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나가지 않는다”
(사도행전 16장 35~40절)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조용히 나가지 않는다” 입니다. 여러분, 이 제목만 들으면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사람인데 “왜 조용히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며, 웬만하면 그냥 참아야지, 그리고 너무 강하게 반응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사람은 항상 조용히 나가지 않고, 웬만하면 그냥 참아야 하며 그리고 너무 강하게 반응한 것이 잘못된 생각일까요? 그렇게 일반화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무조건 참느냐, 무조건 말하느냐가 아니라, 복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분별하느냐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때는 믿음의 사람이 참아야 합니다. 내 자존심이 상했다고 바로 반응하지 않고, 억울해도 주님 앞에 맡기며 견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모욕을 당하실 때 잠잠하셨고, 바울도 복음을 위해 수많은 모욕을 참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말해야 합니다. 불의가 정당화되고, 복음이 왜곡되고, 성도들이 상처를 입고, 다음 세대의 길이 막히는 자리에서는 조용히 물러나는 것이 믿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빌립보에서 “우리를 로마 사람인데 재판도 없이 때리고 감옥에 넣어놓고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려 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존심 싸움이 아니에요? 억울함을 풀기 위한 감정 반응도 아닌 복음을 위한 책임 있는 담대함이었습니다. 즉 내가 강해서 생기는 용기가 아니라, 복음이 참되며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 믿음의 태도와 교회를 위한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솔직히 그동안 바울과 실라에게 있었던 일을 보면, 언제 침묵하고 언제 말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믿음의 행동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요? 우리 인생에도 억울한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도 오해받기도 하고,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도 손해 보고, 순종했는데도 칭찬은커녕 상처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하나?” “언제 침묵해야 하고, 언제 담대히 말해야 하나?”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요? 모든 상황에서 무조건 침묵하라고도 하지 않고, 반대로 모든 경우에 맞서 싸우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복음에 유익한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나누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힌 이유는요?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그죠? 그런데 그 일로 인해 여종의 주인들이, 돈벌이를 잃게 되어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습니다. 이들과 관리들이 한통속인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바울과 실라를 심하게 매질하였고 감옥, 그러니까 단순한 구금 장소가 아닌 중죄인들이 갇히는 지하 감옥에다 가두었는데, 온몸이 찢기고 피를 흘린 채 던져졌습니다. 기절한 채로 던져진 것이죠? 깨어나니 한밤중이에요? 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는요?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때 일어난 일이 무엇이었어요?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큰 지진과 감옥 문들이 열렸고, 차꼬까지 풀렸습니다. 도망가지 않았죠? 오히려 죄수들이 다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던 간수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그 간수와 그 집안이 예수 믿고 구원받죠? 결국,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이었고 이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다른 영혼을 살리시고, 위로하시고, 더 깊은 믿음으로 빚어 가셨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자유를 얻고도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이죠? 35절입니다.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의 윗급에 있는 사람들이죠? 이들이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풀어 주라고 하니까 간수가 그 소식을 전합니다. 36절에 나오듯이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라고 말해요? 그런데 여러분, 바울과 실라가 전날 밤에 어디에 있었어요? 간수의 집에 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지난주에 나누었습니다. 그죠? 그곳에서 몸을 씻고, 음식을 대접받고,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푼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날이 밝았을 때 다시 감옥 안에 있는 것이에요?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이 스스로 감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과 실라를 그냥 풀어 줄 권한이 간수에게 없었습니다. 간수가 그냥 보내면 죄수를 놓친 죄로 큰 벌, 그러니까 죽임을 당하거나 혹독한 처벌을 받을 수 있죠? 심지어 이것으로 인하여 그 가족들은 깊은 상처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할 미련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복음을 위해서, 도망치지도 않았고, 하나님의 뜻과 타인의 생명과 복음의 정당성을 먼저 생각한 바울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는 그런데 조용히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37절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내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그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겉으로 봐도 바울은 강하게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바울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개인적인 복수요?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생각해 보세요? 그는요? 이미 매를 맞을 대로 맞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감옥에 갇혔어요? 억울함이 가득한 그들에게 있어서 충분히 자기감정을 풀 수 있습니다. 안 그래요? 그런데 마치 누가가요? 이 사실을 볼드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바로 빌립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빌립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다는 이 의미가 무엇일까? 여러분, 빌립보 교회는요? 역사가 오래된 교회가 아닙니다. 이제 막 새로 생긴 교회입니다. 성도 숫자는 마치 우리 교회처럼 아주 작았을 것입니다. 루디아와 그 가족, 간수와 그 가족, 그리고 귀신 들렸었던 여종, 등등 몇몇 성도들이 모여 시작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지적한 이유는 이제 막 시작된 교회가 그들의 눈에 위험한 집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떠나면 남아 있는 성도들이 더 큰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는 범죄자가 아니다.” “우리는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도 아니다.” “불법을 저지른 쪽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들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다른 표현으로 빌리면 바로 바울의 담대함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단지 고난에서 꺼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드러내게 하시는 분이심을 나타낸 것이다”라는 이것입니다. 즉 바울은 그 자리에서 자기가 이런 사람됨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다움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은 늘 참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때로는 참아야 하죠? 하지만 때로는 말해야 합니다. 내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교회를 위해 해야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온유하면서도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38~39절을 볼까요? “부하들이 이 말을 상관들에게 보고하니 그들이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그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여러분, 이것만 보더라도 이제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그렇죠? 관리들이 바울과 실라가 로마 시민이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시민임을 알지만, 실라도 로마 시민? 네, 바울은 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고 실라는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도 로마 시민입니다. 로마 시민을 정식 재판도 없이 매질하고 감옥에 가두었다는 이 사실은 큰 불법입니다. 어제까지는 그들이 권력을 휘둘렀어요? 하지만, 오늘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직접 와서 두 사람을 데리고 나가며 그 성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보여 줍니까?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의 모습에는 온유하면서도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이 조롱당하는 상황에서 결코, 숨지 않습니다. 침묵할 때도 있고, 말해야 할 때도 있고, 참아야 할 때도 있고, 진리를 위해 서야 할 때가 있지만, 그 기준이요? 복음을 위한 것이고,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조용히 나가지 않은 마지막 이유입니다. 40절, 우리 한목소리로 읽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감옥에서 나와 어디로 갔다고요? 치료하러, 억울함을 하소연하러, 피곤하니 쉬러고요? 아닙니다. 루디아의 집으로 갑니다. 왜요? 형제들을 만나러, 성도들을 위로하러 갑니다. 이것이 조용히 나가지 않은 이유입니다. 여러분, 사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바울과 실라 아닙니까? 몸이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된 이들이 우선으로 위로를 받아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교회를 위로합니다. 자기 체험 속에만 머물지 않았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감동으로만 간직한 사람이 아니라, 그 은혜가 흘러가도록 자기 삶을 내어드린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자기 체험 속에만 머문다는 것은요? 하나님이 내게 하신 일을 내 감동으로만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자란 사람은 거기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그 은혜를 붙들고요? 다른 사람을 살리는 자리로 걸어갑니다. 위로를 받은 사람이 위로하는 사람이 되고, 붙들림을 받은 사람이 붙들어 주는 사람이 되고, 은혜로 살아난 사람이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 체험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신앙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요? 언제나 살리는 쪽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만 붙드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통해 또 다른 영혼을 붙드시기를 기뻐하십니다.은혜의 목적은 감동이 아니라 흘러감이에요?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 것은, 이제 나도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요? 루디아의 집에서 지난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감옥이 흔들렸던 일, 문이 열렸던 일, 간수가 구원받은 일, 그 자리에 이 간수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있었다면 그는 더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관리들이 직접 와서 데리고 나온 일, 하나님이 모든 상황 위에 계셨다는 일을 흐르도록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형제들을 위로하고 권면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지 “너희들 얼마나 놀랐니?, 괜찮아?” 정도의 뜻이 아니라 말씀으로 붙들어 주고, 믿음으로 세워 주고, 다시 굳게 서게 하는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서게 하였고, 말씀으로 서로를 세우는 공동체가 되게 하여습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아름다운 빌립보 교회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회는 어떻게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떠났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누가가 그리고 몇몇이 함께 남아 이 빌립보 교회에 남아, 교회를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빌립보 교회는요? 바울이 사랑으로 기억하는 아주 아름다운 교회로 자라납니다. 빌 1장 3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라고, 빌립보 교회는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교회였음을 고백합니다. 빌 1장 4~5절에 보면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너희가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라고 기쁨으로 기도하는 교회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빌 4장 1절에 보면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빌립보 교회를 자신의 사랑하는 자요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말로만 응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바울의 필요를 채워 주었던 교회, 복음을 사랑했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사람의 짐도 함께 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빌립보는요? 바울의 유럽 선교에서 매우 중요한 첫 열매의 자리였습니다. 루디아의 회심, 점치는 여종 사건, 간수의 회심을 통해 빌립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처음부터 고난 가운데 태어난 교회였고, 은혜로 시작된 교회였으며,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교회였습니다. 배경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상처도 달랐다는 이들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요? 바로 교회입니다. 세상에서는 섞일 수 없는 사람들이요? 십자가 아래에서 형제자매가 되는 곳,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바울은 이 작은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상태로 남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요? 자기 한 사람의 억울함보다 남겨질 교회의 미래를 보았고, 목자의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은요?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내 감정만 생각하면, 내 상처만 생각하면 쉽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생각하면, 다음 세대를 생각하면, 복음의 명예를 생각하면 달라집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역사 속 믿음의 사람들도요? 조용히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주장 철회하라는 압박을 받았지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조용히 물러나면 살 수 있었어요? 하지만 진리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숨길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도요?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노예무역 반대를 위해 오랫동안 싸웠습니다. 조용히 타협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신앙 선배들도 그러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상처 속에서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요? 사랑과 진리를 함께 붙들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약함이 아니고, 진리는 차가움도 아닙니다. 바울은요? 감옥 간수를 사랑했고, 관리들의 불의 앞에서 진리를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사랑도 붙들고, 진리도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겉으로 다 말할 수 없는 억울함과 눈물이 많아요? 그래서 가정에서 참고, 직장에서 참고, 자녀 때문에 참고, 건강 문제 앞에서 참고, 교회 안에서도 참고, 그렇게 오래 견디며 여기까지 오신 분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나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 안에 있었어요? 그 자리에 하나님도 계셨습니다. 억울한 밤은 버림받은 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밤이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침묵하는 것이 믿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때로는 내 자존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와 복음과 공동체를 위해 말해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상처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상처를 안고도 형제들을 위로했습니다.
바울은 조용히 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죄인처럼 도망쳐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교회가 불법 집단처럼 남겨져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진리가 뒷문으로 빠져나가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교회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의 등에는 아직 채찍 자국이 남아 있었을 이고, 여전히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지막까지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억울함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가기를 원합니다. 상처 속에서도 교회를 세우는 자리에 머물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위해 담대히 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감옥 같은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이유를 모르는 눈물의 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감옥이 끝이 아니라는 것, 침묵이 항상 믿음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사람은 비굴하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복음은 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처 때문에 작아지는 사람이 아니라 은혜 때문에 다시 서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을 품고 끝까지 교회를 세우는 사람 되기를, 받은 은혜를 여러분의 일터에서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흘려보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