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그 구하시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역대상 4:9–10
여러분, 역대상은요? 지루할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족보이며, 그리고 비슷한 이름들, 사건도 설명도 없이 나열되는 세대들 등등이 펼쳐지는 성경이라 사실 설교자들이 꺼리는 성경이 역대상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역대상 4장에 들어가면서 그 족보의 한복판에서 난데없이 아니 갑자기 멈춰 서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이름과 단 두 절의 이야기, 이 한 사람의 이름은 야베스, 그의 이 짧은 기도의 끝에 놀라운 결론을 붙여지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2026년 표어입니다. 오늘 그의 이 짧은 기도의 끝에 놀라운 결론을 왜? 붙여졌는지, 왜 많은 이름 중에 이 사람의 기도만 기록되었는지를 오늘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역대상은요? ‘무너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습니다. 이 의미는, 겉으로 실패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안에서 이미 무너진 상태의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죄를 많이 지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느끼는 사람들, 기도하지 않아도 일상이 잘 굴러가고, 말씀이 없어도, 결정이 가능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마음이 크게 불편하지 않은 상태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분들의 대부분은요? 성과로 자신을 지탱하고 있죠? 흔히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직함이 있고요? 결과가 있고요? 인정도 받고요? 그러나 내면에서는 “이게 무너지면 나는 끝이다.”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생이 은혜가 아니라 구조물 위에 서 있는 상태, 그래서 늘 불안하고요? 겉은 견고해 보이지만, 기초는 이미 금이 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비교에 지쳐있죠? 항상 남들과 자신을 나란히 놓고 살아갑니다. 앞서면 잠깐 안심하고, 뒤처지면 존재가 흔들리고, 그러니 쉼이 없어요? 또한 상처를 처리하지 못한 채 버티고 있습니다. 꼭 울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울지 않으려고 더 강해진 모습, 아픔을 말하지 않고 덮어 두며 “괜찮다”라는 말을 습관처럼 쓰지만, 이미 무너졌는데도 계속 서 있으려 애씁니다.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에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 지친 인생을 향해 먼저 다가오신 음성 아닙니까? “견뎌라”가 아니라 “오라”고, 그것도 문제를 해결하고 오라가 아니라, 문제 그대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조건 없는 초대이고, 신앙의 성취가 아니라 피곤함의 자체가 자격입니다. 무엇이에요? 주님은 우리의 짐을 가볍게 만들기 전에 당신의 어깨로 옮기길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역대상은 언제 기록되었나? 평안한 다윗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 그러니까 나라는 무너졌고, 성전도 불탔고, 백성들은 정체성을 잃어버린 그 시기에 쓰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신 것인가?” 그 질문 앞에 하나님은요? 이 족보라는 방식으로 응답하셨고, 그것이 바로 역대상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너희의 이름은 여전히 내 역사 속에 있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역대상은요? 성공한 사람들의 연대기가 아니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정체성 회복의 책’입니다. 왜냐하면,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가,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너희는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다.” “무너졌어도, 끝난 것이 아니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계보로, 즉 족보로 시작하고 있어요? “너희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다”라는 선언입니다. 이 사실을 근거로 역대상을 봐야 합니다. 실패한 왕, 흔들린 지도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지워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다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뜬금없이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왜? 포로 이후 백성들의 초상이었거든요. 이름이 야베스, 뜻이 ‘고통’입니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죠? 그러나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이 그가 구한 것을 허락하셨더라.”가 되었다는 결론이고, 개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무너진 공동체를 향한 복음 선언입니다. “애들아~ 다시 강해져라”가 아니라 “너희가 무너졌어도, 내가 너희를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무엇으로 족보로 말입니다. 여러분, 족보는요? 보통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의 아들이고…”라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예를 들어 4장 1~2절을 보세요? “유다의 아들들은 베레스와 헤스론과 갈미와 훌과 소발이라. 소발의 아들 르아야는 야핫을 낳고 야핫은 아후매와 라핫을 낳았으니 이는 소라 사람의 종족이며” 이것이 정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장이 바뀌어요? 9절입니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존귀한 자라…” 족보는 설명하지 않음이 정상인데, 하나님은 여기서 설명까지 하셨습니다. 그것도 의도적으로, 족보의 형식을 중단까지 하시면서 말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무릎 꿇음을 확대하신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혈통보다 기도를 주목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일부러 말입니다. 독자의 시선을 멈추게 하시면서, “이름만 세지 말고, 이 사람을 볼래?”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야베스는 결국 ‘포로 이후 공동체의 얼굴’이거든요. 왕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니고, 군사 영웅도 아니고, 이름부터 ‘고통’인 포로 이후 이스라엘의 집단 정체성, ‘우리는 패배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부서졌다’ 이것이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야베스의 기도는 바로 “너희 이야기다.”라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아니 인생의 출발선이 아픔이었습니다. 즉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하여 이름을 야베스라 하였더라.”라고 한 자입니다.
이름이 그 사람의 인생을 설명하는 낙인이 되잖아요? 그의 어머니가 야베스라고 이름을 지었으니까, 평생 “고통아.” “수고의 결과야.”라고 불렸을 것이에요. 무엇이에요? 환경, 가정, 이름, 출발선에서 이미 불리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한하죠? 히브리 사회에서 이름을 짓는 권한은요? 보통 아버지에게 있는데, 본문은 의도적으로 “그의 어머니가 이름을 지었다.”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아마 출산의 고통이 극심했을 가능성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의 탄생이 기쁨보다는 고통이 먼저 기억된 출산이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을 그대로 이름에 새겨 넣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하여 성경은 침묵하죠? 어쩌면 아버지가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있어서 가정이 불안정했을 것이고, 혹은 어머니가 홀로 감당해야 했던 출산과 양육, 그래서 이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이 아이는 내 고통의 흔적이다”라고 태어날 때부터 ‘상처’를 안고 출발한 인생이지만,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최종 판결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어머니의 고통을 자기 인생의 저주로 고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생의 배경은 상처였지만, 인생의 방향은 기도로 바꾸었습니다. “내 이름이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께 묻겠다.”라고 나갔고, 출발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기도의 자리로 나갔습니다. 여러분, 이것은요?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출발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어디로 나아갔는가입니다. 야베스는 상처의 자리에서 주저앉지 않았고, 운명처럼 주어진 이름을 붙들지 않았고, 기도의 자리로 걸어 나갔습니다. 사람은 과거로 불릴 수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은 미래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출발이 아프다 하더라도, 이름에 상처가 묻어 있어도, 기도로 나아가는 순간부터 인생은 다시 쓰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우리가 누구에게 나아오는지를 보십니다.
그러면 야베스가 기도하였던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 첫째가 “복에 복을 더하사”입니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복 안에 머물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하나님의 복 아래 살기를 구한 것이고, “하나님의 복의 영역 안에 나를 계속 두어 달라”라는 기도,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원하는 기도이었습니다. 즉 “하나님, 고통의 이름으로 규정된 내 인생을 당신의 손안에 다시 위치시켜 주세요” 이것은 복의 주인을 분명히 아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는 자기 능력으로 인생을 확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매달립니다. 그는요?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워달라고 하지 않았고 과거를 없애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이 인생을 하나님, 당신의 복의 질서 안에 두십시오.”라고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간절히 요청하는 기도였고, 과거의 정의를 넘어 하나님의 가능성에 자신을 맡긴 기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살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두 번째 기도는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입니다. 이 기도는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삶의 범위를 말해요? 즉 하나님 없는 확장은 재앙이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제한은 은혜이기에 이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의 범위,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질서 안에서 허락하신 자리,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넓혀달라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은혜 없이 커지면요? 파괴가 되어 버리고, 은혜 안에서 커지면 사명이 되기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역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가겠다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자기 과거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가능성 안으로 걸어 들어가겠다고, 안전한 익숙함을 떠나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자리로 가겠다고, “하나님, 제 삶을 더 크게 쓰셔도 제가 당신을 놓치지 않도록 저를 준비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세 번째 기도는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입니다. 여러분, 이 기도의 핵심은요? 확장보다 동행입니다. 우리는 종종 이렇게 기도하잖아요? “주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그러나 야베스의 세 번째 기도는, “주님, 이 문제 속에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들게 하소서.” 이것입니다. 단순한 도움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말하고 있고,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사를 말합니다. “이 인생을 내가 통제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주의 손을 구합니까? 그 순간, 우리의 손, 인간의 손은요? 내려놓아집니다. “하나님, 이 인생을 제 능력으로 설명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손으로만 유지되게 하옵소서.”라고 구하게 되고, 주의 손을 구하는 순간이 되면, 인생의 주인은 다시 하나님이 됩니다.
그의 네 번째 기도는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이었습니다. 야베스는, 고난이 없는 삶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에 삼켜지지 않는 삶을 구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요? 근심이 없는 삶이 아니라, 근심이 지배하지 않는 삶을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인생을 달라”라는 요청이 아니었어요? “고난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해 달라.” 즉, 환난은 올 수 있으나 근심이 정체성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고난 아래서, 인생이 망가지지 않기를 원하는 기도, 문제가 나를 규정하지 못하는 삶을 구하는 기도, 끝까지 믿음을 지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즉 “하나님, 이 인생에 고난이 올 때 그 고난이 나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하옵소서.” 고난의 제거가 아니라 고난의 지배로부터의 해방 실패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삶을 구하는 기도, 이것이 야베스가 구한 기도 내용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오늘도 이 기도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역대상 4장의 족보처럼, 2026년이 아무 설명 없이 계속 흘러가기를 원하지 않아요? 이름이 이어지고, 이름이 지나가고, 역사는 그렇게 멈추지 않고 흘러가지만, 오늘 나눈 말씀의 핵심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은 그 흐름 한가운데서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야베스의 이름 앞에, 그의 기도 앞에, 발걸음을 멈추셨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는 잘난 사람이 아니잖아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도 아니었잖아요? 이름마저 ‘고통’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를 했어요? 무엇이에요? 기도,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이 인생을 제 이름대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주의 손 아래서 사는 자신이 되게 하옵소서.” 그 순간, 어떻게 되었습니까? 족보는 더 이상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기도가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안 그래요?
오늘도 우리의 인생 족보는 흘러가고 있어요? 2025년의 실패와 상처, 지워지지 않는 이름과 기억, 이미 정해진 것처럼, 2026년에도 어쩌면 보이는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가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인생 한가운데서 멈추어 서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는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니?” 이것 아세요? 우리 하나님은요? 성과를 묻지 않으세요? 직함도 묻지 않으세요? 얼마나 잘 버텼는지도 묻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 “너는 나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함께 거하기를 원합니다. 요 15장 5절 말씀대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것을 원하고 계시고, 주님 안에 거함으로 드리는 이 기도를 기다리십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요? 기도하는 자의 이름을 바꾸실 것이고, 고통에서 은혜의 고백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인생의 지경을 다시 쓰실 것입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응답받은 결론을 우리 삶에 기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