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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 때문에 난리 났다

(행 17:1–9절)

 

 

여러분, 세상에는요? 일을 하면서 조용히 하는 사람이 있고, 지나간 자리마다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기억조차 희미해지지만, 어떤 사람은 그의 말과 삶과 믿음 때문에 오래도록 마음에 남습니다. 그 흔적은 이름을 드러내는 흔적이 아니라, 믿음의 향기와 복음의 울림과 사랑의 열매를 남기는 흔적입니다. 특히 복음의 사람은? 단순히 흔적만 남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능력으로 세상을 흔드는 사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무슨 군대를 끌고 온 것도, 정치 혁명을 일으키려 한 것도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해 구호를 외친 것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도시가 복음으로 흔들렸습니다. 복음을 전했을 뿐이고, 말씀을 강론했을 뿐이고 예수를 전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마음이 갈라졌고, 반대가 일어났으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다.”라고 외쳤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세상은 그것을 소동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질서를 깨뜨리는 일처럼 보였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일처럼 보였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요? 그것을 생명의 역사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원래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은 채 지나가는 말씀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흔들고요? 죄를 흔들고요? 스스로 괜찮다고 여겨 온 거짓 평안을 흔들고요? 오랫동안 마음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던 우상을 끌어내려 그 자리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왕으로 앉으시게 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들어가면 흔들림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망하게 하시는 흔들림이 아니에요? 살게 하시는 흔들림이고, 잃게 하시는 흔들림이 아니라 참 생명을 얻게 하시는 흔들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흔들림입니다.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흔들림입니다. 진짜 왕 되신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살게 하시려고 흔들림입니다. 그 흔들림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요? 그 흔들림 끝에 생명이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하였던 그 현장으로 이 시간 함께 들어가고자 합니다.

 

 

첫째로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바울입니다. 1절을 볼까요?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로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를 말합니다. 이들은 로마의 주요 도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나아갔는데,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즉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약 40마일 떨어진 암비볼리로 갔다는 것이고, 거기서 다시 서남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아볼로니아로 갔다는 것, 즉 계속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그 전날 맨살 위에 매질을 당해서 상처투성이에 찢기고 어쩌면 고름까지 나오는 상태의 몸으로, 충분한 치료와 휴식이 필요했었는데도, 암비볼리를 거쳐 아볼로니아로 갔고, 그것도 걸어서, 나흘 길이나 되는 이 길을 지나 서쪽으로 더 35마일이나 떨어진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빌립보에서부터 데살로니가까지 거리가 100마일이 넘었습니다. 이 거리를 그들은 걸어서 갔습니다.

 

 

특히 아볼로니아에서 데살로니가로 가는 길목에는 늪지대가 있습니다. 여기를 반드시 통과해야 데살로니가에 갑니다. 즉 말라리아가 도는 곳을 반드시 지나가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지어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야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 상처의 몸으로 힘든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마침내 언덕 위에서 데살로니가 앞바다를 보게 되었고, 그 건너편에는 정면으로 보이는 만년설로 뒤덮인 큰 산이 있는데, 이 산은 그리스에서 가장 높은 해발 2,917미터의 올림포스산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이 사는 곳이 정면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지죠? 바울도 헬라 지역이었던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이 신화에 대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듣기만 했지, 실제 가지 않았지만 이제 이 산을 눈으로 직접 보면서 그 언덕 아래 펼쳐져 있는 큰 도시, 마게도냐의 행정수도, 이 데살로니가에 강한 복음의 사명감을 가지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여러 개가 회당 중 어느 한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어떻게 해요? 그것이 바로 2절입니다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바울이 회당에 들어간 이유죠? 회당에는요? 대부분 하나님 말씀을 알고, 성경을 읽고,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복음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좋은 조건의 장소가 바로 회당입니다. 이곳에서 자기의 관례대로, 바울이 늘 하던 방식대로, 평소에 하던 선교의 습관과 원칙대로,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회당을 찾고, 거기서 성경을 펴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평소의 삶의 방식대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세 번의 안식일 동안 계속해서 말씀을 전했다는 말씀, 잠깐 던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설명하고, 꾸준히 전하고, 인내하며 들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성경을 가지고”, 자기 생각과 자기 경험과 감동적인 말이나 분위기로 밀어붙인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근거로, 즉 구약을 펴서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했는데, “강론하며”, 풀어서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밝히고, 설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3절입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뜻을 풀어”, 닫혀 있던 것을 열어 보였다, 그러니까 두루마리를 펴고, 구약성경을 펴서 말씀을 전하였고,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뜻을 밝히 드러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그리스도는 반드시 해를 받고 죽으셔야 하며,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하며, 바로 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즉 왜 예수님이 반드시 죽으셔야 했는지, 죄의 값이 왜? 죽음인지, 죄인은 자기 힘으로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이유와 구원자는 반드시 대신하여 죽음의 형벌을 감당하셔야만 했고,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으며 왜 반드시 부활하셔야 했는지를 전한 것입니다. 즉 그분이 죽으신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의 끝도 죽음으로 끝나지만, 예수님이 죽음을 깨뜨리고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길이 열렸음을 전한 것입니다.

 

 

둘째로 l 복음을 전하였더니 나타난 두 가지 반응입니다. 4절을 볼까요?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는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 사람들과 아직 개종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경건한 이방인들이라는 의미이고 적지 않은 귀부인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력한 정치지도자들의 부인들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상류층에 속한 부인들로 이들 또한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경건한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망설임이 없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고, 즉 바울과 실라가 예수님을 따르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기로 결단하며 나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상황이나요? 바로 이런 상황입니다. 보세요? 당시 데살로니가가 마케도니아의 행정수도인 이곳, 로마 총독이 이 도시에 있어서 지배 계층이 이 도시에 몰려 있었고, 특히 로마제국의 주된 세금 면제 도시였기에 Income Tex가 없어서 돈을 벌려는 상인들이 각지에서 몰려들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자 도시가 데살로니가였고 마게도냐의 최고 도시가 데살로니가였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데살로니가의 부유함이 얼마나 컸던지, 로마제국의 키케로가 발칸반도의 데살로니가를 “우리 영토의 심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도시에 바울 일행이 나타났는데, 부자들이 입는 옷과는 다른 모습이었겠죠? 초라하고 더러웠을지도 몰라요? 빌립보에서 맨몸으로 심한 태형까지 받았기에 몰골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그런 몸으로 무려 100마일이나 넘는 길을 며칠에 걸쳐 걸어 왔으니, 얼마나 지쳤겠어요? 안 그래요? 초라한 행색으로 회당에서 부유하고 우아한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인간을 위해 반드시 죽으셔야 만 했고, 또 인간을 위해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살아나셔야 했다, 그 예수만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 구원자다.’를 전한 내용을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에서 이렇게 적어 내리고 있습니다.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여러분이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전에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으나 심한 반대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어요?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습니다. 즉 삶의 방향을 예수님에게로 바꾸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반응도 같이 일어났어요? 그것이 바로 5절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문제의 출발이 무엇이라고요? 교리 논쟁도 아닌, 그들의 마음속 중심에는 시기였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바울과 실라의 말을 듣고 예수께로 나아가는 것을 보며 견딜 수 없었던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도 기뻐하지 못하였고, 은혜의 열매를 보고도, 감사하지 못하여서 결국, 어떤 행동을 합니까? 감정과 폭력의 자리로 끌고 갔죠? 그것이 바로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이 이야기입니다. 무엇이에요? 진리로 싸울 수 없으니까, 군중을 끌어들였던 것이었고, 말씀으로 대답하지 못하니까 사람의 수와 분위기로 밀어붙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불량한 사람들”을 통해, 즉 쉽게 선동되는 사람들을 통해, 중심 없이 떠도는 사람들을 통해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끌어모았고, “성을 소동하게 하여” 복음 자체가 소동을 만든 것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죄성이 이 소동을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설명한 것밖에 없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이 도시 전체를 흔들었다는 것, 원인이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거부한 죄 된 마음이 거칠어졌고 폭력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복음에 반대하는 마음이 무리 지어 움직였습니다. 왜? 일까요?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사람은요? 세상에 불편한 존재가 되지만, 하나님께는 귀한 사람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즉 복음을 따라 살기에 세상의 기준에 잘 맞지도 않고, 세상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지도 않습니다. 세상은 타협을 편안해하고, 진실보다 이익을 앞세우고, 거룩보다 성공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십자가보다 박수를 더 원하지만, 복음의 사람은 정직하려 하고, 진리를 붙들려 하고, 죄와 적당히 손잡지 않으려 하고,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두려워하니까 세상이 그런 사람을 불편해합니다. 즉 복음의 사람 그 존재 자체만으로 세상이 붙들고 있는 거짓 평안과 숨기고 싶은 죄를 드러내기 때문에 불편해합니다. 이것은 경험해 본 자만이 압니다. 왜냐? 세상은 자주 복음의 사람을 향해 “왜 그렇게 유별나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니?” “좀 적당히 하면 안 되니?”라고 말하죠? 그런데 복음의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됩니다. 왜요? 복음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바뀌게 하기에 그렇습니다.

 

 

우상이 무너지게 하고, 제사를 거부하잖아요? 죄가 드러나고, 거짓 평안이 깨지게 하고요? 왕 되신 예수님 앞에 무릎 꿇게 하고요? 세상은 그것을 “어지럽힌다”라고 표현하지만, 솔직히 이것은 살리시는 역사입니다. 그죠? 왜냐하면요? 잠든 양심이 깨어나고, 굳은 마음이 무너지고, 삶의 방향이 뒤집히는 일이기에 흔들림이 생기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역사입니다. 이 폭력이 누구의 집으로 향하나요? 야손의 집을 덮칩니다. 7절을 볼까요?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야손의 집에 쳐들어간 이유가 복음의 사람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다는 이유, 즉 야손이 복음 편에 선 것이고, 야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기 삶 안으로 받아들인 이유, 즉 자기 집을 열어 놓음으로 믿음을 보여 준 이유가 이들의 고발의 핵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라고, 악의적으로 왜곡된 고발을 하지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진짜 왕이고 왕중의 왕이기에 그렇습니다. 로마 사회에서는 가이사가 최고의 권력자이지만 바울과 실라가 전한 것은 “예수가 주이시다, 예수가 왕이시다”라는 이것은 사실이라는 것, 아이러니하게 이들이 예수님을 주님, 왕, 참된 임금으로 모시는 자들이라 고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결정권도, 내 가치관도, 내 우선순위도 그분 앞에 놓는 이것을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사람에게 나타난 결과입니다. 여러분, 복음의 사람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맞추어 살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려고 애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고, 편안한 길보다 바른길을 택했으며,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을 지키려 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솔직히 그 시대에 불편한 사람이죠? 모두가 자기 마음대로 살 때,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엘리야요?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왕과 백성이 우상에게 기울었을 때, 홀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심을 외쳤습니다. 세례 요한과 바울,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도요? 세상릉 다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너무나 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주인공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담긴 내용들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세상은요? 바울과 실라를 향해 “이 사람들 때문에 난리 났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해요? 즉 복음은 원래 조용히 지나가는 메시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복음은 죽은 영혼을 살리고요? 잠든 양심을 깨우고요? 죄에 눌린 사람을 일으키고요? 우상에 붙들린 마음을 흔들어서 예수님 앞에 서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에 편안한 사람으로만 남는 것보다 복음 때문에 거룩한 흔들림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귀합니다. 우리가 그래서 “나는 당신 때문에, 예수님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당신 때문에 우리 가정이 살아났고, 당신 때문에 교회가 따뜻해졌으며, 당신 때문에 복음이 진짜임을 보게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이보다 더 복된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듣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세상이 오해하며 했던 말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그래, 너는 이 땅에서 나 때문에, 거룩한 흔들림을 일으키며 살았구나~”라는 칭찬을 듣는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우리 사랑의교회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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