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내비게이션, 갑자기 경로를 변경하다
(행 16:1~10)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떠날 때요? 대부분 내비게이션을 켜고 출발합니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안내 음성이 들립니다. “전방에 급커브길이 있습니다. 천천히 운전하세요.” “50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십시오.” “앞에 정체 구간이 있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가 변경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안내를 거의 의심하지 않고 따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내비게이션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길의 상황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에 있는 정체, 공사, 사고, 막힌 길을 미리 알고 경로를 바꿔주죠? 그래서 그대로 따라갑니다. 오늘 본문이요? 바로 이런 장면을 보여줍니다. 선교하려고 떠나는데, 복음을 전하려고 길을 떠났는데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하나님이 그 길을 막으셨어요? 마치 내비게이션에서 이런 안내가 나오는 것과 같은 “앞에 길이 막혀 있습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경로가 변경되었습니다.”가 되었습니다. 그 다른 길이 바로 마게도냐이었습니다. 이 성령의 내비게이션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열어 가는지를,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이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요? 1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전했던 성들을 다시 방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장면 중 가장 큰 아픔은, 바울과 바나바의 헤어짐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복음을 위해 서로 다른 길로 가는 선택이었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 섬으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육로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합니다.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더베와 루스드라를 향해 간 것이죠? 우리가 알듯이 이 루스드라는 어떤 곳입니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켜 세웠던 곳이죠? 이것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부르며 경배하려 했던 곳입니다. 하지만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미워하던 유대인들이 뒤쫓아 와서, 루스드라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에게 엄청난 돌을 날리지 않았습니까? 그 돌팔매질이 얼마나 심했던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적이 일어나 바울은 다시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루스드라 성안으로 들어갔죠? 그곳에 있는 믿는 이들을 위로하고 권면한 후에, 그다음 날 1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 더베와 루스드라를 다시 찾아간 것이 바로 2차 전도 여행의 시작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루스드라는 바울에게 돌을 던졌던 사람들이 있는 곳 아닙니까? 그곳에 다시 간다? 그들의 눈에 띄면, 죽을 수도 있는 그곳으로 바울은 다시 갔습니다. 이해가 안 되죠?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가면 안 되는 곳이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다시 갔어요? 왜 갔을까요?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명의 길이었기에 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요? 항상 편안함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항상 안전한 곳이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하나님이 나를 이 길로 보내시고 있다.”라는 이 확신이 있었기에 위험이 있었지만, 부르심을 따라 그곳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는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갔습니다. 루스드라는요? 단지 바울을 공격했던 도시가 아니라 이미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있는 도시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중에는 한 청년, 디모데가 있었어요? 바울은 돌에 맞아 쓰러졌지만, 그 도시에는 이미 믿음의 씨앗이 심겨 있었기에 포기가 아니라 상처의 장소였어도 하나님에게는 사역의 장소였기에 갔습니다. 바울은 이미 행 14장 22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무슨 이야기에요? 고난은 길을 막는 장벽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을 가고 있다”라는, 길 위의 표지판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요? 자기 생명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무엇이에요? 한 영혼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요? 미움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게 하였고, 자신을 거절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가게 했으며, 돌을 던졌던 사람들에게 다시 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작되는 이야기는요?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더베를 지나 다시 루스드라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이 준비한 놀라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라.” 돌이 날아왔던 그 땅에 주님의 제자인 디모데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죠? 이 도시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 도시에 디모데라는 주님의 제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때 그의 나이가 어느 정도였을까? 기록에 의하면요? 대략 18세이었답니다. 오늘로 말하면, 고등학교 졸업반이나 대학교 1학년 정도의 나이인데, 본문은 그를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누구의 제자?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의 가정, 즉 디모데의 배경을 소개하고 있어요.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믿는 유대 여자이었다는 것이고, 아버지도 예수님을 믿는 헬라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소개하지만, 딤후 1장 5절을 보면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하노니,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요? 디모데가 주님의 제자라는 그 이유가, 그의 믿음은 이렇게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신앙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 좋은 평판까지 말합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라” 그의 삶은 공동체 안에서와 삶으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한마디로 그는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이 같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만 좋은 모습이 아니라, 혼자 있을 때도 같은 태도를 유지하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작은 일, 즉 맡겨진 작은 책임, 작은 섬김, 작은 순종에도 신실하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렸지만, 사람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였다는 이야기, 삶의 중심이요?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디모데이었다고 봅니다. 우리가 이 모습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바울과 함께하는 동역자가 되게 하죠? 3절입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그런데 바울은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할례를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미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에게 할례 강요를 하지 말라고 결정했는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왜?했을까요? 아마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앞날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길을 떠나 여러 성으로 갔다고 4절로 이어집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바울과 실라’만이 아니라, 디모데와 함께하여 예루살렘에서 정하여 준 규례를 주어 지키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5절입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하나는 내적인 부흥이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들의 믿음이 더 굳건해졌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외적인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수가 날마다 늘어갔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였습니다. 특히 소아시아 지역, 그러니까 지금의 튀르키에, 즉 터키 대부분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소아시아는 초대교회가 가장 활발하게 성장했던 지역이었거든요. 특히 사도 바울의 선교 여행의 중심 무대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도시들이, 에베소, 버가모, 서머나, 라오디게아, 골로새, 갈라디아 지역, 비시디아 안디옥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도 모두 소아시아죠?
바울이 이곳을 정하고자 한 이유가 있어요? 교통 중심지이거든요? 동서 문명이 만나는 길목이고, 헬라 문화 중심지이기에, 복음 확산에 유리하다고 여겼고, 특히 유대인 디아스포라 회당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곳에서 사역하기를 원하여 그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났죠? 그것이 바로 6~7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성령께서 그 길을 막으셨다고, 그래서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역을 지나 계속 이동하여 무시아 지역 앞에 도착하여 북쪽에 있는 비두니아, 지금의 터키의 중북부 지역으로 가려 하는데도 예수의 영이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고 ,즉 가려고 하는 곳마다 길이 막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요? 서쪽으로 계속 내려갔고, 그래서 도착한 한 도시를 이야기합니다. 8절입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바울 일행이 드로아에 도착하였다는 것, 예정된 곳이 아닌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죠? 이 드로아는 아시아 대륙의 끝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가면 바다가 나오는 트로이 목마 장소로 유명만 이 드로아에 도착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완전히 멈춘 상태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 드로아에서 밤에 환상을 보죠?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이 드로아까지 왔는데, 그 밤에 바울이 환상을 보았다고,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라는 이 환상을 보았는데, 단순한 도움 요청이 아니라 복음을 전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의 환상을 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에요? 이 트로이 목마 이야기로 알려진 바로 그 도시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 환상을 본 후 어떻게 합니까?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고 10절에 밝힙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들은 “떠나기를 힘썼다”를 하였습니다. 즉 긴박하게, 즉시 행동했고,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자기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전까지는 “그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에서, “우리가” 즉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기록한 의사인 누가도 이 시점부터 같이 참여합니다.
여러분, 당시 그리스 지역은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북쪽은 마케도니아이고, 남쪽은 아가야입니다. 마게도냐의 중심 도시는요? 데살로니가이고, 남쪽 아가야의 중심 도시는요? 고린도입니다. 이것을 계기로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로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확장되는 역사적인 전환점을 맞게 돼요? 이 시작이 바로 마게도냐를 향해 떠나는 길입니다. 복음이 어떻게 전해지고 있는지 그림이 그려지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그러면 누가는, 오늘 본문, 즉 행 16:1~10절까지의 이 말씀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이 사실들을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이 이렇게 복음의 지경을 넓혀갔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물론 바울의 선교 여정이 확장된 것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오늘 본문의 중심 메시지는요? 단순한 선교의 확장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누가는요?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 곧 성령의 주권적인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요? 전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의 분명한 계획을 볼 수 있었죠? 그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 했었고, 또 다른 지역으로도 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 무엇이었어요? ‘성령께서 막으셨고,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것입니다. 그렇죠? 그리고 결국 드로아에서 그 밤에 나타난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았고,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제시하신 새로운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복음이요? 유럽으로 건너갑니다. 여기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사람의 계획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길을 열어 주시기도 하지만, 때로 길을 막으시기도 합니다. 핵심은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은 더 크고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열심히 선교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의 길은, 인간이 계획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는 계획을 세우고 방향을 정하지만, 때로 하나님은 그 길을 바꾸십니다. 어떤 길은 막히고요? 어떤 길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열립니다. 그때 우리는 낙심하잖아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 눈으로 보면요? 성령의 내비게이션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요? “너는 너 계획을 따라 살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우리가 길이 막힐 때, “주님, 제 계획이 아니라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자리로 나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여러분, 바울의 순종이라는 한 걸음이요? 복음이 유럽으로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하였고, 데살로니가 교회가 세워지게 하였으며, 고린도 교회가 세워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요? 세대를 지나 바다를 건너갔고, 대륙을 넘어 마침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다는 이 사실입니다. 만약 그날 바울이 길이 막혔다고 낙심했고, 드로아에서 멈추어 섰다면, 복음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누가가 말하는 것은요? 이렇게 우리가 보지 못하는 길을 이미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냐를 향해 새로운 길을 발견했던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심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므로 길이 막혀도 낙심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문이 닫혀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막힘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인도하고 있음을 믿는 우리가 되고요? 바울처럼 “주님, 제가 가겠습니다.”가 되는 우리가 된다면, 우리의 이 순종의 한 걸음은요? 누군가에게는 그의 인생을 바꾸는 복음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