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31(금) 생명의 삶 말씀
모든 민족의 예배가 회복되는 날
(슥 14:16~21)
오늘은 스가랴서 마지막 부분을 나눕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모든 민족의 예배가 회복되는 날”입니다. 우리는 종종 “예배가 무너졌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예배가 중요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스가랴 14장은요? 마지막 시대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열방을 심판하시고, 마침내 모든 민족이 남아서, 예루살렘에 올라와 ‘왕 되신 여호와께 경배한다’라고 말합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하나님이 예배를 회복하시는데, 그 예배는 더 이상 “나의 민족만”, “나의 교회만”, “나의 언어만”, “나의 취향만”이 아닌 온 땅의 예배, 민족을 가르지 않는 예배,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자기만족을 더 사랑한 예배가 아닌 “마지막에 남는 참된 예배자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아시다시피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들은 성전은 다시 지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너져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재건했지만, 속으로는 냉소, “우리가 다시 영광을 볼 수는 있을까? 옛날 다윗과 솔로몬 때의 그 영광이 다시 올까?”가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 마지막 날의 그림을 보여주셨고, 그 그림의 핵심은 전쟁 장면도, 심판 자체도 아닌 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와서 경배드리는 장면입니다. 무엇이냐? 역사의 끝은 예배라고, 하나님은 역사를 예배로 마무리하신 것입니다. 특히 16절에 보면 “남은 자들”이 올라와 절한다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이 “남은 자들”이 누구냐? 전쟁과 심판 이후에도 남아 있는 모든 민족 가운데 “남은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이 올라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중 일부”가 아니라 “이방 민족들 중 남은 자들”이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열방에게 열려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 11장에 나오죠? 이것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회개의 마음을 주셨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부터 열방을 향해 마음을 열어 두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이 남은 자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세상이 무너질 때 도망친 자가 아니라, 무너지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무릎 꿇은 자, “내 인생 주인은 나 아닙니다”라고 실제로 고백하는 자들이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예배의 본질은요? 감동이 아니라 ‘왕 앞에 무릎’입니다. 감성의 분출이 아니라, 주권을 인정하는 복종입니다. ‘내가 은혜 좀 느끼는 시간’이 아니라 “왕좌는 제 가슴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고 항복하는 시간이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그러면서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왜 초막절일까? 여러분, 초막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장막, 즉 텐트를 치고 살던 시절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의 핵심은 “우리는 우리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다.”입니다. 무엇이냐? 하나님이 듣고자 하신 고백입니다. 마지막 날, 모든 민족에게 원하시는 고백은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문명으로 여기 온 게 아닙니다. 전쟁에서 이겨서 살아남은 게 아닙니다. 주님이 먹이셨고, 지키셨고, 구원하셨습니다.” 이 고백입니다. “하나님 의존 고백 예배”, “나는 스스로 여기 선 존재가 아니다.” 이 고백, 이 새벽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우리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아멘. 내가 능력이 있어서 여기 선 게 아니라는 것, 솔직히 말하면 무너지지 않은 게 기적이잖아요? 살아 있는 게 기적이고, 믿음 버리지 않은 게 기적이고, 그걸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7~19절을 보니까, 예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마름, 즉 가뭄입니다.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요약하면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재앙이 내리리라”입니다. 그리고 “올라와 경배하라”라고 부르시는데, “안 간다”라고 고집하면 비가 끊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공급이 끊긴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거부하면 생명이 마른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를 빠지면 벌 받는다”가 아니고, “너 예배 안 왔지? 혼나!” 이런 분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그 마음 자체가 이미 ‘메말라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과이고 억지 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심령은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우상을 먹고 살잖아요? 솔직히 그 우상이 물을 주지 못하잖아요? 그런데 거기에 집착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예배하게 지음을 받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자기 자신을 예배하고, 그러면 결국 스스로 말려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우리는 예배의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다른 것을 예배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다른 것들이 우리에게 비를 주지 못해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단호하신 말씀이 무엇이에요? “나에게 돌아오라. 내가 비다. 내가 생명이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선언을 하시죠? 20절입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호와께 성결’, 즉 여호와께 구별됨이라는 이 말은요? 대제사장 이마의 금패에 있던 말입니다. 출 28장 36절에 나오는데, 들어보세요?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이 말씀입니다.
이 “패(금패)”를 누구에게 단다? 대제사장의 이마에, 왜냐? 아론과 그의 후손인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해 서는 사람이기에 그래서 그의 이마에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선언이 항상 붙어 있어야 했습니다. 즉 “이 사람은 아무나 아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이다.” “이 예배와 제사는 장난이 아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동시에, “이 백성은 죄가 많지만, 하나님께서 이 제사를 받으시고 그들을 거룩하다, 선언하신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0절에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말들의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원래는 오직 대제사장 이마에만 적혀 있던 “여호와께 성결”이, 마지막에는 전쟁 마차의 말방울, 부엌 냄비, 일상의 물건들까지 번진다는 것, 즉 거룩이요? 성전 안에만 있지 않고, 삶 전체에 깔린다는 선언입니다. 거룩함은 제사장들만의 것에서 마지막에는 모든 백성, 모든 장소, 모든 것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 찍힌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모든 민족의 예배가 회복되는 날”의 그림입니다.
예배는 더 이상 성직자만의 특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21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이 끝납니다. “그날에는 부엌 냄비도 성전 그릇처럼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다.” 주방도 예배 장소가 되고, 식탁도 예배 재단이 되고, 차 운전하는 그 차 안도 예배 공간이 되고, 직장에서 컴퓨터를 켜고 작업하는 그 자리에도 ‘여호와께 성결’이 새겨진다는 것, 예배가 예배 시간만을 위한 ‘종교 활동’이 아니고, 예배가 삶 전체의 공기와 문화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 회복은 열방이 함께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나만 은혜받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주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는 교회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왕이 바뀌는 사건’, 예수님이 왕이시고, 나는 백성이 되는 것, 나의 계획도, 나의 통제권도, 나의 자존심도 주님께 드리는 순간이 경배입니다. 그 순간부터 나의 우상에게 비를 구걸하지 않아도 되는, 왜냐하면, 생명은 왕에게서 오기에 그렇습니다.
이제 마무리합니다. 주님은 “그날이 오늘 시작되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의 그림입니다. 모든 민족이 올라와 “왕 되신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예배하지 않던 민족들도, 하나님과 상관없던 자들도, 마침내 무릎을 꿇고 그 예배는 성전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덮는데, 부엌까지, 말방울까지, 그래서 질문은 “나는 예배자인가, 아니면 구경꾼인가? 나는 예배를 받으시는 왕께 순종하는가, 아니면 예배의 형식으로 나를 위로하고 돌아가는가? 내 삶 전체, 집, 직장, 돈, 말투, 인간관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써도 부끄럽지 않은가?”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날”은 단지 먼 종말의 그림만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이방인에게 성령을 부으시며, “모든 민족의 예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시작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임재는 교회를 살리고, 교회는 도시를 살리며, 도시는 결국 열방을 부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