을 살았던 다비다입니다. 36절입니다.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욥바는 룻다로부터 조금 올라가면 있는 도시이고, 지금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입니다. 여기에 다비다라는 여자 제자가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헬라식 이름은 ‘도르가’라고 소개합니다. 헬라파 유대인입니다. 선행과 구제 사업을 많이 한 여인입니다. 즉 아름다운 삶을 살던 여인이었고 귀한 인격을 갖춘 여인인 그녀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으면 바로 장사를 지내야 하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37~38절입니다. “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누이니라.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와 달라고 간청하여”

 

 

삼성 냉동고가 있었겠어요? 이곳은 무척 더운 지역인데 말입니다. 무엇이에요? 시체를 집안에 둘 수가 없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례적인 선택을 하였어요. 곧바로 장례를 치르지 않았고, 시신을 집안 다락방에 안치했습니다. 왜? 일까요? 특별한 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특별한 기대가 바로 ‘믿음의 기대’입니다. 이것은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사도들의 능력을 들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룻다에서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친 일을 들었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왜냐하면? 애니아를 고친 이것이 소문으로 퍼졌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혹시 베드로를 불러오면 하나님께서 다비다를 다시 살려주실 수 있지 않을까?”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이고, 그래서 ‘절박한 간청’을 합니다. 38절에, “룻다가 욥바에서 가까움으로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 간청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잖아요? “빨리 와 달라”라는 요청이고, 기적을 기대하는 신앙적 간절함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사랑과 소망’이 가득했습니다.

 

 

이미 36절에 보았듯이 그녀는 선행과 구제로 많은 사람을 돕던 여인이었습니다. 공동체가 그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죠? 하나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함께 간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지체하지 말고 와 달라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욥바로 갔죠? 도착하니까 과부들이 그녀가 지어준 옷을 보이면서 베드로에게 다가와 서서 웁니다. 39절을 볼까요?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이르매 그들이 데리고 다락방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보이거늘” 이것은 단순한 애도의 장면이 아니에요? 그녀의 삶과 신앙이 남긴 열매입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증언하고 있는 것이에요? 그녀가 남긴 선행의 흔적이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사랑으로 섬긴 이 흔적이 눈물과 감사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흔적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40~41절,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가 살아난 것을 보이니” 가버나움의 회당장인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집에서 통곡하는 무리들을 다 내보내시고, 오직 부모와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들어가셨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도르가가 누워 있는 다락방에서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홀로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베드로도 기도한 후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던 것처럼 베드로도 다비다의 손을 잡아 일으키죠?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입니다. 그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와 부활의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누구보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갈릴리 어부였고, 주님을 세 번 부인했던 연약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예수의 이름으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권세와 부활의 능력이 실제로 역사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요 14장 13절,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예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막 16:17~18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저는 이 약속은 단순히 초대 교회만이 아니라,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는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행 1장 1절에 “예수께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해 나가신다”라는 선언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예수님은 승천으로 일을 마치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성령을 통해 제자들과 교회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가 다비다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이고, 교회가 병자를 위해 기도할 때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고, 복음을 전할 때 영혼이 살아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가 지금도 실제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이름”은요? 지금도 죽은 자를 살리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고, 무너진 영혼을 일으키는 능력입니다. 다비다의 손을 잡아 일으킨 것은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부활 생명이 전해지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42절입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 온 욥바의 사람들이 듣고 주님을 믿게 되었다, 주님께 돌아왔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 있나요? 다락방에 누워 있는 다비다의 시신은 더 이상 손쓸 수 없는 상태이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끝도요? 하나님의 시작이고, 여전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락방’ 같은 절망의 자리가 있잖아요? 거기가 하나님의 새 역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무대가 될 것입니다. 소망의 다락방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락방에 시신을 두며 울고 있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를 부흥의 현장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요? 치유와 회복, 생명의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절망의 자리에서 믿음을 붙잡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을 소망의 자리로 바꾸실 것을 믿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43절, 8년 된 중풍 병자가 일어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난 엄청난 기적으로 인하여 욥바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고 감격했을 그 시간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여러 날 동안 욥바에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 머문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43절,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무두장이의 집에서 머무니라” 무두장이는 가죽 제조 기술자입니다. 최하층 천민이고, 인간으로 보지 않는 직업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에서 죽은 짐승은 부정하고, 죽은 짐승을 만진 직업이니까 당연히 부정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 자와 여러 날을 머물렀다는 것은요? 이미 베드로도 부정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각오하고 주저 없이 무두장이 시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이유가 시몬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천하디천하고, 멸시받고 버림받은 불쌍한 이와 친구가 되어 주려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에 실천하려고, 예수님을 전하려고 갔습니다. 이 계기로 그는 하늘의 보자기를 만나죠? 우리가 다음 주에 나눌 이야기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 주님은요? 여러분과 반드시 함께하십니다. 베드로가 보인 오늘 본문의 역사는 베드로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의 안에 있는 주님의 능력이고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그래서 ‘애니아가 벌떡, 다비다가 벌떡’ 하듯이, 여러분도 예수 이름으로 벌떡 일어나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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