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영광은 OUT 하나님의 말씀은 SHINE BRIGHTLY
(행 12:18~25)
우리는 종종 ‘빛나야 한다’라고 하지만, 정작 어떤 빛이 비쳐야 할지는 잊고 삽니다. C. S. 루이스는 그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라, 참된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반사하는 존재이다.’라고요. 루이스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내가 얼마나 빛나는가’가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어떤 빛이 드러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사건입니다. “사랑의 영광은 OUT, 하나님의 말씀은 SHINE BRIGHTLY” 사람의 영광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만이 남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오늘 본문은 다음 주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기적적으로 옥에서 풀려난 후 그 소동과 군인들의 공포, 그리고 헤롯 아그리파 1세의 연설과 백성들의 환호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로 벌을 받음과 하나님의 말씀이 흥황됨과 예루살렘에서 사역을 마치고 돌아가는 바나바와 사울입니다. 이것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옥문이 열려 당황하는 권세입니다. 여기 권세라 하면, 헤롯과 군인들, 그리고 유대교 지도자들이겠죠? 18~19절을 볼까요? “날이 새매 군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 않게 소동하니,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머무니라”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옥에서 꺼내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병사들과 헤롯이요? 큰 당혹감에 빠졌어요? 한마디로 빛이 어둠 속에서 터지는 순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권세가 흔들렸고,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지켰던 파수꾼들을 심문하고 죽이라고 하였기에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가두는 감옥은 있어도 하나님의 계획을 가두는 감옥은 없는 결과죠?.
그런데 두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20~23절,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니 그들의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먹는 까닭에 한마음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자, 이 말씀의 상황이 이렇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오늘날 레바논 해안에 있었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들입니다. 바다 무역과 상공업이 매우 발달한 도시죠? 그런데 곡식을 많이 생산할 만큼 넓은 땅이 없어요? 그래서 곡식을 수입해야 했습니다. 그 중요한 공급처가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영토, 즉 유대, 갈릴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갈릴리 북쪽에 바로 두로와 시돈이 있기에, 즉 쉽게 말하면요? 헤롯이 이들의 생명을 쥐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의 큰 기근이 온다고 예언한 그대로 큰 기근이 일어나 곡식을 주는 쪽이 더 갑이 되어 버렸습니다. 헤롯은 종종 식량 수출을 막는 식으로 그들을 압박했어요? 유대 땅에서 오는 곡물에 의존하기에 헤롯을 건들면 안 되었기에 헤롯의 시종인 블라스도를 매수하여 중재자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설득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가 이것을 굳이 넣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먹고 사는 문제”를 설명하려고요? 아닙니다. 누가는요? 두 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개 중 하나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권력자, 즉 헤롯에게 로비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철문도 기도의 앞을 막지 못한, 즉 베드로가 풀려나는 내용을 우리가 지난주에 나눴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자신들의 밥줄 문제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인 헤롯의 환심을 사려고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통해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 두 개를 비교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무엇 때문에? 두로와 시돈의 생계, 경제, 정치가 겉으로는 헤롯에게 달린 것처럼 보여 머리를 숙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겨야 함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결론 맺고 있습니다. 즉 헤롯의 곡식과 권력은 사라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밥줄’을 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 일이 ‘이날’에 일어났죠? ‘이날’은 평범한 어느 날이 아닌, 일부러 잡은 쇼하는 날이자 하나님이 심판의 날로 삼으신 날입니다. 그리고 이날이 두로와 시돈 대표단이 와서 식량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평화를 요청하는 날”입니다.
‘이날’의 장소가 유대인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가이사랴’, 그리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생일을 기념하는 큰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때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서 백성에게 연설하였다고 전하죠? 이 왕복이 어떤 옷이냐? 은으로 만든 옷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옷에 아침 햇빛이 비추어집니다. 엄청나게 ‘SHINE BRIGHTLY’ 하지 않겠어요? 광채가 났습니다. 그 상황에서 헤롯이 연설을 합니다. 그 연설을 사람들이 아부합니다. “신의 음성이지 사람의 음성이 아니다!”, 그때 헤롯이 복통으로 쓰러졌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며칠 뒤 죽어요. 두로와 시돈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헤롯 앞에 나와 ‘밥줄’ 문제를 해결 받으려고 아부하던 날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고 맙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 헤롯 아그립바 1세, 헤롯 대왕의 손자이자, 마카비 왕조의 공주인, 마리암네 1세를 할머니로 둔 자가 바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그의 누나가 그 유명한 세례요한을 죽게 만든 장본인, 헤로디아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 누가복음 3장에 나오는 “디베료”와 친분을 맺고, 로마의 3대 황제가 될 가이우스, 칼리굴라가 땅을 줌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한 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엄청난 사치벽과 주벽이 있었기에 그렇습니다. 나중에는 황제 가이우스도 정신 이상으로 폭정을 하니까 근위대 장교들에 의해 죽고 말죠? 이 아그립바 1세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가 되었는데,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서 통치할 때는 아주 경건한 사람처럼, 엄격한 바리새파의 규례를 지키는 척했고, 가이우스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금 사슬을 성전 헌금으로 바쳐서 유대인들의 환심을 산 자가 바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바리새파를 비롯한 유대 정통파와 손을 잡고 그들의 비위를 최대한 거스르지 않은 그가 유대 정통파의 편에 서서 너무나 빠른 성장을 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매우 불편하였던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1차로 야고보를 칼로 죽였고, 그 여세를 몰아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과도 같은 베드로를 옥에 가두어 유대인들을 기쁘게 했던 것이죠. 그런 그가 가이사랴 축제에서 은빛 옷을 입고 연설하자 군중이 “신의 소리”라고 아부, 즉 추켜세움의 이 영광을 거절하지 않은 직후에 극심한 복통으로 쓰러져 다섯 날을 앓다가 죽었다는 것입니다.
헤롯이 백성의 신격화 고백을 시정하지 않고 자기 영광을 신적 영광과 혼동한 이것을 누가는 “주의 사자가 그를 쳤다”라고 원인과 결과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았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리고 “벌레에게 먹혀”의 뜻은 문자 그대로 “벌레, 기생충에게 먹힌 상태”입니다. 누가는 의학적 세부보다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합니다. 무엇이에요? 우리가 사역의 열매, 우리가 맡은 직분, 우리가 이루어 낸 성과에 대한 칭찬을 받을 때, 그 영광을 “내 것”으로 삼는 순간 이미 위험지대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헤롯의 옷자락이 빛나던 그날, 진짜 빛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 빛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더하여 가더라”입니다. 비록 권세 자가 죽고 혼란이 일어났어도 복음은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요?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사람의 영광, 즉 인간의 영광, 권세의 영광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밝게 빛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사역의 마침과 시작, 그 빛은 지금도 꺼지지 않는 빛이고 계속 진행형이라는 말씀입니다. 25절,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종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운동의 다음 단계, 즉 헤롯의 죽음이 권세의 끝이라면, 복음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끝난 사역이 아니라는 것이고, 지속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권세는 끝나도 말씀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빛나는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보로 아는 삶이 아니라, 말씀을 ‘기준’과 ‘에너지’로 붙잡고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붙잡는다”라는 것은 그냥 “안다”와 달아요? ‘안다’라는 것은 머리로 “아, 그 말이 맞지” 하고 동의하는 정도지만, ‘붙잡는다’라는 것은, 내 감정, 상황, 사람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지막 기준’으로 삼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요, 상황은 “포기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고전 15장 58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낙심하지 말라,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 포기 대신 다시 일어나는 선택을 하게 하죠? 이것이 바로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붙잡을 때 ‘빛난다’라는 건 무슨 뜻일까요? 성경에서 빛나는 삶은요? 세상 기준으로 “성공해서 번쩍번쩍”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는 삶을 말하고, 죄와 절망 속에서 꺾이지 않는 삶을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길을 보여주는 삶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내 안에서 길이 보이고, 마음이 꺾이지 않고, 관계와 선택이 정직하게 빛나기 때문에, 그 사람 전체가 “빛나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붙잡는 삶’은 해석의 기준을 말씀에 둡니다. 일이 잘 안될 때, “나는 버림받았다”가 아니라 롬 8장 28절 말씀,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라는 이 말씀을 붙잡고 상황을 다시 해석합니다.
선택의 기준도요? 하나님의 말씀에 둡니다. 우리가 살면서 이익과 정직이라는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다들 이렇게 사는데…”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를 먼저 묻고,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말씀 편에 서는 선택을 합니다. 이때 그 사람의 인생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빛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위로와 힘의 근원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요?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평가 속에서 안정이 생긴다는 것이에요. 그 안정감이 얼굴과 말, 태도에서 빛처럼 새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상황, 감정, 사람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인생의 최종 기준, 최종 위로, 최종 소망으로 붙잡고 그렇게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사람의 영광은 OUT이 되고요, 하나님의 말씀은 SHINE BRIGHTLY가 되고요, 그 말씀에 붙들린 우리의 삶도 조용히 함께 빛나게 되는 겁니다. 빛은 자신을 자랑하지 않아요? 어둠을 몰아냅니다. 헤롯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군중의 환호를 즐겼습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결국 죽었습니다. 반면 교회는 권세의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성장했습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사역이 끝났다고 그만두면, 말씀이 멈춥니다. 오늘 본문은 그토록 죽이려 하던 교회는 죽지 않았고, 오히려 살아 있는 복음을 전파하면서 흥왕하는 역사를 체험하였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교회를 죽이려던 헤롯은 죽고, 헤롯이 죽이려던 교회는 부흥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인생, 아니 내 인생의 최종 기준, 최종 위로, 최종 소망으로 붙잡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라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성장하고, 그 안에서 사람의 영광은 OUT,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SHINE BRIGHTLY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한 자는 기도할 때도 빌 4장 6~7절 말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것을 믿습니다. 거창한 업적, 상황과 감정과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내 인생의 최종 기준, 최종 위로, 최종 소망으로 붙잡는 데서 시작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시는 대로 한 걸음씩 순종하며 걸어가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